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시조묘 제사의 정치성 연구 = The Politics of the Memorial Service to Founder's Shrine in Goguryo
본 논문은 고구려 시조묘 제사가 갖는 정치적인 성격에 대한 검토이다. 고구려의 시조묘 제사는 국내성을 도읍으로 하던 시기 제8대 신대왕을 시작으로 제9대 고국천왕, 제11대 동천왕, 제12대 중천왕, 제16대 고국원왕대에 행해졌다. 이후 한동안 그에 대한 기록을 발견할 수 없다가 평양을 도읍으로 하던 시기 제22대 안장왕대에 재등장하여 제25대 평원왕, 제27대 영류왕이 시조묘 제사를 행하였다. 이렇듯 고구려 시조묘 제사는 전 시기에 걸쳐 총 8명의 왕대에만 시행된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고구려 시조묘 제사가 시행된 시기는 전왕의 시해라든지 급변하는 요동 지역의 정세 그리고 정치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것과 일정하게 연관된 경향을 보인다는 점에서 기록의 누락이라는 관점으로 설명하기는 곤란하다고 본다.
대무신왕 3년(20) 졸본에 始祖廟인 東明王廟를 세웠다. 졸본은 주몽이 부여에서 남하하여 와서 고구려를 건국한 곳이며, 또한 주몽의 葬地인 龍山이 위치한 지역이다. 졸본은 비류수를 통해 송양왕의 비류부와 서로 왕래가 가능한 지역이다. 비류부는 주몽의 계루부가 고구려를 건국하기 이전에는 왕위를 배출하던 집단으로 『삼국지』가 저술되던 3세기에도 여전히 자신들의 독자적인 종묘에서 시조제의를 지낼 정도로 강한 정치력을 보유하였다. 그런 점에서 졸본 지역은 부여에서 남하한 계루부 왕실세력과 前왕실집단인 비류부 등의 토착세력들이 공존하던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고구려가 국내성에 도읍하면서 왕조 국가로서 발전을 모색하던 시기 시조묘 제사는 신대왕 2년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신대왕은 前王인 차대왕이 시해되자 여러 공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 차대왕을 시해한 연나부의 皁衣 명림답부는 이전의 左輔와 右輔를 합쳐 신대왕대 새롭게 만든 國相에 임명되었고 이후 연나부가 국정의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고구려 초기 官階에서 조의는 결코 상위의 官等으로 볼 수 없는데 전왕을 시해한 명림답부가 징치되지 않고 국상에 임명되었던 점에서 연나부가 중요한 나부세력으로 부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연나부는 대무신왕대 부여왕의 從弟와 그 이주민들을 안치시켰던 곳으로 부여계통의 인물들이 일찍부터 정착했던 곳이다. 연나부는 고국천왕대부터 서천왕대까지는 독점적으로 왕비를 배출하였으며, 신대왕대의 명림답부를 비롯하여 동천왕대와 중천왕대에는 명림어수를 국상으로 배출하는 위세있는 나부가 되었다. 연나부가 왕비를 독점적으로 배출하던 시기 산상왕과 중천왕은 小后세력으로서 관나부와의 혼인을 추진하였지만 왕권의 견고한 지지세력으로서는 미흡했던 듯하다. 심지어 고국천왕대는 왕비세력인 연나부가 모반하였지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현량한 인재의 천거만을 명하였다. 연나부는 나부민에 대한 인적, 물적 수탈을 지속함으로써 현실적인 힘을 축적하였고 따라서 고국천왕은 진대법을 실시하여 나부민에 대한 지배력을 왕권에 귀속시킴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렇듯 신대왕대에서 중천왕대에 이르는 시기 연나부가 강한 나부세력으로 비대해지자 왕권을 강화해주고 연나부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또 다른 나부세력과의 제휴를 모색하였다.
연나부가 강력한 나부세력으로서 왕권에 대항하던 시기 졸본의 시조묘 제사가 추진되었던 것에서 시조묘 제사는 연나부의 견제를 위한 의도가 내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파악하였다. 게다가 졸본 지역은 중국 대륙으로부터의 위협을 방어하고 요동으로 진출할 수 있는 관문격에 해당하는 곳으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이다. 그로인해 중국 대륙으로부터의 위협이 강하게 대두되던 시기에는 졸본 지역과의 유대를 더욱 돈독히 하는 일면을 보인다.
동천왕은 즉위하여 졸본의 시조묘에 가서 제사하고 산상왕대 왕위계승전에서 발기를 지지하여 계루부 왕권에서 이탈한 소노부세력을 慰撫하고 연루된 세력들을 사면함으로써 졸본 지역과의 유대를 추진하였다. 이후 동천왕대 고구려는 위와 협력하여 요동의 공손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서안평을 공략하여 차지함으로써 영역을 확장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위나라 장수 관구검의 침입으로 동천왕이 남옥저까지 달아나는 국가적인 위기를 맞이하였고 요동 진출은 좌절되었다. 중천왕대는 연나부의 국상 명림어수가 죽자 비류부의 패자 음우를 국상으로 삼았는데 위의 침공을 물리치고 다음해 졸본의 시조묘에 제사하였다. 특히 중천왕대의 시조묘 제사는 왕 13년에 행해졌다는 점에서 즉위의례의 측면으로 해석할 수 없다.
고국원왕은 북방 전연의 위협적인 성장에 대비하고자 요동 지역의 방어를 강화하는 일면을 보인다. 왕 4년의 평양성 증축, 5년 북방의 신성 축조, 12년 2월 환도성과 국내성을 축조하고 8월에는 환도성으로 거처를 옮기는 일련의 과정에서 왕 2년에 졸본에 행차하여 시조묘에 제사하고 구휼하였던 행위는 북방의 전쟁 위험에 대비한 정책으로 보았다. 고국원왕 12년 전연의 침공으로 왕모 周氏와 왕비 그리고 5만여 명이 전연으로 끌려갔던 사실은 고국원왕대 전연의 위협적인 성장과 향후 고구려의 대응 방향을 지시한다. 전연에 패한 이후 고구려는 남방 영역에 더 관심을 집중하게 되었고 백제와의 교전이 빈번해졌던 것은 그와 무관하지 않다. 백제와의 교전은 평양과 황해도 지역의 전략적인 비중을 증대시켰고 4세기 경에 축조된 성곽시설을 통해 당대 고구려 왕권에 협력했던 세력들의 존재를 추정하였다.
소수림왕대에서 문자왕대에 이르는 시기 고구려는 국가제도를 정비하고 불교 사상을 보급하였으며 국가적인 통합과 영역적인 확장을 추진하였다. 소수림왕은 즉위하여 율령을 반포하고 태학을 설립하였으며 불교를 공인하는 등 국가적인 체제정비에 주력하였다. 고국양왕은 교를 내려 불교를 통해 現世에서 복을 구할 것을 명하였다. 광개토왕은 안정된 국가체제를 바탕으로 대외적인 팽창을 추진하였다. 또한 평양에 9寺를 설립하는 등 불교를 중시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덕흥리고분의 벽화에는 墓主 진이 당시 국왕의 近侍組織인 中裏都督으로 재직하면서 평양 지역에 堂塔을 조성하기 전에 地鎭祭를 주관하였던 도상이 보인다. 이를 통해 국가적인 제례가 불교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고려된다. 이 시기는 평양과 황해도 지역이 중시되었고 재지세력과 중국계 망명인세력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그러한 시기 장수왕은 수도를 평양으로 이전하였다. 그런데 고구려가 국가제도를 정비하고 불교 이념을 바탕으로 고구려민의 결속을 강화하면서 대내외적인 발전을 이루던 시기에는 비록 고구려의 신성한 시조 주몽에 대한 인식이 정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졸본의 시조묘에 제사했던 기록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런데 돌연 안장왕 3년 졸본의 시조묘 제사가 재등장한다. 안장왕은 즉위하여 곧장 남조 양과의 對中交涉[對中外交]을 추진하였다. 고구려의 대중교섭은 장수왕 후기부터 문자왕대까지 주로 북조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안장왕은 이전 왕들과는 달리 남조 양에 더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하였으며 졸본에 행차하여 시조묘에 제사하는 변화된 정책을 추진하였다. 안장왕이 시조묘에 제사하고 지나는 州ㆍ邑의 가난한 이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고 위무하였던 행위는 졸본을 경유하는 지역의 정치세력의 동향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안장왕의 변화된 정책은 비대해진 평양계 정치세력과의 갈등을 유발하였고 그로인해 안장왕이 시해되었다고 보았다.
양원왕대의 정국 운영은 평원왕대를 살필 수 있는 단서이다. 안원왕 말기, 麤群과 細群이 왕위계승전을 벌여 추군이 승리하여 양원왕이 집권하였던 점에서 추군세력을 양원왕대 집권세력으로 보았다. 추군은 2천여 명에 달하는 세군을 살육하고 집권하였는데 그로인해 양원왕대 고구려의 國勢는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양원왕 7년(551) 한강 이북의 10성을 신라에게 빼앗겼고 양원왕 8년에는 북제의 사신 최유가 북위 말에 고구려에 온 流民의 송환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왕의 얼굴을 쳐서 왕이 용상에서 떨어지는 사건마저 발생할 정도였다. 왕위계승전에서 패한 세군세력은 양원왕 4년에는 嘉禾를 헌상하고 복속하였지만 왕 13년에는 환도성에서 간주리가 반란하였다. 양원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평원왕은 졸본의 시조묘 제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지나는 州ㆍ郡의 죄수를 사면하고 모두 용서해주었다. 평원왕은 양원왕대 환도성 반란에 연루된 세력을 사면함으로써 국가적 통합을 추진하였던 것으로 보았다. 게다가 평원왕의 사위 온달은 沸水人으로 졸본 지역의 비류수 지역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평원왕대 졸본의 시조묘 제사는 국내성계 정치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고 보았다.
영류왕은 평원왕의 아들로 異母兄弟인 영양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고국천왕 이후 형제간의 왕위계승의 경우에는 전왕에게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음을 밝히고 있는데, 영류왕의 즉위에는 그러한 기록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영류왕의 왕위계승이 비정상적일 가능성이 짙다. 그런 측면에서 영류왕의 즉위에는 그를 지지했던 친왕실세력의 지원이 있었을 것으로 보았으며, 연개소문 가문을 주목하였다. 연개소문 가문은 3대째 막리지[대대로]를 역임하였는데, 만약 영류왕의 즉위가 비정상적이었다면 연개소문 가문과 대립적인 상황에서 왕위를 계승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연개소문의 장자인 남생은 형제들과 불화가 생기자 국내성으로 피신하였고 이후 부근의 13개 지역의 유력자들과 당에 투항하였다. 만약 연개소문 가문이 평양의 신진세력이라면, 아무런 연고가 없는 국내성 부근 지역의 세력들이 천남생에게 호응하였다는 것은 쉽사리 납득하기 어렵다. 따라서 남생의 국내성 피신은 연개소문 가문이 졸본을 위시한 국내성 부근에 기반한 세력이었기에 선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한 맥락에서 영류왕대 행해진 시조묘 제사는 연개소문 가문과 연계한 국내성 세력과의 유대를 위한 정치적 행위였을 것으로 보았다.
결국 고구려의 시조묘 제사는 국내성에 도읍을 두었던 시기에는 연나부세력의 비대화를 견제하고 왕권을 지지해줄 협력세력과의 유대를 도모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이 강하였다. 또한 고구려가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고 중국 대륙의 위협을 방어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졸본 지역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위무하기 위한 정책적인 측면이 강하였다고 보았다. 그리고 평양에 도읍하던 시기의 시조묘 제사는 비대해진 평양계 정치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지지해줄 협력세력으로서 국내성계 정치세력과의 유대를 도모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이 강하였다. 그런 점에서 고구려 전시기 8명의 왕대에 행해졌던 시조묘 제사는 왕권강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비대해진 집권세력들을 견제하고 왕권을 지지해줄 다른 정치세력과의 제휴를 위해 선택되었던 측면에서 당대 왕권과 정치세력들의 동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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