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후반 전통론 연구 : 시간-공간 의식을 중심으로 = 1930年代後半の傳統論硏究 : 時間-空間意識を中心に
본 연구는, 1930년대 후반 다양한 전통 담론들이 출현하고 논의되던 과정을 고찰하고, 그 담론의 구조와 성격을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규명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불변성, 고정성, 안정성, 동일성, 권위, 위신, 정통성 등에 대한 연상을 수반하는 전통은, 단순히 자연적인 시간의 흐름을 통해 이월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것과의 관계를 통해 주체의 위치를 확립하고자 하는 의식에 의해 대상화된다. 즉, 전통은 직접적인 소여(所與)가 아니라, 과거현재미래의 시간 연속체 속에서 주체의 장소를 발견하는 근대적 의식과 담론에 의해 생산된 결과물이다. 특히, 긍정적인 방식으로 전통을 구성하고 규정해야 한다는 요구가 등장하는 것은 과거와의 급격한 단절을 경험하는 시기이다. 따라서 ‘위기’ 또는 ‘전환기’를 겪고 있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을 때야말로, 시간공간정치학 속에서 전통이 구성되고 변형되는 시기이다.
본 연구에서 살피고자 하는 1930년대 후반의 전통 담론은 바로 이러한 ‘위기’ 또는 ‘전환기’라는 시대의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 전통 담론은 근대적인 시간표상 내에서 연속성을 재확인하는 ‘과거의 식민화’만으로 환원될 수는 없는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위기에 처한 것은, 크게 봐서, 근대적인 세계 인식틀, 그리고 그 인식틀 속에서 구성되었던 근대적 주체였기 때문이다.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이 국제연맹에서 탈퇴한 후, 영미에서의 군비확장, 중국에서의 항일투쟁의 격화, 그리고 유럽에서의 파시즘의 대두 등의 요인이 국제적인 마찰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조성하였다. 특히, 파시즘의 대두 이후 개인주의, 자유주의, 휴머니즘, 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 등에 기반한 근대적 문명 세계가 몰락하고 있다는 판단이 ‘근대의 위기’를 거론하게 하였다. ‘미래/과거’, ‘진보/퇴보(정체)’, ‘문명/야만’, ‘서양/동양(조선)’, ‘생산/소모’, ‘주체/객체’ 등 그때까지 시간공간적인 세계 인식을 틀지워왔던 근대적인 대립개념들의 가치론적 위계가 의심스러워졌으며, 미래에 대해 과거가, 문명에 대해 야만이, 서양에 대해 동양(조선)이 대등한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 맥락에서 전통은, 근대적인 인식틀로부터 거리를 둔 상태에서 새로운 주체대상 관계와 자명성의 기초를 확립하고자 하는 의식에 의해 문제삼아진 것이다. 이렇듯, 이 시기 전통을 둘러싼 논의는 근대에 대한 발본적인 재평가와 반성을 수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의 경계또는 그 너머에 대한 상상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본 연구는 이 시기에 ‘근대성의 가치전도’가 발생했다고 보고, 1930년대 후반 ‘조선주의 문화운동’ 및 ‘고전부흥론’으로부터 일제말기 문장 지의 전통주의 및 맑스주의자·모더니스트의 ‘동양문화’론까지 살펴봄으로써, 변화된 인식적 지형 위에서 전통반전통의 논의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고찰한다.
1930년대 중반부터 각종 저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조선주의 문화운동’은 고전, 전통 및 조선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는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등장한 것이 문장 이었다. 문장 의 전통주의는 상이한 시간의식에 의해 다르게 나타나는 바, 본 연구에서는 그것을 ‘에피파니적인 것’과 ‘노스탤지어적인 것’으로 구별하였다. ‘에피파니적인 것’이 과거의 삶을 반복함으로써 망각되거나 단절되어 있는 과거적인 것의 잠재성을 현실화시키고자 한다면, ‘노스탤지어적인 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에 대한 그리움을 통해 심미적인 아우라에 참여함으로써 근대적 일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한다. 그러나 과거적인 것에 대한 문장 의 태도에는, 자기의 무력함을 우월성으로 바꾸는 아이러니적인 전도가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전도 속에서 과거적인 것은 결코 전율의 계기가 되지 못한다.
한편, 1930년대 중반의 ‘조선주의 문화운동’을 낭만적 복고사상으로 규정하고 그 국수주의적·파시즘적 성격을 비판한 맑스주의자들과 모더니스트들은 중일전쟁후 일본 쿄토학파의 ‘세계사의 철학’으로부터 영향받아 ‘동양문화’를 둘러싼 논의에 참여하면서 전통논의에 변화를 가져왔다. ‘세계사의 철학’은 역사적 시간에 공간성을 끌어들이면서 ‘서양=근대’를 배척하고 지역적인 동일성을 부각시키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곳에서는 전통의 공간적인 경계까지 재고된다. 물론, 동양문화 또는 동양적 전통은 ‘대동아공영권’ 구상을 통해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확립하고자 하는 일제의 헤게모니 담론이었다. 그러나 ‘세계사의 철학’에 내포된 ‘세계’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문화의 ‘보편성’을 규제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동양문화’의 이상을 비판하고 ‘동양’ 내의 이질성을 드러내고자 한 시도도 있었다.
특정한 방식으로 전통을 규정하고 그것과 관계 맺는 사태는 필연적으로 전통을 대상화하는 주체를 전제한다. 문장 의 경우 ‘자연=과거=조선적인 것’을 대하는 태도로 부터 심미주의적 주체가 구성된다. 이곳에서 대상에 대한 지배 욕망을 지우고 세계를 감각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근대의 주체중심적 세계상을 교정할 수 있는 계기가 찾아진다. 그러나 일제말기 ‘다문화주의적 세계상’이 구성한 독특한 ‘시간의 공간화’는 ‘과거/현재’의 분열을 해소한 듯한 환상을 만들어내었고, 그 속에서 심미주의적 주체는 현재를 심미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런가 하면, ‘전환기’를 극복할 새로운 원리를 모색하고 있던 맑스주의자들과 모더니스트들은 절대적 주체의 장소로 귀착한다. 모든 차이를 무화시키는 ‘무의 장소’, 그리고 모든 상위개념을 현실적인 것으로 뒤바꿔버리는 ‘종(種)의 논리’ 속에서 절대적 주체는 절대적 비주체일 수밖에 없었다.
‘근대의 위기’와 ‘전환기’ 의식을 통해 바라보면, 흔히 ‘암흑기’라고 지칭되는 1930년대 말은 오히려 다양한 역사적 실험과 변혁이 들끓던 시기이다. 이 시기 전통의 문제는 문학과 역사를 넘나들면서 ‘전근대근대탈근대’, ‘민족식민탈식민’ 의 다양한 쟁점들을 사유하는 중요한 매개 고리로서 놓여 있었다. 즉 전통 담론들은 억압된 과거를 현재화하는 다양한 방식들과 관련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간공간 정치학의 기획과 맞물려 있기도 했다. 그리하여 ‘과거적인 것=조선적인 것’을 발견(발명)하는 문제만 아니라 새로운 전통의 시간공간적 경계를 구획하는 문제가 함께 사고 되었던 것이다. 본 연구는 이 시기 전통 담론들에 내포되어 있던 맹목과 통찰의 지점들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이 지점들이 각각 상이한 담론 층위들과 결합되는 구체적인 방식 및 그 의미들에 대한 보다 진전된 연구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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