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時代 紹修書院 講學 硏究
저자
발행사항
성남 :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學大學院, 2014
학위논문사항
학위논문(박사) --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學大學院 , 敎育學專攻 , 2014. 2
발행연도
2014
작성언어
한국어
주제어
KDC
370.911 판사항(5)
발행국(도시)
경기도
형태사항
iXi, 268 p. : 표; 26 cm
소장기관
本研究以朝鲜时代的绍修书院为对象,意在探索绍修书院的讲学理念,实况及变化面 貌,探究16至19世纪各时期讲学的特征和意义,并说明其教育学的意义。众所周知,朝鲜 最初的书院是朝鲜中期由周世鹏以‘南宋朱子白鹿洞书院的掌故’为依据而创建的白云洞书 院。但是确立于宋代的中国书院制度,其在北宋与南宋两时期性质各有所不同。地方官学 发展以前,北宋的书院担当着官学替补的功能,与科举制度密切相关。庆历年间,在历经了三次大规模的兴学运动之后,官学急剧发展,而北宋书院或废止,或被纳入官学体系之 中,逐渐走上了衰退之路。
处于停滞状态的宋代书院再次走上复兴之路是由于南宋的朱熹。朱子在任期间,批判了 当时官学教学仅局限于科举考试范围的现状,而与吕祖谦,张栻等一起主导了白鹿洞书 院,岳麓书院,石鼓书院等书院的复兴运动。此时朱子以张载和二程所提倡的‘正学’作为书 院教育理想,赋予了南宋书院以‘新的私学精神’。以朱子为中心的这场南宋书院复兴运动,诞生了所谓‘探求张载伊洛之学问的书院’,即‘理学书院’。他们探求理学的目的就在于对 ‘道’的领悟及实践。此时书院的教育目标也不再是‘文章学或备考科举’,而是变为‘通过对理 学的探究而到达对道德领悟及实践’。因此,与囿于科举之学的北宋书院不同,因朱子而诞生的理学书院,成为了自由讲论理学和道学的学术及教育基地。更重要的是,理学书院的 出现和其学术氛围对之后学派的形成和学术发展起到了莫大的影响。而其中心即在于书院 之‘讲学’。因朱子而诞生的南宋理学书院突破了科举的束缚,以‘道学和义理之学’为目标, 使‘自由的学说传播’及‘以师说的继承为中心的学派的形成’成为可能,这些便是通过各书院文人们的‘讲学’来实现的。这在性质上与以文章学和科举为目的北宋书院完全不同。
根据南宋朱子所创建的书院的模型,朝鲜的书院开始讲论道学,并通过讲学来继承、传 播师说,由此逐渐成为各学派形成的大本营,此种状况始于17世纪以后。在此之前,岭南 地区自退溪死后的16世纪末开始,已有退溪门人开始在陶山·易东·庐江·伊山等书院中祭享 退溪,并通过讲学以继承先师的学说。退溪门人死后,亦由其后门人建立书院,供奉先师 牌位,进行讲学活动,由此,17世纪左右,岭南地区的退溪学开始分化为以金诚一,柳成 龙,郑逑等为首的各系。17世纪之后,随着紫云·绍贤·遯岩·华阳洞·考岩等书院的建立,以 书院为中心,形成了自栗谷李珥始,由金长生,宋时烈继承延续的畿湖学派的性理说和礼 说的分化和发展,而18世纪石室书院的讲学,则为当时湖洛论争中首尔地区洛论的思想根 基确立奠定了基础。
然而朝鲜最初的书院白云洞书院的讲学,到17世纪为止仍与‘讲论道学,传承师说’的书 院形象相去甚远。这是受白云洞书院的创建者周世鹏的书院观的影响所致。虽说周世鹏模 仿南宋朱子白鹿洞书院之制度建立白云洞书院,但事实上他对书院的认识仍然是基于北宋 时期的书院认识,而不是南宋。周世鹏的这种书院是依据北宋的模型,将书院看作‘科业准 备层次上的官学辅助机构’,这对于创立初期白云洞书院讲学的性质和方式都产生了质的影 响,而且这种影响一直持续到了17世纪初期。那么,既然他依据的是北宋的模式,为何又 要从朱子白鹿洞书院的掌故中寻找白云洞书院的创立根据呢?他所模仿的‘朱子白鹿洞书院 的掌故’具体是指什么,他未曾遵循的朱子的标准又是什么呢?本文Ⅱ章当中对这个问题给 予了回答,并由此探讨了周世鹏建立白云洞书院时所构想的教育的性质,以及他的书院 观。他的书院观不仅与其对宋代书院制度的理解方式,更与其对朱子学的理解方式,及他 的趋向性都有密切的关联。同时,Ⅱ章还考察了周世鹏的书院观对16世纪绍修书院的讲学 所产生的实际影响,以及当时的讲学的具体形成状况,揭示了16世纪绍修书院讲学的性质 和意义,成果和限制。
南宋朱熹确立的书院观被朝鲜社会所理解是始于周世鹏之后的退溪。正如同朱子之复兴 南宋书院,退溪赴任丰基郡守,通过向朝廷申请白云洞书院赐额,成功地奠定书院获得国 家承认和支援的制度基础。同时,对于官学受科举和利禄之风浸染,仅将学问看作是通过 科举和获取利禄的手段的诸多弊端进行了指责,他强调书院立意只在‘讲明道学’,书院讲究 学问的方法在于古人的为己之学。他继承朱子的书院观,为将其植根于朝鲜社会而付出了 诸多努力,然而欲冲破科举束缚,确立旨在实践真正的为己之学的道学书院却相当不易。他在任丰基郡守期间,每闲暇时即往白云洞书院讲论‘道学’,力图刷新偏重科业的书院学 风,使诸生领悟道学真谛,但到17世纪前期为止,绍修书院的讲学重心依然是科学,而非道学。
对此种讲学方式的批判始于17世纪前半期左右。17世纪,绍修书院的运营者对于当时绍 修书院偏重科举的讲学方式表现出深深的担忧和批判,为将绍修书院改变成为书院原本意 义上的讲明道学的讲学空间而倾注了巨大的努力。其中之一便是围绕着创立初期周世鹏所 定的以科举入格者为中心的入院资格而展开的‘罢格论争’。自17世纪初开始的这场论争当 中,站在‘罢格论’的立场上的退溪门人指出应改正以科举入格者为中心的入院规定,主张罢 格,阐明了儒学教育的本质和书院存在的意义所在。历经一番曲折,到18世纪初,这场论 争终以罢格收尾,正是以此论争为决定性契机,17世纪前半期为止以‘科业为主’而运营的 绍修书院讲学,到了18世纪之后,其性质变为‘以道学为中心’。Ⅲ章考察了17世纪上半期 为止,科业为主的绍修书院讲学的运营实况,并研究了退溪门人掀起的对科业为中心的讲 学方式的批判,以及罢格论证中主张罢格者的主张。由此来展示由朱子和退溪所阐明的‘讲 明道学之处’的书院讲学理念,于17世纪以后在绍修书院的确立过程。
18世纪,由于书院的暴增,‘书院本是为儒生讲学而设,但今书院无讲学之实,仅以祭享为是,冒占土地良丁,招致社会弊端’等批判日益深化,朝廷实施了书院的叠设禁止、不许 赐额、毁损等各种控制政策。因而,地方官们苦于构建恢复乡村的教育职能的方案,各个 书院亦在能力范围之内,开设讲学,为维持书院教育职能而竭尽所能。绍修书院作为最初 的赐额书院自然不属于朝廷的直接控制对象,但书院设立的增加对18世纪绍修书院经济基 础的弱化产生了直接的影响。经济基础的弱化随即导致了讲学运营方式的直接变化,作为 讲学运营上的应变之策,18世纪开始出现了像‘三冬居斋’、‘轮番居斋’等前所未有的方式。
除了书院的暴增之外,影响18世纪绍修书院讲学的重要事件就是始于17世纪的‘罢格论 争’。1719年此论争最终以罢格的确定收场,同时绍修书院讲学性质由17世纪以来以‘科业’ 为中心明确地变为‘道学’为主。这也使得讲学形态由17世纪为止以科业为目的的‘居接’变为 18世纪的体现道学目的的‘居斋’形态。居斋标榜的目的是‘道学的探求和实践’,试图通过‘个 别读书·敬读·通读’等教育课程来实现此目的。而且,18世纪初开始标榜为居斋目的的‘道 学’在进入18世纪下半期后,进一步具体化为对‘心学理论和实践’的探究。即,在17世纪, 朱子和退溪所阐明的‘讲明道学之处’的书院讲学理念虽得到了共享和扩散,但其未曾反映到 实际讲学之中,因此如果说17世纪是这样一个过渡期的话,那么18世纪就可以说是书院具 体的讲学形态和方式产生变化,书院讲学理念的固定化时期。Ⅳ章通过对居斋的教育课程 和运行状况、敬读及通读教材的分析,说明了经过17世纪的过渡期后,18世纪作为‘讲明道 学之处’的书院,其讲学理念的确定,及心学的探求和实践的道学具体化的过程。并对18世 纪后半期居斋的心学特征,以及以科业为内容的白日场及旬制活跃的背景进行了探讨。
18世纪,讲学财政枯竭,地方官的全面支持亦不复存在,绍修书院将四时居接变为三冬 居斋,并采用轮番居斋的方式来减缩居斋人数和时间,依据院任的关心和能力,虽不稳定 但仍勉强维持讲学。进入18世纪中期,绍修书院设置运营养士厅,以确保讲学财政基础的 稳定。但养士厅也是历经反复的中断和复设,最终废止于18世纪后期。而在19世纪,绍修 书院的财政困难加剧,甚至到了连‘三冬居斋’也难以开设的地步。因此绍修书院将院长居住 地的地区限制范围扩大到道内,任命前职·现职官吏为院长,同时还采用了顺兴府使兼任院 长的兼院长制度,借助地方官的支援以维持讲学。
19世纪讲学的另一个变化是,每年根据季节将科业与道学并行,并作为惯例固定下来。这一点反映了19世纪的书院学生‘大多数是科举应试的儒生’的这一现实状况。即是说,在 19世纪,考虑到将要应试科举的大多数书院儒生的情况,书院每年按照季节同时开设以科 业和道学为目的教育课程,对儒生们的科举应试采取较为现实和积极地应对政策。
另外,19世纪绍修书院最大的变化是开始显现出最初的学派性特征,而之前一直到18世 纪为止,绍修书院都未曾出现过分明的学脉和学派性趋向。19世纪,大山李象靖和定斋柳 致明的门人们,也即是湖学的核心人物,担任洞主并主导着书院的讲学。在讲学内容方 面,主要包括心学指南书『朱子书节要』,阐释圣学和心学要谛的退溪『圣学十图』,李 象靖和柳致明极为重视的强调实践性工夫论的朱子「玉山讲义」、『延平答问』,以及贯 通未发和已发,动静的通体工夫,阐述李象靖所注重的戒慎恐惧之意义的『中庸』等等, 19世纪的绍修书院通过这样的讲学继承着湖学注重心学与日常实践学术特征。绍修书院直 至19世纪才显现出学脉和学派性趋向,这一点有别于16、17世纪其他书院为继承、传播特 定先师,特定学派的学说而建,并以特定学脉为中心开展讲学活动的状况,是体现绍修书 院讲学的变化和特征之所在。
Ⅴ章考察了19世纪陷于财政困境中的绍修书院,授院长之职于前职·在职官员或采用兼院 长制度以维持讲学的状况,并通过其教育课程的变化和1827年中庸讲会的讲论内容,分析 了19世纪讲学中湖学学风的继承过程。1828年文会之后,书院以李泰淳,李秉运,李家 淳,姜枟,柳鼎文等湖学核心人物为中心,组织了一次历时9天的少白山游览活动,本章对 这次游览的过程和意义也进行了探讨。这次的游览,不仅是一个游息的过程,也是以‘道的 发现和体认’为目标的书院教育课程中的一环。在游览的最后4天,以李秉运,李家淳,姜 枟,柳鼎文为首的学者们还在山寺中讲读、校检了大山门人黄龙汉的文集,这对19世纪绍 修书院大山学脉的传承也起到了一定作用。另外,主要出身于安东和礼安,原本以高山书 堂和虎溪书院为活动舞台的湖学核心人物们,他们是在怎样的背景和契机下在19世纪登场 绍修书院的呢?本章的最后一节主要探讨了这一问题。
最后,Ⅵ章对朝鲜时代绍修书院讲学的教育学意义进行了分析。首先,在当时,对于‘书 院这个地方究竟应进行什么样的学习’这样有关书院本质的问题尚未明确,可以说,作为朝鲜最初的书院,绍修书院所必经的讲学变化的过程,也就是朝鲜书院本质得以确立的过程。18世纪以来,绍修书院的教育课程倡导道学和心学,它既是以敬工夫论来体现的对身 心的严格检束,也是囊括‘藏修,游息,诗书礼乐’在内的教育课程。另外,这种教育课程其 终极目标在于,建立‘身与心’,‘世界与我’之间的一种正确的联系,从而使知识与德性不相 背离,并使之融入于日常生活中的每一瞬间。也就是说,绍修书院讲学所追求的‘知识与德 性相结合的工夫论’最终是通过这样的‘联系’来实现的,而所有的教育都是以‘知识与德性的 结合’或‘知识与人性的统合’为前提的。如今韩国公教育的根本问题,不是偏重应试教育, 只注重知识教育而忽视人性教育的问题,而是在于不能成功地以知识与人性相关联的方式来实施,即是说,在于知识与学习者不能形成‘真正的联系’的问题。从这一点来看,朝鲜时代谋求‘通过联系的建立来实现知识与德性的结合’的绍修书院讲学传统,对现代公教育启示 颇多。
이 연구는 朝鮮時代 紹修書院을 대상으로, 소수서원 講學의 이념과 실제 및 그 변화 양상을 추적하여,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각 시기별 강학의 특징과 의미를 구명하고, 그 교육학적 의미를 해석하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조선 최초의 서원은 조선 중기 주세붕에 의해 건립되었다. 그는 백운동서원을 창건하면서 그 설립 근거를 ‘남송대 朱子의 白鹿洞書院 故事’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송대에 확립된 중국의 서원제도는 북송과 남송이 각각 그 성격을 달리 하였다. 지방 官學이 발전되기 이전, 북송의 서원은 관학을 대체하거나 보충하는 기능을 담당하면서 과거제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慶曆 연간 이후 세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흥학 운동을 통해 관학이 급격히 발전하게 되자, 북송의 서원은 폐기되거나 관학 체계 속으로 편입되어가며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렇게 침체되었던 송대 서원이 다시 부흥하게 된 건 남송의 주자에 의해서였다. 주자는 관료로 있을 때, 당시 科擧 준비를 위한 학문 전수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던 관학의 세태를 비판하면서 여조겸, 장식 등과 함께 백록동서원, 악록서원, 석고서원등 서원 부흥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때 주자는 張載와 二程이 표방했던 ‘正學’을 서원 교육의 이상으로 제시하며 남송서원에 ‘새로운 私學 정신’을 부여하였다. 주자를 중심으로 한 남송의 서원부흥운동은 ‘張載와 伊洛의 학문을 탐구하는 서원’, 곧 ‘理學書院’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그들이 理學을 탐구하는 목적은 바로 ‘道’를 깨달아 실천하는데 있었다. 이제 서원의 교육 목표는 더 이상 ‘문장학이나 과거 대비’가 아니라, ‘理學 의 탐구를 통해 道를 깨닫고 실천하는 것’으로 변화되었다. 그리하여 주자에 의해 탄생한 理學書院은 科擧之學에 얽매였던 북송서원과 달리, 理學과 道學을 자유롭게 강론하는 학문과 교육의 장소로 탈바꿈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理學書院의 등장과 학문풍토가 이후 학파의 형성과 학문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바로 서원 ‘講學’이 있었다. 주자에 의해 탄생한 남송의 理學書院은 科擧의 구속을 벗어나 ‘道學과 義理之學’을 목표로 ‘자유로운 학설의 전파’ 및 ‘師說의 계승을 통한 학파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였고, 이는 곧 각 서원에서 문인들의 ‘講學’을 통해 실현되었다. 이는 문장학과 과거 대비를 목표로 했던 북송의 서원과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남송대 주자가 확립한 서원 모델을 따라, 조선에서 道學을 강론하며 강학을 통해 師說을 계승, 전파함으로써 서원이 다양한 학파 형성의 본거지가 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이후였다. 이에 앞서 이미 영남에서는 퇴계 사후인 16세기 말부터 그 문인들이 陶山․易東․廬江․伊山書院 등에서 퇴계를 제향하며 강학을 통해 스승의 학설을 계승 하고 있었다. 퇴계 문인들의 사후에는 다시 그 문인들이 서원을 건립하여 스승의 위패를 모시고 강학함으로써, 17세기 무렵 영남지역의 퇴계학은 김성일․유성룡․정구 등의 계열로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17세기 이후에는 紫雲․紹賢․遯巖․華陽洞․考巖書院 등이 건립되면서 이들 서원을 중심으로 栗谷 李珥로부터 金長生, 宋時烈로 이어지는 畿湖 學派의 性理說과 禮說이 분화, 발전하였고, 18세기 石室書院의 강학은 당시 호락논쟁 에서 서울 지역 洛論의 사상적 기반을 확립하는 터전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의 강학은 17세기까지도 ‘道學을 강론하거나 師說을 계승’하는 서원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는 백운동서원을 창건한 주세붕의 서원관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남송대 주자의 백록동서원 제도를 모방하여 백운동서원을 설립한다고 했던 주세붕의 서원에 대한 인식은, 사실상 남송보다는 북송 서원에 대한 이해에 기반하고 있었다. 북송의 모델을 따라 서원을 ‘科業을 준비시키는 관학의 보조기구’처럼 인식했던 주세붕의 서원관은, 설립 초기 백운동서원 강학의 성격과 방식을 규정하는 데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그 영향은 17세기 초반 무렵까지도 지속되었다. 그렇다면, 한편 북송의 모델을 따르면서, 그는 왜 백운동서원의 설립 근거를 주자의 백록동서원 고사에서 찾고자 하였을까? 그가 모방했다고 한 ‘주자의 백록동서원 고사’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며, 또 그가 따르지 못한 주자의 행적은 과연 무엇인가? Ⅱ장에서는 먼저 이 질문에 답함으로써, 백운동서원을 세우면서 주세붕이 구상했던 교육의 성격, 그의 서원관을 검토하고자 하였다. 그의 서원관은 송대 서원제도에 대한 이해 방식 뿐 아니라, 주자학에 대한 이해 방식 및 그 지향성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아울러 Ⅱ장에서는 그의 서원관이 16세기 소수서원 강학 실제에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당시 강학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보고, 16세기 소수서원 강학의 성격과 의미, 그 성과와 한계를 짚어보고자 하였다.
남송대 주자가 확립했던 서원관이 조선 사회에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주세붕을 지나 퇴계에 이르러서였다. 그는 주자가 남송서원을 부흥할 때 했던 것처럼,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조정에 백운동서원의 사액을 청함으로써 서원이 국가의 승인과 지원을 획득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성공하였다. 동시에 科擧와 祿利의 풍습에 물들어 학문을 오직 과거에 합격하고 녹봉을 취하는 수단으로만 여기는 官學의 폐해를 지적하고, 서원을 설립한 뜻은 오직 ‘道學을 講明’하는 데 있으며, 서원에서 학문 하는 방법은 옛 사람의 爲己之學에 두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는 주자의 서원관을 계승하여 이를 조선사회에 정착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科擧의 구속에서 벗어나 참다운 爲己之學을 실천하는 道學 서원의 정착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풍기군수 재임 시에도 틈날 때마다 백운동서원을 찾아 ‘道學’을 강론하며, 당시 科業에 치우치고 있던 백운동서원의 학풍을 쇄신하고, 제생들에게 道學이 무엇인지를 깨우쳐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17세기 초반까지도 소수서원의 강학은 여전히 道學이 아닌 科學에 치우치고 있었다.
이 같은 강학 방식에 비판의 목소리가 제기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초반 무렵이었다. 17세기 소수서원의 운영자들은 과거공부에 치중되어 있던 당시 소수서원의 강학 방식에 심각한 우려와 비판을 드러내면서, 소수서원을 道學을 강명하는 서원 본래의 강학 공간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 노력 중 하나가 바로, 설립 초기 주세붕이 정한 과거 입격자 중심의 입원 자격을 두고 벌어진 ‘罷格 논쟁’이었다. 17세기 초부터 전개되기 시작한 이 논쟁에서 퇴계 문인들은, 과거 입격자 중심의 입원 규정은 개정되어야 한다는 ‘罷格論’의 입장에서 罷格을 주장하며, 유학교육의 본질과 서원의 존재 의의가 어디에 있는지를 설파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18세기 초에 이르러 罷格으로 종결된 이 논쟁은, 17세기 초반까지 ‘科業 위주’로 운영되던 소수서원 강학의 성격이 18세기에 이르러 ‘道學 중심’으로 변모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Ⅲ장에서는 17세기 초반까지 科業 위주로 이루어진 소수서원 강학의 운영 실제를 살펴보고, 퇴계 문인을 중심으로 제기된 科業 위주의 강학방식에 대한 비판과, 罷格 논쟁에서 파격을 주장한 이들의 논리가 관철되는 과정을 통해, 주자와 퇴계가 천명했던 ‘道學을 講明하는 곳’으로서의 서원 강학 이념이 17세기에 이르러 소수서원에 확립되어가는 과정을 밝히고자 하였다.
18세기에는 서원의 폭증으로, ‘서원은 본래 선비들의 강학을 위해 설립한 것인데 강학의 實은 없고 제향만 일삼으며, 토지와 양정을 모점하여 사회적 폐단을 초래한다’ 는 비판이 심화되자, 조정에서는 疊設 금지․사액 불허․훼철 등 서원에 대한 각종 통제 정책을 시행하고, 지방관들은 향촌의 교육 기능을 되살리기 위한 방안 마련에 고심하였으며, 각 서원은 형편이 허락하는 대로 강학을 개설함으로써 서원의 교육 기능을 지속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소수서원은 물론 최초의 사액서원으 로서 조정의 직접적인 통제 대상에서는 벗어나 있었으나, 서원 건립의 증가는 18세기 소수서원의 경제 기반 약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경제적 기반의 약화는 곧 강학 운영 방식에도 직접적인 변화를 초래하여, 18세기에는 ‘三冬居齋’나 ‘輪番居齋’ 등이전에 없던 강학 운영상의 변통책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서원의 폭증 외에, 18세기 소수서원 강학에 영향을 끼친 중요한 사건은 바로 17세 기부터 시작된 ‘罷格 논쟁’이었다. 1719년 이 논쟁이 罷格으로 확정됨과 동시에 17세기까지 ‘科業’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소수서원 강학은 ‘道學’ 위주로 그 성격이 확연히 변화되었다. 이는 17세기까지의 강학이 科業을 목표로 한 ‘居接’의 형태로 이루어진 것과 달리, 道學을 목표로 한 ‘居齋’라는 18세기 강학 형태의 변화로 나타났다. 居齋 에서는 ‘道學의 탐구와 실천’을 목적으로 표방하며, ‘개별독서․敬讀․通讀’의 교육과정을 통해 이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또한 18세기 초부터 거재의 목적으로 표방하기 시작했던 ‘道學’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心學의 이론과 실천’에 대한 탐구로 한 단계 구체화되고 있었다. 즉, 17세기는 주자와 퇴계가 천명했던 ‘道學을 講明하는 곳’으로서의 서원 강학 이념이 공유, 확산되기는 하였으나 그것이 강학의 실제에까지는 반영되지 못한 과도기였다면, 18세기는 구체적인 강학의 형태와 방식까지 변화된, 서원 강학 이념의 정착기라고 할 수 있다. Ⅳ장에서는 17세기 과도기를 거쳐 18세기에 ‘道學을 講明하는 곳’으로서의 서원 강학 이념이 정착되고, 나아가 心學의 탐구와 실천으로 道 學이 구체화되는 과정을, 居齋의 교육과정과 운영 실제, 敬讀 및 通讀 교재에 대한 분석 등을 통해 밝히고자 하였다. 또한 18세기 후반 거재의 心學的 특징과 아울러 科業 을 내용으로 하는 백일장과 순제가 활성화된 배경은 무엇이었는지도 검토하였다.
18세기에는 寶穀의 재정도 고갈되고 지방관의 전폭적인 지원도 사라지자, 四時居接 을 三冬居齋로 바꾸고, 輪番居齋 방식을 활용함으로써 거재 인원과 기간을 단축하며, 원임의 관심과 역량에 따라 불안정하게나마 강학을 운영해오던 소수서원은, 18세기 중반에 이르러 養士廳을 설치, 운영함으로써 강학의 재정 기반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양사청 역시 중단과 복설을 거듭한 끝에 18세기 후반 폐지되기에 이르자, 19세기에는 ‘三冬居齋’ 조차 개설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수서원의 재정난은 심화되었다. 이에 서원에서는 원장의 거주지를 道內로 확대함으로써 전현직 관리를 원장에 임명하고, 동시에 순흥부사에게 소수서원 원장을 겸임시키는 원장부사 제도를 활용함으로써 지방관의 지원에 힘입어 강학을 지속하고자 하였다.
19세기 강학의 또 다른 변화는 해마다 계절에 따른 科業과 道學의 병행이 관례로 정착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19세기 서원의 유생들이 ‘대다수 과거에 응시할 유생들’이라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 즉, 19세기에는 과거에 응시할 대다수 서원 유생들의 사정을 고려하여, 해마다 계절별로 科業과 道學을 위한 교육과정을 동시에 개설함으로써, 유생들의 과거 응시에 보다 현실적이고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었다.
한편, 19세기 소수서원의 가장 큰 변화는, 18세기까지 뚜렷한 학맥이나 학파적 성향을 띄지 않았던 소수서원에 학파적 특징이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19세기에는 大山 李象靖과 定齋 柳致明의 문인들, 이른바 湖學의 핵심 인물들이 洞主를 맡아 서원 강학을 주도하고 있었다. 강학의 내용에 있어서도 心學의 실제적 지침서인 『朱子書節要』, 聖學과 心學의 요체를 다룬 퇴계의 『聖學十圖』, 실천적 공부론을 강조한 것으로 이상정과 유치명이 매우 중시했던 주자의 「玉山講義」와 『延平 答問』, 未發과 已發, 動靜을 관통하는 通體 공부로서 이상정이 강조했던 戒愼恐懼의 의미를 다룬 『中庸』 등을 강론하며, 19세기 소수서원은 강학을 통해 心學과 일상의 실천을 강조한 湖學의 학문적 특징을 계승하고 있었다. 소수서원에 학맥이나 학파적 성향이 19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16, 17세기부터 특정 스승이나 학파의 학설을 계승, 전파하기 위해 서원을 설립하고 특정 학맥을 중심으로 강학을 전개해가던 여타 서원의 모습과는 차별화되는 소수서원 강학의 변화상과 특징을 잘 드러내는 지점이다.
Ⅴ장에서는 19세기의 재정난에도 불구하고 전현직 관리를 원장에 임명하거나 兼院 長 제도를 활용함으로써 강학을 지속하고자 했던 소수서원의 모습을 살펴보고, 교육 과정의 변화와 1827년 중용 강회의 강론 내용을 통해 19세기 강학에서 湖學의 학풍이 계승되는 과정을 분석하였다. 또한 1828년 文會 후 李泰淳, 李秉運, 李家淳, 姜橒, 柳鼎文 등 湖學의 핵심 인물을 중심으로, 9일에 걸쳐 이루어진 소백산 유람의 과정과 의미를 검토하였다. 이때의 소백산 유람은 遊息의 과정이자 동시에 서원 강학의 목표였던 ‘道를 발견하고 체인’하기 위한 교육과정의 일환이었다. 동시에 유람의 마지막 4일간 희방사에서 이병운, 이가순, 강운, 유정문 등을 중심으로, 대산의 문인이었던 黃 龍漢의 문집을 강독, 교감하고 있는 것을 통해 19세기 소수서원이 대산 학맥의 계승에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Ⅴ장의 마지막 절에서는 주로 안동과 예안 출신으로 高山書堂과 虎溪書院을 무대로 활동하던 湖學의 핵심 인물들이 19세기 소수서원에 등장하게 된 배경과 계기는 무엇이었는지도 함께 검토하였다.
Ⅵ장에서는 마지막으로 조선시대 소수서원 강학의 교육학적 의미를 검토하였다. ‘서원은 과연 어떤 공부를 하는 곳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정체성이 미처 확립되지 못했던 당시, 조선 최초의 서원으로서 소수서원이 겪어야 했던 강학의 변화 과정은 곧 조선 서원의 정체성이 확립되어 가는 과정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또한 18세기 이래 道學과 心學을 표방했던 소수서원의 교육과정은 敬의 공부론을 통한 몸과 마음의 엄격한 검속뿐 아니라, ‘藏修와 遊息, 詩書禮樂’을 동시에 아우르는 교육과정이었다. 또한 이와 같은 교육과정은 결국 ‘몸과 마음’, ‘세계와 내’가 올바른 관계를 맺음으로써, 지식과 덕성이 괴리되지 않고, 매일의 삶 속에서 매순간 존재가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데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있었다. 즉, 소수서원 강학이 추구했던 ‘지식과 덕성의 결합을 위한 공부론’은 결국 ‘관계’를 통해 실현되는 것이었다. 모든 교육은 ‘지식과 덕성의 결합’ 혹은 ‘지식과 인성의 통합’을 전제로 한다. 현재 한국 공교육의 근본적인 문제는, 입시교육에 치우친 나머지 지식교육만 하고 인성교육을 등한시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과 인성이 서로 관련을 맺지 못한다는 것, 즉, 지식이 학습자와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런 점에서, ‘관계를 통해 지식과 덕성의 결합’ 을 꾀했던 조선시대 소수서원의 강학 전통은 현대 공교육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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