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시기 염상섭 문학의 자유주의 연구
염상섭 문학의 정치의식은 그간 중산층 보수주의나 기회주의, 가치중립성과 절충주의자 등의 키워드를 통해 설명되었다. 특히 중산층 보수주의의 시각은 염상섭 문학을 정치적 신념이 부재하는 문학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이후 염상섭이 좌우의 비현실적 편향을 넘어 일관되게 민족통합노선을 견지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염상섭의 중도적 정치의식에 주목하는 시각이 생산되기는 했으나, 기존 시각의 한계를 온전히 넘어서려면 염상섭이 어떠한 정치적 신념에 의거해 사회주의와 거리를 두면서 중도적 민족노선을 취했는지 명확히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본고는 염상섭의 중도적 정치의식이 형성되는 데 작동한 정치적 신념을 자유주의로 보고 염상섭 문학의 정치의식을 재인식했으며, 이를 통해 식민지시기 염상섭 문학의 변화과정을 새롭게 조망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자유주의는 종교개혁과 더불어 시작된 근대의 사상이며 유럽의 절대군주제 및 귀족 중심의 신분제에 저항하던 시민들의 사고방식이다. 서양의 근대적 사회질서인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법치주의의 이념적 토대가 바로 자유주의이다. 자유주의의 철학적 근간은 개인주의인데, 염상섭은 십대 시절부터 개인의 자유를 중요하게 여기며 성장했고, 문필 활동 초기에 지고의 선으로서의 개인주의를 주창한 산문 「지상선을 위하여」(1922)를 제출하기도 했다. 염상섭의 자유주의는 그가 개인주의를 정립하고 고수하는 과정에서 발현되었다. 식민지시기의 자유주의는 세 가지 과제를 안고 있었다. 봉건적 관념과 인습을 타파하고 근대적 시민의식을 형성하는 것, 일제의 식민체제를 전복하고 근대적 사회질서를 수립하는 것, 마지막으로 사회주의의 비판에 맞서되 식민지 조선의 정치적 현실을 고려하여 사회주의와 적절한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바로 그것들이다. 본고는 염상섭이 이러한 과제들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살폈다.
Ⅱ장, ‘개인주의의 정립 혹은 자유주의의 탄생 (1918~1924)’에서는 염상섭의 자유주의가 “자기혁명”을 추구하는 것으로서의 개인주의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고 보았다. 염상섭은 문필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자유와 평등의 가치에 입각해 전제주의에 대항하는 자유주의의 논리를 차용했지만, 그가 자신의 신념으로서의 개인주의를 정립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주의적 정치의식을 노정한 기점은 「지상선을 위하여」를 발표한 1922년이다. 염상섭의 개인주의는 “자기혁명”을 추구하는 것이었는데, 이때 그에게 있어서 “자기혁명”이란 과거의 인습으로부터 벗어나 끊임없이 자아를 재구성하여 필연적으로 민족과 인류에 봉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염상섭은 비록 “자기혁명”의 봉공성을 논리적으로 입증하는 데는 실패했으나, “자기혁명”의 봉공성을 앞세워 개인주의는 이기주의라는 비판에 대응할 수 있었다. 그의 초기소설에서는 “자기혁명”을 추구하기 시작한 근대적 개인들을 볼 수 있다. 「암야」(1922)에서는 “자기혁명”을 시작한 X의 고뇌를 형상화했으나 거기로부터 정치적 사유가 전개되지 못했고, 「표본실의 청개구리」(1921)에서는 개인주의가 민족자결주의나 톨스토이즘 등과 혼재되어 등장했으나 김창억과 X의 분리로 인해 “자기혁명”과 정치담론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키지 못했다면, 『만세전』(1922, 1924)에 이르러 염상섭은 조선사회를 가부장제와 일본 제국주의로 인해 개인성이 말살되는 공간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형성함으로써 자신의 작품에서 자유주의적 정치의식을 발현시키는 데 성공했다.
당대의 개인주의는 종종 이기주의로 오해되곤 했는데, 염상섭은 “자기혁명”의 봉공성을 강조함으로써 이에 대응했다. 「E선생」(1922)에서는 E선생이 자율의 정신으로 학생들을 계몽하는 데 실패하는 서사를 통해 봉공성과 단절된 자율성의 문제점을 부각시켰는데, 특히 봉공성의 함양을 강조하는 E선생의 주장은 조선인의 민족성을 개조하고자 했던 이광수의 「민족개조론」(1922)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조선의 개조론이 인성 개조론과 사회구조적 개조론으로 양분되어가는 상황에서, 염상섭은 사회주의 계열 잡지인 『신생활』의 필진으로 활동하며 그들과 어느 정도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기주의를 지양하고 개인주의를 정립해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이광수의 견해에 우회적으로 동조한 것이다. 「제야」(1922)와 『해바라기』(1923), 그리고 『너희들은 무엇을 얻었느냐』(1923~1924)에서는 금전욕과 성욕에 의해 자유연애나 자유결혼, 그리고 개인주의의 가치를 왜곡하는 신여성들의 윤리의식을 비판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여성해방의 문제를 사유할 때도 봉공성과 결부된 “자기혁명”을 추구하는 개인주의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고수했다.
Ⅲ장, ‘민족협동전선의 모색과 사회주의로의 ‘잠행’(1925~1931)’에서는 카프가 결성된 후 문단에서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분열이 심화되던 1925년부터 염상섭이 이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살폈다. 흔히 염상섭과 사회주의의 관계를 고려할 때 사용되는 개념은 사회주의 심퍼사이저이다. 그것은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에 비해 부족하고 수동적인 것으로 여겨질 때가 많으나 본고에서는 사회주의 심퍼사이저를 염상섭의 전략적 선택으로 이해했다. 그는 사회주의에 “잠행”하며 그들을 통해 자신의 정치의식을 드러내려 했다. 염상섭은 「신경향파의 문학과 그 문단적 지위」(1926)에서 계급운동과 프로문학의 기조를 개인주의로 변경시킬 것을 제안했다. 「윤전기」(1925)에서는 프로문학의 주된 소재 중 하나인 공장 노동자의 쟁의를 다루되 그 목적을 부르주아에 대한 저항으로 의미화하지 않음으로써 계급운동의 현재 수준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생산했다. 「밥」(1927)에서는 어린 화자의 시선을 통해 관념적 사회주의자의 허영을 풍자적으로 형상화했다. 「남충서」(1927)에서는 부모로부터 민족적, 계급적 정체성을 전수받지 않은 혼혈인 남충서를 형상화함으로써 온전히 자신의 선택으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개인의 시각을 창조했다. 남충서는 민족관념을 부정하는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민족관념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당대 국민문학론과 시조부흥운동에 대한 프로문학론자들의 비판에 대응하는 것이라고 본고는 이해했다. 「미해결」(1926)과 『이심』(1928~1929)는 사회주의의 기조가 개인주의여야 하며 먼저 구식 관념을 타파하는 데 주력하자는 염상섭의 정치의식이 사회주의자 형상 및 서사구조에 반영된 작품들이다. 특히 『이심』은 애욕의 문제를 다룬 통속소설로만 이해되어 왔으나 본고에서는 염상섭이 불행의 서사를 구조화하는 데 있어서 가족주의의 폐해와 개인주의의 미흡함을 근본 원인으로 삼았다는 사실에 주목함으로써, 기존에 『이심』에 내재된 작가의 정치의식이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던 허점을 보완했다.
염상섭은 좌우합작의 분위기가 고조될 때 이에 발맞춰 민족협동전선의 논리를 마련하고자 했다. 「민족 사회운동의 유심적 고찰―반동, 전통, 문학의 관계」(1927)에서 그는 유심론을 주창하며 민족협동전선의 철학적 근거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의 유심론은 구속과 억압이 없는 자연 상태를 근거로 계급운동과 민족운동의 동일성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는 자연 상태의 개념에 억압으로부터의 해방뿐만 아니라 향토성도 부여했다. 이는 자연 상태의 개념적 외연을 지나치게 확장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었지만, 이를 통해 민족협동전선을 형성하고자 했던 그의 간절한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부르주아와 일제를 포괄하는 식민체제 기득권층에 저항하는 약자들의 서사로 구성된 『진주는 주었으나』(1925~1926)는 염상섭의 유심론을 미적으로 선취한 작품으로 보았다. 『사랑과 죄』(1927~1928) 역시 민족협동전선의 논리를 구축하기 위한 작가의 시도로 이해했다. 염상섭은 『사랑과 죄』에서 회의주의자가 진정한 개인주의와 인류애를 발견하고 귀족이 자유사상의 영향으로 자신의 계급을 뛰어넘으며 사회주의자가 중도적 민족노선을 채택하여 모두가 연대하는 상승과 통합의 서사를 형성했다.
신간회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일제의 파시즘화가 진행되면서 조선의 정치적 상황은 점차 암울해졌다. 이때 염상섭은 민족협동전선의 논리를 마련하기보다는 사회주의로 “잠행”하여 민족해방을 이뤄내는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맥락에서 등장한 작품이 바로 『삼대』(1931)이다. 『삼대』에서 덕기와 병화의 대립은 본문에서 그다지 중요하게 부각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기존 연구에서는 염상섭이 둘 중 누구의 편에 섰는지에 대해 결정하고자 했는데 이는 논자들이 사회주의 대 민족주의의 구도를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염상섭이 추구한 “잠행”의 길에 내재된 이중성과 통합성을 파악하지 못했던 결과로 보인다. 『삼대』에서 염상섭은 덕기와 병화 이전 세대에서 진행되었던 정치적 운동들의 한계를 부각시키고 사회주의 지하운동의 주체를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이를 통해 사회주의 지하운동에 “잠행”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길을 염상섭이 적극적으로 검토했음을 알 수 있었다.
Ⅳ장, ‘사회주의와의 단절과 근대적 모랄의 탐색(1932~1936)’에서는 염상섭이 사회주의로 “잠행”하여 민족해방을 이뤄내겠다는 시도를 포기하고 자본주의 시대의 도덕을 탐색하는 쪽으로 선회한 시기를 다뤘다. 『삼대』를 창작할 때 염상섭은 사회주의 지하운동에 기대를 걸었으나 점차 그러한 기대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논자들은 염상섭 소설의 통속화가 진행된 이유에 대해 일제의 군국주의가 심화되면서 사회주의 심퍼사이저로 활동하는 것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는데, 물론 이러한 서술은 사실이지만 충분하지 않다. 본고는 『삼대』로부터 시작된 “잠행”의 길 3부작의 최종작이 되었어야 할 『백구』(1932~1933)에서 오히려 사회주자들이 부정적으로 형상화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함으로써 염상섭 소설의 통속화가 진행된 이유를 추가적으로 고찰했다. 염상섭은 『백구』를 일제가 아니라 자신들의 대의를 앞세우는 국제사회주의 운동가들에 의해 평범한 개인이 타자화되는 서사로 구성했다. 식민지시기의 자유주의자는 사회주의자들에게서 개인을 타자화시키는 전체주의의 맹아가 보일 때 민족해방을 위해 그들과 연대할지 아니면 개인주의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그들과 결별할지 선택해야 했는데 염상섭의 선택은 후자였으며, 이로 인해 그의 소설에서 항일운동의 의지는 점차 약화되고 말았다.
사회주의와의 단절이 점차 기정사실화되는 상황에서 염상섭은 다시금 반문명론을 제기했는데 이때의 반문명론은 민족협동전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 시대의 도덕을 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염상섭은 「현대인과 문학―「소설의 본질」」(1931)에서 문학은 민중교화의 도구로 유효하며 항심이 있어야 항산이 있다는 견해를 제출했는데 이때의 항심이란 금전욕과 성욕에 얽매이지 않고 절제와 정직의 품성을 견지하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었다. 『무화과』(1931~1932)는 자본주의 시대의 도덕을 고민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보았다. 지주자본가가 자신의 가문에 한정시켰던 자본 운영의 목적을 민족을 위한 것으로까지 확장시키려 했던 이원영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는 서사나, 이문경이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끝내고 사회주의자에게 호감을 느끼는 과정은 모두 자본주의 시대의 도덕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제의식과 결부되어 있다. 『목단꽃 필 때』(1934)는 신여성 신성이 가족주의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주체성을 발휘하여 “자기혁명”을 추구하는 서사이다. 『목단꽃 필 때』의 낭만성과 도식성은 새로운 모랄을 마련하고자 하는 염상섭의 정치의식을 효과적으로 선전할 수 있게 만들었다. 『목단꽃 필 때』에서는 동양주의가 제기되는데 이것은 염상섭이 식민주의에 타협한 것이 아니라 동양주의를 문화적 민족주의로 재전유하려는 의도였다. 『불연속선』(1936)은 “항심”이 있는 인물과 “항심”이 없는 인물을 대조함으로써 “항심”의 필요성을 부각시킨 소설이다. “항심”이 없는 김참의가 사망하고 “항심”이 있는 송경희와 김진수가 결혼하여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는 결말을 통해 염상섭은 새로운 모랄을 실천하는 인물들의 미래를 가능태로 남겨두고 『불연속선』을 마쳤다. 그리고 『불연속선』은 염상섭이 만주로 떠나기 전 식민지시기에 발표한 마지막 장편소설이었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서 본고는 식민지시기 염상섭 문학의 자유주의가 전개되는 양상을 조망할 수 있는 기회도 마련했다. 초기에 염상섭의 자유주의는 개인주의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발현되었다. 이후 자유주의는 민족협동전선을 모색하거나 혹은 사회주의로 “잠행”하여 항일운동을 도모했으나, 점차 일제의 파시즘화가 심화되고 사회주의에서 전체주의의 맹아가 발견되자 이내 근대적 모랄을 탐색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조선의 정치적 공간은 갈수록 엄혹해지는데, 그렇다고 사회주의와 무턱대고 연대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염상섭은 자유의 행로로 자본주의 시대의 도덕을 마련하여 근대적 시민의식을 형성하는 길을 택했다. 항일운동을 펼치지 않는 한, 개인의 정신적 성숙 이외에 다른 자유의 길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 30년대 중반의 염상섭, 그리고 식민지시기 자유주의가 도달한 막다른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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