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동선수권대회 창설과 상해 조선체육인의 참가사 연구 = A study on the establishment of the far eastern championship games and the participation history of Korean athletes in Shanghai
저자
발행사항
서울 : 한국체육대학교, 2023
학위논문사항
학위논문(박사) -- 한국체육대학교 대학원 , 체육학과 , 2023
발행연도
2023
작성언어
한국어
KDC
692 판사항(6)
DDC
796 판사항(23)
발행국(도시)
서울
형태사항
vi, 299장 : 삽화, 도표, 초상 ; 26 cm
일반주기명
지도교수: 조준호
권말부록: 극동선수권대회 약관(約款) ; 브라운이 소지한 편지 내용 ; 교육국과 PAAF 협력 조항
참고문헌 수록
소장기관
극동선수권대회(FECGs)는 20세기 들어 대륙별로 활발하게 생겨났던 지역 올림픽 대회의 효시(曉示)였다. 이 대회는 창설 이후 1926년에 중앙아메리카 캐러비안경기대회(CACGs), 1932년에 마카비아경기대회(Maccabiah Games)와 발칸경기대회(Balkan Games) 등으로 이어졌다. 특히, 아시아지역에서는 1934년에 서아시안게임(West Asiatic Games)이 열렸고, 이 대회는 1951년 아시안게임(Asian Games)으로 대체되었다. 이처럼 극동선수권대회는 오늘날 아시안게임의 전신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근대 동아시아 체육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는 운동경기대회다.
극동선수권대회는 인류 문화사에 있어 축제의 개념이 새롭게 재편되던 시대에 탄생한 카니발에서 기원했다. 극동선수권대회의 기원이 된 마닐라 카니발은 두 가지의 필요성에 의해서 탄생하였다. 첫째는 ‘문명화’와 이를 통한 ‘필리핀 경제의 재건’이었다. 이에 새로 들어선 필리핀총독부는 도로와 항만 등 사회간접 시설의 확충과 함께 필리핀 경제부흥을 위한 국가적 이벤트의 필요성을 느꼈고, 그 결과가 바로 마닐라 카니발이었다. 둘째는 미국에 저항하는 세력들을 달래줄 유화책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필리핀의 강한 저항에 직면했다. 이에 미국 정부는 게릴라전으로 계속되는 필리핀의 미국에 대한 저항을 최소화하고 대치국면을 우호적인 관계로 전환할 대규모의 이벤트가 필요했다. 이러한 시대적 그리고 사회․정치적 배경 아래 마닐라 카니발은 탄생할 수 있었다.
마닐라 카니발의 프로그램은 박람회와 운동경기대회를 두 축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근대올림픽과 매우 유사한 구조로 마닐라 카니발은 태생적으로 극동의 지역 올림픽대회로의 발전을 위한 토대를 갖추고 있었다. 1908년 조지. T. 랭혼(George T. Langhorne) 대위에 의해 총괄 기획된 마닐라 카니발은 미국의 캔자스시티(Kansas City)와 뉴올리언스(New Orleans)의 축제, 세인트루이스(St. Louis)의 박람회를 참고하여 기획되었다. 이에 세계박람회와 올림픽의 특성을 살린 마닐라 카니발은 자연스럽게 운동경기를 카니발의 주요 이벤트로 구성했다. 이러한 마닐라 카니발의 성공은 미국 정부의 카니발 개최의 목적을 미국과 필리핀의 화합이라는 친선우호적인 성격에서 필리핀 원주민들의 미국화(Americanized)라는 사회․정치적 목적으로 심화, 확대되었다. 이는 다시 필리핀을 허브로 하여 동아시아 국가에 대한 미국화와 문명화 사업으로 확대됐다. 이 과정에서 마닐라 카니발의 참여 주체는 필리핀과 미국인에서 중국, 일본,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의 동남아 국가, 동남아 국민으로 더욱 확대되었다. 운동경기대회를 통해 마닐라 카니발은 필리핀 단일 국가 행사에서 동아시아 국가들의 지역 이벤트로 발전한 것이었다. 이때 동아시아 국가가 참가하는 동양 올림피아(Oriental Olympia) 경기가 극동선수권대회의 맹아적 성격을 지닌 운동경기대회로 탄생하게 되었다.
극동선수권대회의 전신인 동양 올림피아 경기의 초기형태는 1908년 포브스와 그의 하버드대학 운동부 후배들 그리고 필리핀카니발협회 놀팅(Nolting)과 조지 오라일리(G. O’Reilly)를 실무진으로 하여 구성된 전문 조직에 의해 탄생했다. 마닐라 카니발의 운동경기대회는 초기 학교대항 경기에서 지역대항 경기로 발전했다. 지역대항 경기에서 우승한 필리핀 전국 챔피언은 주변국을 대표하는 운동팀과의 경기를 요청했다. 이에 당시 동아시아 국가에 주재하고 있던 외국인들이 팀을 조직해 마닐라 카니발 운동경기대회에 참가하면서 국가대항 경기로 발전했다. 이후 1912년 8월 25일에 필리핀아마추어체육연맹(PAAF: Philippine Amateur Athletic Federation)에 의해 중국과 일본 선수들의 극동선수권대회 예비대회 성격의 동양올림피아(Oriental Olympia) 경기 참가계획이 정식 승인되었다. 그 결과 1912년 12월에 마닐라에서 극동선수권대회의 정식 출범에 앞서 동양올림피아 경기가 개최될 수 있었다. 이처럼 극동선수권대회의 기원은 1908년 마닐라 카니발 운동경기대회에서 시작하여 동양올림피아 경기를 거쳐 1913년 마닐라에서 열린 제1회 극동선수권대회로 성장 발전한 것이었다. 이처럼 극동선수권대회는 1908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된 마닐라 카니발에서 기원한 것임을 연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극동선수권대회의 창설은 필리핀총독부 총독인 W. 캐머론 포브스(William Cameron Forbes), 엘우드 S. 브라운(Elwood. S. Brown) 그리고 왕정정(王正廷)의 주도적인 노력으로 창설될 수 있었다. 포브스는 1909년 극동선수권대회의 기원이 되는 마닐라 카니발을 총괄하는 필리핀카니발협회의 회장과 필리핀총독부 총독의 위치에서 교육국과 함께 극동선수권대회의 모태가 되는 카니발 동양올림피아경기를 육성하고 발전시켰다. 또한, 그는 1912년 8월, 교육국(Bureau of Education) 국장인 F. L. 크로네(F. L. Crone)와 미국인 변호사인 W. 투설리(William. Tutherly) 그리고 YMCA의 체육 간사이자 PAAF 서기회계인 브라운을 실무진으로 극동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를 조직했다. 이처럼 포브스는 극동선수권대회의 기원이 되는 마닐라 카니발의 운동경기대회 개최부터 PAAF와 FEOA 그리고 극동선수권대회 조직위원회의 설립과 전문 인력의 배치 및 필리핀총독부 총독 명의의 초청장 발송 등의 외교적인 지원 등을 통해 극동선수권대회 창설의 토대를 마련했다. 즉 포브스는 극동선수권대회의 창설 초기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한 창시자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의 왕정정은 브라운의 중국 상해 방문 시 중국 체육계를 대표하여 극동선수권대회의 창설시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그로 인해 일본의 불참 결정으로 자칫 설립할 수 없을 뻔했던 극동올림픽협회와 극동선수권대회의 개최가 가능할 수 있었다. 아울러 그는 상해에서 개최된 제2회, 5회, 8회 대회의 실질적인 대회준비위(大會準備委) 위원장을 역임하며 정치적 재정적 난제들을 풀어내고 대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될 수 있도록 힘을 보탰다. 따라서 극동선수권대회 창설 초기에 중국 체육계를 대표하는 왕정정의 노력 없이는 극동선수권대회의 창설은 불가능했다. 이처럼 극동선수권대회는 기존 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져 왔던 브라운 이외에 포브스 그리고 왕정정의 세 사람의 시기별, 단계별 주도적 노력들에 힘입어 창설되고 발전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 종합경기대회의 창설은 조선체육인들에게도 강한 참가 의지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조선은 극동선수권대회의 전신인 동양올림피아 경기에서부터 싱가포르, 인도차이나, 태국 등과 함께 주요 초청대상국의 하나였다. 또한, 1913년 2월 10일에 제정된 극동선수권대회 약관에 따르더라도 조선의 참가는 합법적이었다. 즉, 조선은 원칙적으로 정식 참가국으로 참가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끊임없는 반대로 조선은 참가가 불가능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조선의 극동선수권대회 참가에 대한 염원은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체육 선구자들에 의해 중국 YMCA 체육 간사 출신의 FECGs 경기위원회 위원들과 브라운 FEOA 총간사 등을 통해 일본에 관한 지속적인 설득작업을 전개했다. 그러나 일본이 조선의 극동선수권대회 참가에 관하여 최종 승인을 거부했기에 조선 선수들이 조선을 대표한 대회 참가가 불가능했다. 이에 조선체육인들은 중국대표단 혹은 일본대표단의 일원으로 대회에 참가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극동선수권대회 참가는 주권을 상실한 식민지였기에 실현될 수 없었다. 그러나 상해 조선체육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인들의 극동선수권대회 참가활동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일제강점기 상해 조선체육인들은 극동선수권대회 참가를 통해 조선 근대체육의 대외지향성과 국제성을 널리 알렸다. 극동선수권대회에 직간접적으로 참가한 상해 조선체육인들은 모두 10여 명에 이르고 있다. 이들은 1910년대 중반 몽양 여운형을 시작으로 현창운과 신국권의 1세대 조선체육인, 여기에 주요섭, 현정주, 신형철, 박관해, 안원생 등의 2세대 조선체육인으로 구분될 수 있었다. 1세대 상해 조선체육인들은 1910년 한일병탄(韓日竝呑) 이후 거세지는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을 피해 정치적 망명의 성격을 띠고 중국 유학을 감행한 항일의식이 강한 인물들이었다. 2세대 선수들은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무자비한 조선 민족 탄압을 체험하면서 일본에서의 유학 생활을 정리하고 중국으로 이주한 현정주 그리고 주요섭, 주요한 형제와 같이 일본 동경 유학생 출신들이 주를 이루었다.
1세대 조선체육인이 야구와 축구 등의 단체, 구기 종목에서 강점을 보였다면 2세대 조선체육인은 육상과 수영 등 개인, 기초체육 종목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 같은 세대별 주 종목의 차이는 2세대 조선체육인이 근대교육 수업 과정 특히, 일본에서 체계적인 근대식 체육수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극동선수권대회에 만족하지 않고 싱가포르, 베트남,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지의 남양군도 국가들로의 원정경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신국권은 중국축구대표팀의 일원으로 선발되어 서구권 국가인 호주 시드니로 축구 원정경기를 다녀왔다. 안원생 또한 당시 동아시아 최고의 축구클럽인 상해 낙화구락부(樂華俱樂部)의 선수로 남양군도 국가에 장기 원정경기에 다녀오기도 했다. 여기서 나아가 그는 축구의 종주국인 영국과 축구 강국 독일, 오스트리아 등의 유럽원정경기를 계획하기도 했다. 이 같은 상해 조선체육인들의 대외지향성과 국제성은 1932년 제10회 LA올림픽 개막식에 신국권이 중국대표단 부단장의 자격으로 영어알파벳에 순서에 따라 8번째로 입장하며 최고 정점에 이르렀다. 그는 일본대표단의 일원으로 22번째로 입장한 권태하, 황을수, 김은배 등에 앞서 입장함으로써 올림픽 개회식에 최초로 입장한 조선인이 되었다. 이는 오늘날 세계스포츠계에서 강대국의 위치에 올라있는 한국체육의 국제적 위상의 출발점이 되었다는데 체육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이러한 일제강점기 상해 조선체육인들의 극동선수권대회, 나아가 국제 원정경기의 참가는 한국 근대체육의 대외지향성과 국제성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일제강점기 일본의 지원 없이도 조선인 스스로 역사를 개척해 나가는 진취적이며 자주적인 성격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러한 상해 조선체육인들의 진취적이고 대외지향적인 체육활동은 ‘조선인은 스스로 발전할 수 없는 민족’이라는 ‘일제의 조선 식민지배 원리가 전혀 맞지 않음을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는 정체성론(停滯性論)에 토대를 둔 식민사관을 정면으로 반박할 수 있는 명백한 증거의 하나로 제시될 수 있는 체육사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사적으로도 매우 의미가 있는 활동들이었다. 즉, 일제강점기 상해 조선체육인들의 극동선수권대회 참가에서 나타나는 그들의 대외지향성의 확인은 식민사관 극복의 단초(端初)를 마련해주고 있었다. 이는 체육사연구가 문화사 나아가 사회사 연구를 위한 중요한 배경적 요소임을 본 연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주요어: 극동선수권대회, 상해, 조선체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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