石然 楊基薰의 繪畵 硏究
저자
발행사항
성남 :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學大學院, 2013
학위논문사항
學位論文(碩士) --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學大學院 , 美術史學專功 , 2013. 2
발행연도
2013
작성언어
한국어
KDC
653.11 판사항(5)
발행국(도시)
경기도
형태사항
vi, 164 p. : 삽화 ; 26 cm
일반주기명
부록 수록
참고문헌: p. 96-104
소장기관
This paper focused on life and paintings of Seokeon(石然) Yang Gi-hun(楊基薰, 1843~1911) who had worked in the late 19th and early 20th century.
Yang Gi-hun was not just a court painter, but he was an actually occupational painter of noble birth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in Pyongyang. He was also recommended to a position late in life at 49, and he started his career as a low-ranking government official. In 1905, he was promoted to Jeong-3-poom(正三品), however, he focused on drawings in several areas like Pyongyang, Seoul and Japan.
When he was at 12, he learned paintings and calligraphic works from Sobul(少芾) Lee Hui-pal(李羲八, 1796~?), and he worked in Pyongyang until he came to Seoul in 1905. He had a company with Pyongyang calligraphical painter Sonam(少南) Lee Hui-su(李喜秀, 1836~1909), and he also had a meeting with Korean and Japan government officials who visited in Pyongyang on business. He took his son Yang Yeong-jin(楊英鎭, 1881~1918) and Kin Yu-tak(金有鐸, 1875~?) as pupils to foster talented artists. Meanwhile, he was known to paint <The Album leaf of The United States(美國風俗畵帖)> after following Min Yeong-ik(閔泳翊, 1860∼1914) to the US in 1883. But this sould be considered again because it doesn’t match with his youngest son Yang Yu-jin(楊瑜鎭, 1884~?)’s birth time.
When he resigned from Chamseogwan(參書官) of Punggyeonggung(豐 慶宮) in 1905, he came to Seoul and had social intercourse with local government officials to take part in social activities. These activities were related to Seowu(西友) Society made up with Seokyeong(西京) intellectuals as a member of it. He painted <HyeolJuk(血竹)> to put on Daehanmaeilshinbo(大韓每日申報) in 1906 at Park Eun-sik(朴殷植, 1859~1925)’s request who was a founder member of Seowu Society. In 1907, he also attended promoters meeting of Gyoyuk-Seohwagwan (敎育書畵館) related to educational business with Seowu Society, and established by Kin Yu-Tak and Kin Kyu-jin(金圭鎭, 1868~1933). At that time, he presented works with Sinjagwan(臣字款) to court as a local painter exceptionally. This Sinjagwan drawing reflected the change of court paintings form of production. Thus, as a local artist, his special backgrounds and his works to a superior had important roles to represent for changed aspect of the age.
Yang Gi-hun had finished short life in Seoul for 3 years and he worked in Japan in 1908. He opened calligraphical paint exhibition. He met many people from various circles and got a prize for presenting Noando(蘆雁圖) to emperor of Meiji(明治). But he returned to Korea because of an injury in 1909.
The most famous of his drawings is NoAndo, but he also painted a lot of Baekrodo(白鷺圖) and Sagunja(四君子). He created his own form in detailed expression of paintings in Joseon Dynasty traditional style. He especially enjoyed painting maehwa(梅花) among Sagunja, and in his style, there is a affinity with Yeohang(閭巷) artists like JoHui-ryong(趙熙龍, 1789∼1866) and Yu Suk(劉淑, 1827∼1873). He drew other Sagunja in a way of Chinese art style and trend in painters at the moment. These works were connected with drawings in circulation during the period of Joseon Dynasty because of typical style and repetitive subjects for poetry. On the other hand, his pieces presented to court were drawn exquisitely or he tried to make new one, and also he borrowed old poetries or he composed a poem for the title of poetry.
Yang Gi-hun made Japhwabyung(雜畵屛) which was a big trend in late Joseon Dynasty painters with a picture of flowers and birds. His Japhwabyung made up with limited materials like Indian ink, and it was different from Seoul artists’ one. Not few works are in existence during the time because of fair demand.
His landscape paintings were not many, and these arts using different subject of poetry were considered irrelevant with drawings produced for circulation in calligraphical paintings. His landscape work was usual scenery paintings of Namjong(南宗畵) landscape style. Its transforming composition borrowed from Chinese art style and description of natural features reflected great vogue of the genre of paintings at that time. This appears in Sinjaguan drawings presented to court before, but it has novel esthetic sense with different structure, composition and colors. Through some works fell under Sokyeongsansuinmul(小景山水人物畵) we could see his art of expression in character with his weak writing in small characters.
Yang Gi-hun’s Ehaehwa(魚蟹畵) was selected as one of painting subjects in Japhwabyung mostly, and was regarded as one of painting subjects for demander needs due to production with no part of piece. He mainly drew shrimp, crab, mandarin fish, blowfish in late Joseon with traditional painting style, and he also added up his own style using Mukbeop(墨法) of Molgolbeop(沒骨法).
Through his activities and artworks, we could examine on painters aspect and new tendency. And also I hope this paper is of some help to understand local artists’ way of existence in late 19th century.
본 논문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활동한 石然 楊基薰(1843~1911) 의 생애와 회화세계를 고찰한 것이다.
양기훈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달리 화원이 아닌 평양에서 대대로 世居 해온 양반가문 출신의 직업화가이다. 또한 그는 49세의 늦은 나이에 천거에 의해 하급관직생활을 시작한 후 1905년에는 정3품으로 승차한 이력이 있다. 하지만 양기훈은 평양, 서울, 일본을 아우르며 화가로서의 활동에 주력하였다.
양기훈은 12세부터 少芾 李羲八(1796~?)에게서 서화를 배운 후, 서울로 상경하는 1905년까지는 평양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평양의 서화가 少南 李喜秀 (1836~1909)와 서화로서 교유하였고, 평양을 업무차 다녀간 한일 관료들과도 만남을 가졌다. 또한 그의 아들 양영진과 김유탁에게 그림을 가르치며 화가 양성에도 힘썼다. 한편, 양기훈은 1883년 민영익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풍속화첩》을 그렸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는 그의 막내 아들 양유진의 출생 시기와 맞지 않아 재고되어야 한다.
양기훈은 1905년 풍경궁 참서관에서 사퇴한 후 서울로 상경하여 관서지방의 출신의 인사들과 교유하며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활동에는 그가 회원으로 가입했던 서경출신의 지식인들로 구성된 서우학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양기훈은 서우학회의 창립구성원이었던 朴殷植(1859~1925)의 부탁으로 1906년에는 『대한매일신보』에 실을 <혈죽>을 그렸다. 또한 1907년에는 서우학회의 교육사업과 관련이 있는 金有鐸(1875~?)과 金圭鎭(1868~1933)이 설립한 교육서화관 발기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 시기 양기훈은 지방 화단의 화가로서는 이례적으로 궁중에 臣字款 있는 작품을 헌상하였다. 이러한 궁중에 헌상된 신자관 회화는 당시 궁중회화 제작방식의 변화를 반영한다. 따라서 지방출신 화가라는 양기훈의 독특한 이력과 헌상된 작품들은 이 시기 변화된 시대양상을 대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양기훈은 약 3년간의 짧은 서울생활을 뒤로 하고 1908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활동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서화회를 개최하며 다양한 인사들과 만났고, 明治 皇帝에게 노안도를 헌상하여 상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부상을 입고 1909년에 귀국하였다.
양기훈의 그림 중 가장 주목 받는 작품은 노안도지만 이외에도 백로도, 사군자도 등도 많이 그렸다. 노안도와 백로도는 조선시대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도상의 세부적인 표현에서는 그만의 양식을 완성하였다. 사군자 중에서는 특히 매화를 즐겨 그렸으며, 화풍에서는 趙熙龍(1789~1866), 田琦(1825∼1854) 등 여항화가들과 친연성을 보인다. 그 외 사군자 소재들은 중국화보와 당시 화단의 유행을 따랐다. 이러한 작품들은 대부분 정형화된 화풍과 반복적인 제시로 인해 당시 유통되었던 그림과 관련이 깊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궁중에 헌상된 작품은 그의 매너리즘에 빠진 작품들과는 달리 좀 더 세밀하게 표현하거나 새로운 시도를 하였으며, 제시 역시 다른 고시를 차용하거나 직접 작시하였다.
양기훈은 이러한 화조・화훼의 소재를 바탕으로 조선말기 화단에서 크게 유행한 잡화병을 제작하였다. 그는 수묵위주의 한정된 소재로 그린 잡화병을 반복적으로 그렸지만 이러한 그의 작품들은 당시 수요가 상당했던 듯 적지 않은 수의 작품이 현존한다.
양기훈의 산수화는 그 수가 많지 않고, 모두 다른 제시를 사용하여 서화유통을 위해 제작했던 회화와는 크게 관련이 없는 화목으로 보인다. 그의 산수화는 남종산수화풍의 정형산수로 중국화보를 차용하여 변형시킨 구성과 경물묘사 등은 당시 화단의 유행을 반영한다. 하지만 궁중에 헌상된 작품은 다른 작품들과는 다른 구도와 구성 및 색채까지 가미하여 색다른 미감을 보인다. 한편, 소경산수인물에 해당되는 작품들을 통해서는 세필에 능하지 못했던 그의 인물표 현법을 살펴 볼 수 있다.
양기훈의 어해화는 대부분 잡화병의 하나의 화목으로 채택되었고, 낱폭으로는 거의 제작되지 않아 수요자를 의식한 화목 중 하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주로 새우・게, 쏘가리, 복어 그림을 그렸으며, 화풍은 조선후기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몰골법의 묵법을 최대한 이용한 자신만의 화풍을 가미하였다.
이처럼 양기훈은 당시 화단의 경향을 반영하며 다양한 활동과 작품세계를 펼쳤다. 따라서 지금까지 평양 출신의 노안에 능한 화가 정도로만 평가되어 온 부분은 재고되어야 한다. 또한 이 연구를 통해 19세기 후반 지방화단과 화가에 대한 인식 역시 재고되기를 바라며 향후 이러한 부분의 연구가 더욱 활성화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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