唐京 高句麗 遺民 硏究
한국 고대사에서 가장 큰 규모의 ‘遺民’을 발생하게 한 동인은 삼국통일전쟁이었다. 삼국통일전쟁의 결과 고구려 유민과 백제 유민이 발생하였고, 그 국제전적 성격은 유민들을 여러 지역과 다양한 형태로 이주시켰다. 고구려의 멸망으로 ‘고구려사’는 끝을 맺었지만 동시에 ‘고구려 유민사’는 시작되었다. 이글의 분석 대상인 유민은 고구려 멸망 과정에서 살아남은 백성 중 ‘唐京’인 장안과 낙양에 편적되어 당조에 출사한 유민 1세대와 이주 이후 당에서 태어난 후속 세대이다. 유민 1세대는 당조의 관인으로 출사하여 정치 중심지였던 당경에 사제를 마련하였고, 당대 관인들이 선호한 장지에 매장되었다. 그리고 ‘墓誌銘’을 남겼다. 이 묘지명이 고구려 유민사를 밝힐 수 있는 일급 사료인 것이다.
702년까지 만들어진 유민 1세대의 묘지명에서는 선조와 자신의 고구려에서의 관력을 빠짐없이 기재하여 고구려의 명문임을 과시하였다. 당은 유민들의 고구려에서의 지위와 고구려 멸망 과정에서의 功, 즉 협력 정도를 고려하여 ‘官階’를 결정하였다. 유민 1세대의 고구려에서의 귀속 지위가 당에서도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이들이 고구려의 지배층이었기 때문이었다. 명문 출신이 아닌 유민들은 고구려에서의 이력과 선조에 관한 내용은 감추는 대신 고구려를 배신하고 당에 협력하였음을 강조하였다. 유민 1세대에게 고구려 출신이라는 것은 당에 정착하고, 당의 주류 사회에 편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주는 수단이었다.
고구려 출자를 표방했던 유민 1세대와는 달리 후속 세대의 묘지명에서는 중국의 望姓을 모칭하고, 播遷을 통해 출자를 개변하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단순히 정체성의 상실과 동화의 결과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러한 출자 표기의 전환이 이루어진 배경은 유민 1세대와 그 후손들이 살아간 당대의 사회 변화와 당조가 추구한 정책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당은 원칙적으로 이주 1세대에 한하여 10년간 세금을 면제했다. ‘給復十年’ 규정은 고구려 유민들이 당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하는데 중요한 요소였다. 유민 1세대는 10년간의 세금 면제를 위해서라도 고구려 출신임을 드러내고 활용해야 했다.
또한 ‘氏族志’의 편찬을 통해 각 지역의 유력 사족들은 ‘官品’이라는 국가의 권위 아래 편제될 수밖에 없었다. 사족의 관료화와 중앙화가 동반되면서 사족은 지역적 기반을 탈피하면서 望姓을 모칭할 때 제재할 門中이라는 구심점이 사라졌다. 이러한 환경에서 망성의 가탁은 이민족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난 것은 물론 漢人의 묘지명에서도 확인된다. 장안과 낙양에 거주하며 출사했던 고구려 유민의 후속 세대들은 조정의 사족에 대한 정책 변화를 체감하고, 郡望表 등 양질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얻을 수 있는 유리한 환경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정보들을 근거로 발해 고씨, 태원 왕씨 등의 망성을 모칭한 것이다. 망성의 모칭은 당대 사회에서 완전한 당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수법이었다.
당조에서 이민족들의 일반적인 출사 방식은 ‘蕃將’이었는데 고구려 유민 1세대의 묘지명에서도 번장 출사의 경력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들은 번장으로 출사한 후 군공을 쌓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5품이 되면 아들과 손자까지 문음의 대상이 되었고, 3품 이상이 되면 아들, 손자, 증손까지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이러한 당대의 율령관제의 구조 속에서 유민 1세대들은 관직과 면세, 면역이라는 사회경제적 특권을 代를 이어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군공을 세웠다.
그러나 모든 고구려 유민 1세대가 번장으로 출사한 것은 아니었다. 泉男産의 묘지명에 기재된 藁街, 棘署, 北闕은 남산이 당조에서 역임했던 관직들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데 홍려객관과 홍려시에서 사신 영접과 통역의 임무를 맡았고 태상시에서도 업무를 맡았으며 황제의 近侍로서 기록을 담당한 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후속 세대로 갈수록 출사 방식과 관직의 유형은 다양화 되었을 것이다. 이는 漢化의 진전과 상당 부분 연관되는 문제로 번장 이외의 출사를 모색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泉毖의 사례가 주목된다. 천비는 태묘재랑으로 관직에 진출하였는데 이는 5품 이상의 자손 및 6품의 직사관과 청관의 자를 대상으로 한 문음으로, 문관 진출의 경로였다.
고구려 유민은 당조가 정한 지역의 貫籍을 부여받고 법적으로 당인이 되었다. 장안성에 편적된 고구려 유민의 私第는 街東의 북부와 중부에 집중되었다. 장안성은 ‘가서보다는 가동, 가동 중에서도 중부보다는 대명궁 앞의 동북부’라는 공간적 차별성이 명확한 곳이었고, 가동의 북부는 재력과 권력의 상징으로, 모든 관인들이 가장 선호한 거주지였다. 사례가 풍부한 것은 아니지만 고구려 유민과 그 후손들의 장안성에서의 거주 양상은 당인 고관들과 마찬가지였고, 모든 관인들이 희망했던 장안성의 최상의 공간에서 관인 생활을 이어갔다.
무측천이 집권하면서 낙양의 정치적 위상은 京師를 능가하게 되었다. 무주기 정치 중심지가 낙양으로 이동하자 고구려 유민들도 관인으로서 神都에서의 정치에 참여하면서 장안에 편적된 지 20여년 만에 낙양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낙양성은 장안성과 달리 서민가와 관료가의 거주 구분이 뚜렷하지 않았는데 고구려 유민의 사제 역시 장안성의 ‘가동’처럼 특정 지역에 편중되지 않고 다양하게 분포하였다.
그동안 고구려 유민의 장지에 대해서는 거의 논의된 바가 없었다. 당대에는 성안의 관인 거주지와 성 밖의 墓地가 같은 생활권 속에 들어가 성 안팎이 연결되어 하나의 도시권을 형성하였다. 대체로 장지는 성안에서 당일에 다녀올 수 있는 범위로, 사제와 가까운 교외에 조성되었다. 가동에 거주한 고구려 유민들은 5품 이상, 그 중 다수는 3품의 관료로서 이들의 묘장은 대체로 東郊에 마련되었다. 가동 북부에 거주한 고관과 환관의 묘장이 주로 동교에 조성되었던 양상과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생전과 사후의 편적지가 모두 만년현으로 생전의 공간적 차별성은 사후에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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