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관찬읍지 연구 = A Study of the Government-Eupji in the Era of the Late Joseon Dynasty
이 논문은 조선후기 중앙정부나 지방관아에서 편찬한 관찬읍지(官撰邑誌)의 실태를 분석한 것이다. 선행연구로 인해 조선후기 관찬읍지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그러나 선행연구에서는 읍지의 목차나 항목구성의 차이에 주목하여 유형화하려는 노력이 부족하였다. 더구나 분석의 대상으로는 지도를 빠뜨리고 인찰지나 행자수를 변형한 후사본(後寫本)을 소재로 삼았다. 그런데 최근에는 각 기관에서 다수의 읍지 원본을 인터넷 웹에 이미지를 탑재하거나, 원문 복사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에 선행연구를 검토하면서, 국내외 기관이나 개인 소장 읍지를 더 많이 확보하여 조선후기 관찬읍지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커졌다.
17세기 말부터 조선에서는 국가가 주도하여 전국 읍지 편찬을 추진하였다. 숙종 즉위 초기인 1679년(숙종 5)에는 대제학인 김석주가 주관하였으며, 문한기구인 홍문관이 『여지승람(輿地勝覽)』 증보개간을 담당하였다. 당시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이하 『여지승람』)을 바탕으로 행정과 재정 상황을 추가한 15개 전후의 항목을 신설하였다. 『여지승람』과 『세종실록지리지』를 통합한 형태라 할 수 있다. 숙종 중기인 1699년(숙종 25)에는 비변사가 주축이었으며, 좌의정 최석정이 주관하였다. 행정과 재정 상황만이 아니라, 인물 수록대상을 문과⋅음사⋅생진⋅무과까지 확대하여 각 고을의 지배세력까지 구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각 고을의 읍지를 대부분 수집하고 찬수청을 설치하여 사업이 절반 정도 진척되었지만, 최석정이 유배되면서 2년여 만에 중지하였다. 그러나 곧 최석정이 영의정으로 복귀하면서 1706년(숙종 32)부터 사업을 재개하였다. 1707년에는 고례(古例)를 존중하여 『여지승람』의 단순한 증보를 목표로 인물과 시문의 신증에 주력하였다. 그렇지만 ‘증보여지승람(增補輿地勝覽)’은 편찬인력과 재정 부담 등으로 인해 미완의 과제로 남게 되었다.
18세기 중엽 영조 후반기에는 전국읍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를 편찬하였다. 숙종대의 『여지승람』 증보개간 시도 이후 50여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1757년(영조 33)에는 읍지 수집에 주력하여 1758년 말 홍문관에는 팔도읍지 신건을 비치하였다. 당시 각 고을에서는 『여지승람』이나 숙종대에 편찬한 읍지나 사찬읍지, 혹은 이들 읍지의 수록항목을 참고하여 편찬한 읍지를 상송하였다.
1759년(영조 35) 말에는 홍문관에서 읍지의 표준양식을 각 고을에 하달하였다. 『여지도서』는 국가운영에 필요한 행정과 재정 관련 항목을 신설하고 시문 수록을 지양하여 실용적인 전국읍지였다. 『여지승람』의 제영 등을 생략하면서 사찬읍지 수록항목을 다수 반영하였으며, 유형원이 『동국여지지』에서 제시한 문제의식과 숙종대의 『여지승람』 증보개간 사업 당시 개발한 신설항목을 수용하였다. 그러나 경상도편은 제영을 비롯한 『여지승람』 수록항목을 그대로 두었다. 함경도편은 학교와 발참을 두었으며 공해와 누정 등에 제영을 다수 수록하였다.
1760년(영조 36) 강화부와 팔도 감영에서는 각 고을 읍지를 모아 그대로 상송하였다. 홍문관에서는 당시까지 수집한 읍지들을 『여지승람』의 도별 고을별 수록순서에 따라 진관별로 분류하여 일정한 분량으로 성책하였다. 성책 순서대로 분석해 보면, 경기와 충청도 일부 고을 읍지는 『여지도서』 성책 당시부터 누락되었으며, 경도⋅한성부⋅개성부 읍지는 누락 여부를 알기 어렵다.
『여지도서』는 인물과 시문이 적어 교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여지승람』보다 부족하였다. 방리⋅도로 및 재정 관련 항목은 부록처럼 편성되어 있어 이들 항목을 읍지 내부에 적절히 배치할 필요가 있었다. 1768년(영조 44)에는 『여지도서』를 보완한 새로운 수록규정을 하달하였다. 『여지승람』과 『여지도서』의 항목들을 모두 다 반영하였다. 『여지승람』의 항목명과 수록순서를 존중하였으며, 장시(어염 포함),⋅환적⋅과거⋅비판(비문+책판)을 신설하였다. 영조 집권 말기 지방행정과 재정은 물론, 상업⋅인물⋅시문⋅출판에 관심이 높아지던 시대상을 반영하였다. 군사(君師)이고자 했던 영조와 사족의 이상을 반영하였다. 향론을 바탕으로 읍지에 수록할 인물을 선정하고 선현의 비문까지 수록하기 위해서는 사족의 참여가 필수적이었다. 전국적으로 『여지도서』 보완유형이 약 40%에 이르는 고을에서 확인되는 것은 『여지도서』 편찬 이후 새로운 유형을 적용하여 편찬한 구지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773년(영조 49)에 편찬한 읍지를 보면, 대부분의 고을에서 『여지도서』 유형으로 회귀하였다. 국립고궁박물관의 『읍지』(이하 『각도읍지』)에는 1773년지가 54개인데, 44개(81%)가 『여지도서』 유형이다. 정해진 기간 내에 읍지를 상송해야 하는 지방관이나 향리들은 이전에 편찬한 『여지도서』 유형을 선호하였다. 수록할 내용이 적고 객관적이었으며, 인물이나 시문 선정에 따른 부담이 적었기 때문이다. 1775년(영조 51)에는 『여지도서』 수록항목에 책판⋅선생안을 신설하고 누정 뒤에 제영을 둔 『여지도서』 증보유형을 보급하였다. 책판의 유무만 밝히거나, 선생안만 추가해도 1760년 『여지도서』 성책 이후에 편찬한 읍지이기 때문에 『여지도서』 증보유형으로 분류할 필요가 있다.
정조 초반에 수집한 『각도읍지』 1780년지 61개 가운데 56개(92%)는 『여지도서』 유형이나 『여지도서』 증보유형이다. 정조는 당시 수집한 『여지도서』 계통의 읍지에 만족하지 못하였다. 1781년(정조 5) 정조는 『여지승람』의 고례를 존중하면서 『여지도서』 계통 수록항목을 추가하는 새로운 전국읍지를 모색하였다. 영조대부터 여러 차례 편찬한 ‘해동읍지’와 『여지승람』의 수록항목을 재구성한 『해동여지통재(海東輿地通載)』를 편찬하고자 한 것이다. 1787년(정조 11) 8월 정조는 이전에 수집한 읍지들을 바탕으로, ‘읍지 범례’를 도별로 2개 고을에 시범적으로 적용하였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경상도읍지’(1786)와 『영남읍지』(1789)를 비롯하여 정조 전반기에 편찬한 읍지들이 다수 현전하는 것은 정조가 전국읍지 편찬을 모색하면서 각 고을의 읍지를 여러 차례 수집한 결과이다.
정조 후반기 규장각에서는 그동안 수집한 읍지, 중앙정부의 각종 기록, 그리고 일정한 수록규정을 바탕으로 읍지의 정본화(定本化)에 주력하였다. 1789년(정조 13) 6월 정조는 교정당상인 이서구와 논의하여 ‘해동읍지’ 수록항목을 결정하였으며, 도별 담당자들에게 항목별로 업무를 분담시켰다. 가장 먼저 완성한 경도와 한성부의 읍지는 순조 말에 신증한 것을 재필사한 『동여비고』 2권 2책으로 현전하고 있다. 연대기 사료에는 경기도, 충청도를 거쳐 경상도까지 시작한 것으로 나온다. 1790년(정조 14) 규장각 서고에는 『해동읍지』 1건 46책을 비치하고 있었다.
1792년(정조 16) 말 정조의 지시로 승정원에서는 전라도에 영남규모(嶺南規模)에 따라 읍지를 편찬하라는 절목을 내려보냈다. 당시 전라감영에서는 『안동부여지지』(1786)를 바탕으로 일부 항목을 신설한 『호남읍지』 유형을 보급하였다. 개인소장본 『호남읍지』와 『각도읍지』에서 전라도 56개 고을 가운데 54개 고을의 1793년지를 확인할 수 있다. 『호남읍지』 유형은 정조의 『해동여지통재』 간행의 이상을 반영한 것으로 『여지승람』을 대체할 만한 전국읍지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유형은 전라도 이외 지역까지 확대되지는 않았다. 『해동여지통재』 편찬의 이상은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하여 미완의 과제로 남게 되었다. 당시 정본화하고 있던 『해동여지통재』 60권은 유일 필사본이기도 하였지만 제대로 관리되지도 못했던 듯하다. 그리하여 『해동여지통재』는 『동여비고』와 『호남읍지』에서 정본화한 흔적을 겨우 확인할 수 있다.
1832년(순조 32) 규장각에서는 각 도에 공문을 내려 『각도읍지』에 빠진 고을의 읍지를 채워 넣어 전질을 갖추었다. 1832년에 편찬한 『경상도읍지』는 읍지유형이 동일하지만, 『호남지』는 유형이 다양하였다. 그리하여 『경상도읍지』는 『각도읍지』 경상도편에 포함되었지만, 전라도는 『각도읍지』 1793년지에 누락된 고을 위주로 『호남지』 수록 읍지를 포함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각도읍지』는 이전에 편찬한 읍지와 새로 수집한 읍지 가운데 선별하는 과정을 거쳐 전질을 완성하였다. 『각도읍지』의 완성은 정조대에 추진한 『해동여지통재』의 편찬을 마무리한 것이다. 그러나 『여지승람』을 대체하기에는 고을별로 수록형식과 분량의 차이가 너무나 컸으며, 출판되지도 않았다. 『각도읍지』 1832년지는 159개인데, 『여지도서』 보완유형 86개(54%), 『여지도서』 계통 43개(27%), 예외 유형 16개(10%), 『여지승람』 계통 9개(6%), 『호남읍지』 유형 5개(3%)이다.
헌종대인 1840년대에는 연차적으로 경상도⋅경기⋅강원도⋅충청도⋅전라도 순으로 도지를 편찬하였다. 1860년(철종 11)에는 『관북읍지』, 1862~63년(철종 14) 사이에는 『호남도지』를 편찬하였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직면한 고종 집권기의 조선⋅대한제국은 근대 국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각 고을의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읍지를 수집하였다. 1868년(고종 5)에는 『관북읍지』를 편찬하였다. 1871년(고종 8)에는 의정부의 지시로 각 고을에서는 읍지⋅지도⋅사례대개와 영⋅진⋅역지를 편찬하였다. 1874년(고종 11)에는 『호남읍지』를, 1878년(고종 15)에는 『경상도읍지』(국립고궁박물관의 『읍지』 경상도편)와 『황해도전지』를, 1879년(고종 16)에는 『호남읍지』를, 1881~82년에는 『강원도읍지』를 편찬하였다. 1894년(고종 31) 의정부(내각)는 각도의 감영⋅병영으로부터 주부군현⋅진⋅역⋅보에 이르기까지 인사와 재정에 관한 읍사례를 부기한 읍지를 수집하였다.
1897년(광무 1) 10월 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한 이후, 1899년(광무 3) 4월 대한제국 내부에서는 각 고을에 읍지와 지도를 각 2건씩 정서하여 올리라는 읍지수상령을 내렸다. 규장각의 252종 312군의 읍지는 당시 각군에서 상송한 것이다. 장서각이 소장하고 있는 강원도 26개 군의 읍지는 대부분 1899년 1월에 편찬한 읍지에 이후 편찬한 읍지를 합친 것이다. 1899년 당시 지방행정구역인 342개 부⋅군 가운데 338개는 1899년지가 현전하고 있으며, 한성부⋅경주군⋅영변군⋅함흥군 읍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한편, 대한제국은 1899년 3월 『각도읍지』 72책의 경운궁 흠문각 내입을 계기로, 분실한 고을과 신설군의 읍지를 보충한 보유편 8책을 제작하였다.
국립고궁박물관의 『읍지』 74책은 2011년에 환수한 전국읍지인데, 일제가 대한제국 각 고을의 사정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자 정선하여 반출하였으며, 국권 피탈 과정이나 이후 식민 지배 전략 수립 등에 활용하려는 의도가 강하였다. 국립고궁박물관과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각도읍지』는 각 고을이나 감영, 혹은 규장각 등에서 어람용으로 잘 정서한 선본이며,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 『여지도서』 다음으로 오래된 전국읍지이다. 1899년 당시 대한제국 행정구역인 부⋅군 가운데 한성부(경도 포함)를 제외한 341개 고을 읍지를 포함하고 있다. 각 고을의 사정을 면밀히 파악(‘조사’)하기에는 최적의 자료였다. 1909년(융희 3) 일제가 반출할 당시 『각도읍지』는 80책이었는데, 일제는 『각도읍지』 경상도편 20책 대신 열고관의 『읍지』 14책을 포함시켜 ‘『읍지』 74책’을 반출하였다. 『각도읍지』 경상도편은 『여지도서』 보완유형으로 획일적이었던 반면, 열고관의 『읍지』는 다양한 유형을 수록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분량도 더 많았기 때문이다.
이 연구를 통하여 각 고을의 사정을 비교적 상세히 수록하고 있는 조선후기 읍지가 한국학의 여러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This article is an analysis of the Government-Eupji(官撰邑誌) in the Era of the Late Joseon Dynasty and the Korean Empire(大韓帝國). Eupji(『邑誌』, County Gazetteer) contained not only historical and geographical information of a county, but also poetry and character information. Thus, it was more of a comprehensive county information book rather than a simple book of geography, which focuses on the Changes in Administrative(建置沿革). The origin of the Eupji began in 1424 when each county compiled them under the direction of Chunchugwan(春秋館).
There have been several Eupji studies so far, but a large number of materials have been found to have not yet been used in the research, so it is necessary to supplement the previous research by utilizing these data sets. Most of the Eupjis during the reign of King Yeongjo and Jeongjo provided by the ‘Comprehensive Information on Geography of the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were copied from the Consulate's Office(參事官室) of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in the early 1910s. Therefore, it is difficult to identify the original form of the Eupjis compiled at that time. In addition, the 74 volumes of Eupji(『邑誌』) of the National Palace Museum were taken by Hirobumi Ito(伊藤博文) in 1909, and the eupjis collected by Korea University's Center for Overseas Resources on Korean Studies were not properly studied.
From the end of the 17th century, the central government promoted the compilation of National Eupji. In the first and second attempts to promote Yeojiseungram during the reign of King Sukjong, fifteen items were newly added; these items created during the compilation of Private County Gazetteers[私撰邑誌] in the 16th and 17th centuries. It is a combination of Dongguk Yeojiseungram and Sejongsilok jiriji(『世宗實錄地理志』). The third attempt was to promote Yeojiseungram by focusing on the contents of characters and poems while drastically reducing the number of new items, but Jeungbo Yeojiseungram(『增補輿地勝覽』) was not published.
During the reign of King Yeongjo(英祖), the central government strengthened its control over the provinces and carried out several attempts to compile National Eupji to accurately understand the changing information of each county in the country, as well as to collect taxes and secure military personnel. The compilation of National Eupji during the second half of King Yeongjo's reign reflects the intention of restructuring the national record and re-organizing the national operating system. The first attempt(1757~58) was based on Eupjis that compiled the revision and promotion of Yeojiseungram during the reign of King Sukjong and, thus, the situation of the time was reflected in 1758.
During the second attempt(1759~60) in the reign of King Yeongjo, Hongmungwan completed the rules for the items of the Eupjis, i.e. the standard form of the Eupjis, and were bound up National Eupji, Yeojidoseo. Yeojidoseo was a practical National Eupji that recorded newly established items related to the tribute taxes and securing military personnel necessary for the operation of the state, while it avoided contents of poetry. Gyeongsang-do section kept the entire list of Yeojiseungram, while Hamgyeong-do section included schools and balcham(撥站).
It is reasonable to regard the Yeojidoseo as an Unfinished National Eupji(全國邑誌), bound in volumes at Hongmungwan(弘文館) in 1760, given that there is no record of additions since 1760. Among the Private County Gazetteers, the most frequently included items included Seungpyeongji(『昇平志』) and Posanji(『苞山志』), as well as the new items developed during the reign of King Sukjong. In Hongmungwan, the Eupjis collected and sent from each provincial government office were sorted out according to the jurisdiction(鎭管) of each county.
In the third attemp, the items of Sinjeung Dongguk Yeojiseungram and Yeojidoseo were included, and the names and order of the items of Yeojiseungram followed. Compared to the Gyeongsang-do section of Yeojidoseo, slash-and-burn field taxes(火稅), yoyeok(徭役), accomplishments of officials(宦蹟), markets[場市, including fish and salt(魚鹽)], literati degree holders(科擧), epitaphs and printing woodblocks(碑板) were newly established. This type can be classified into the Yeojidoseo Complement Type(補完類型).
The fourth attempt almost abandoned the Yeojidoseo Complement Type developed in 1768, and returned to the lineage of Yeojidoseo. In 1775, Hongmungwan kept the items in the Yeojidoseo list, and distributed the Yeojidoseo Supplement Type(增補類型), which had printing woodblocks(冊板) and accomplishments of officials(先生案) at the end of the book, and poems(題詠) were placed after the pavilions(樓亭).
The reign of King Jeongjo(正祖) can be divided into the first half of the year and the second half of the year as of June 1789, when the person in charge of compilation was confirmed for each province and item. In 1781, King Jeongjo attempted to develop a new type of Eupji that combined the Yeojiseungram and Yeojidoseo. In August 1787, King Jeongjo reorganized the attempt by developing regulations on the list based on eupjis he had previously collected, but failed to complete the attempt properly by sending the person who was in charge of the attempt to exile.
On June 16, 1789, King Jeongjo decided on the items in Haedong Eupji(海東邑誌) list after some discussion with Lee Seo-gu(李書九), the head of the correctional center, and decided to share them with the people in charge of each province to complete them at Kyujanggak(奎章閣). During this period, the government focused on the original version of the Eupjis according to certain guidelines through various records collected by the central government. Gyeongdo and Hansungbu Eupji, which were first completed, have two volumes of Dongyeobigo(『東輿備攷』), which were newly established in the early reign of King Gojong. It is said that it started in Gyeongsang-do through Gyeonggi-do and Chungcheong-do. King Jeongjo encouraged Lee Seo-gu in early 1790. At that time, the library of Kyujanggak had 46 volumes of Haedong Eupji.
In late 1792, Seungjeongwon(承政院) sent down the guidelines for the compilation of Eupjis. At that time, Jeolla-do developed and distributed the Honam Eupji Type, which was newly developed by the vice-governor Gwonbang(權訪) based on Andongbuyeojiji(1786). Although Gwon Bang was replaced in June 1793, Lee Seo-gu completed the Honam Eupji, which accurately reflected the regulations, when he was appointed as Jeolla-governor in August. The Honam Eupji type was a ‘perfect eupji’ to replace Shinjeung Dongguk Yeojiseungram, reflecting the ideal of King Jeongjo's Haedong Yeoji Tongji(『海東輿地通載』). The 60 volumes of Haedong Yeoji Tongjae, which were still in its original form at the time, were not properly managed as the only manuscripts, and only the traces of the original version of Dongyeobigo and Honam Eupji can be found.
In 1832, during the reign of King Sunjo(純祖), an official document was sent down to each province to fill in the Gakdo Eupji(『各道邑誌』). The completion of Gakdo Eupji was the completion of the National Eupji Compilation(全國邑誌編纂) during the reign of King Jeongjo. Completed in 1832, Gakdo Eupji had a wide gap between the type and the amount of each county to replace Sinjeung Dongguk Yeojiseungram. During the reign of King Heonjong(憲宗) and Cheoljong(哲宗) in the mid-19th century, six kinds of Provence unit Eupjis were identified, and the compilation period was different.
During the invasion of imperialist powers in the late 19th and early 20th centuries, Joseon and Korean Empire collected Eupjis several times to understand the situation of each county in the process of creating a modern nation. Gwanbuk Eupji was compiled in 1868, Honam Eupji in 1874, and Gyeongsangdo Eupji in 1878. In 1871, each county compiled the Eupjis, maps, cases(事例), and yeong⋅jin⋅yeok’s Eupjis(營鎭驛誌) by the official documents of Uijeongbu(議政府). but the Eupjis of Hwanghae-do and Gangwon-do are not confirmed. In 1894, the the Cabinet(内閣, Uijeongbu) collected Eupjis with county cases(邑事例) of personnel and finance from the provincial governments(監營) and barracks(兵營) to the counties and the jins⋅yeoks⋅bos(堡).
In April 1899, the Internal Ministry(內部) of the Korean Empire was required to collect two Eupjis and two maps for each county. The 251 species 312 counties of the Kyujanggak were compiled in 1899. Each county in Gangwon-do, Hansung-bu, Gyeongju-gun, Yongbyon-gun, and Hamheung-gun are not identified. On the other hand, most of the Eupjis of 26 counties in Gangwon-do, which are owned by Jangseogak, were compiled in January 1899. In March 1899, Gakdo Eupji was housed in Heummungak(欽文閣) of Gyeongungung Palace(慶運宮). With this opportunity, the lost Eupjis and new counties’ Eupjis were supplemented.
Gakdo Eupji is an old National Eupji following Shinjeung Dongguk Yeojiseungram, Donggukyeojiji, and Yeodoseo. Compared to other Eupjis, the writing is more upright and well preserved. By 1899, it contained the Eupjis of the entire Korean Empire except for Hanseong-bu, making it the best data to keep a close eye on the situation of each county. The Japanese chose 14 volumes of Gyeongsangdo Eupji, which were compiled in 1878, instead of Gakdo Eupji. As a result, the Gyeongsang-do section of Gakdo Eupji was left at the Kyujanggak Institute of Korean Studies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This thesis pointed out that it was difficult to identity the exact aspects of the attempts for each period in the National Eupji Compilation, which began during the reign of King Sukjong in the late Joseon Dynasty, as they were copied from the Eupjis compiled during the previous period. I hope that the use of the Eupjis in various fields of Korean studies will become more active by understanding the compilation of the Eupjis in the Era of the Late Joseon Dynasty and the Korean Emp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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