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羅下代와 高麗時代 僧塔 硏究
저자
발행사항
[城南] : 韓國精神文化硏究院 韓國學大學院, 2002
학위논문사항
학위논문(박사)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 예술 , 2002. 8
발행연도
2002
작성언어
한국어
주제어
DDC
294.67 판사항(22)
발행국(도시)
경기도
형태사항
201 p. : 삽도 ; 26 cm
일반주기명
지도교수: 이성미
참고문헌: p. 183-187
소장기관
僧塔は印度にて仏塔の登場と殆んど同時代に造営しはじめ、中国を経って韓国に伝來されて新羅下代の禅宗仏教の受容と共に本格的に造塔の活動が展開された。僧塔の構造は伝統の仏像台座から着眼されたが、仏格と同一の台座(基壇)の構成意図が現れている。塔身は仏格と対等な造形物として構成するために塔身の形態を八角堂(塔)形の舎利器より応用されたと考えられる。高麗時代に入って圓球形(覆鉢形)、宝輿形、石幢形、スタパ(stupa)形など、多様な形態の塔身が造成されることを見てみな仏舎利荘厳と関わる造成物が塔身として登場する一貫性を見せている。
新羅下代の僧塔様式の進展過程では基壇部の下台石が二段から三段に発展し、装飾文様の構成もますます多様化されて造形技法も向上された。870年前後の時期では双峰寺の澈鑒禅師塔、高達寺の圓鑒大師塔等で技量が最高潮に達し、890年以後には後三国期の混乱によって技量が沈滞された。
高麗時代に入ってはしばらく伝統様式を継承しながら一部の造形技法として誇張表現が現れる新しい特徴を見せ、11世紀に入ってはじめて新しい様式を誕生させて造形技法も向上された。特に智光国師玄妙塔では華麗な宝輿形の僧塔様式がお目見えすることで,過去の伝統様式と異なる新しい国際的な眼目と絶頂期の技量を見せてくれたといえる。12世紀に入って僧塔の造営は一時的に中断されたが、その理由として大覚国師の入寂以後の火葬墓の流行、智光国師玄妙塔を継承するだけの底力の消尽等があげられる。
その後、高麗王朝の武臣政権期と元の侵略期に入った高麗後期では禅宗が再び優位を得るようになり、僧塔の造営も再開されたが、伝統の命脈を引き続いただけで前期の水準を回復す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一方、中国から伝来した石幢形の僧塔形式が登場し、松広寺を中心に流行ったこともあった。
高麗末期に入り、元の衰亡と共に高麗王朝は国権を回復したが、その時に新時代の潮流と一緒に鍾形の僧塔が登場するようになった。そして、この僧塔様式は朝鮮時代の後期に入り、鍾形の僧塔として大きく流行される端緒となった。また、技法については中国の石造美術様式を受容することで様式の変化が起った。
新羅下代の僧塔が韓国の僧塔の精髄を見せてくれたとすると、高麗時代の僧塔は様式の多様性を現わした特徴があるといえる。また、造塔の性向と様式の変遷は時期別に社会的な変化が起る度に同伴的な変化を見せてくれることで、様式史的な時期区分も史学界の時期区分と殆んど一致することが判る。そして様式の流れは地域的な性向と関係があることが明かされた。
新羅下代以来、韓国の僧塔は韓国の石造美術分野に新しい場を開き、あらゆる石造美術の分野を集大成した石造美術文化の代表的な主体として強く根付いたといえる。また、新羅下代と高麗時代を経って多様な造塔の過程と様式の変化が起られた韓国の僧塔は朝鮮時代の抑仏的な雰囲気下で民芸的だけでも全国的に僧塔の土着化時代を開き、多様な形式を登場させるなど、不断に伝統を受け継いで來たといえる。
僧塔은 이미 印度에서 佛塔과 거의 동시대에 조영되기 시작하고 中國으로 전래된 후 중국 唐代의 승탑이 우리나라로 전래되어 선종불교의 수용과 함께 본격적으로 造塔活動이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僧塔造營은 中國이나 우리나라를 막론하고 선종불교의 교단에서만 행하여지는 특별한 불사는 아니었으며 각 시기별로 당시의 불교계를 주도한 僧門이 바로 造塔活動의 주역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고려전기에 한때 華嚴宗이나 瑜伽宗, 天台宗 등의 僧門에서도 승탑이 조영된 바 있다. 그러나 신라하대 이후 우리나라의 불교계는 대체로 선종불교계에서 주도해온 관계로 승탑 또한 선종불교의 造塔活動과 상당한 관련을 맺어온 것이 사실이다.
新羅下代의 僧塔은 각 禪門에서 僧寶의 지위에 있던 祖師들과 선문을 계승한 嗣門僧들에게만 허용되었다. 그러나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전국 각처에서 수준높은 승탑들이 세워진 사실은 전국의 각 선문들이 명예를 위한 선의의 경쟁적 상황에 처하여 있었음을 일러주며 新羅下代의 僧塔文化를 발전시키는 좋은 결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고려 光宗朝 이후로는 造塔對象이 축소되고 造塔活動도 줄어 技倆을 크게 발전시킬 수 없는 여건이 형성되었다. 비록 11세기에는 고려문화의 발전적 역량으로 새로운 양식과 수준 높은 기량을 나타낸 僧塔이 조성되기는 하였어도 전반적으로는 高麗의 僧塔이 統一新羅 僧塔의 수준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승탑의 조영과정에서는 처음에는 埋葬法에 의하여 埋葬塔이 세워지다가 11세기 중엽 이후에 火葬法에 의한 火葬塔으로 바뀌었다. 이점에서는 비록 僧塔의 造營이 외래문화의 소산이었지만 葬法은 오랫동안 傳統葬法을 유지해오다가 고려 중엽에 들어 비로소 佛家傳統의 火葬法이 채택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2세기에는 독특한 火葬墓制가 채택됨으로써 승탑을 대신하였다.
고려 후기에 들어서는 시대의 변환과 함께 다시 火葬塔이 부활하였으며 造塔活動은 당시의 불교계를 주도한 禪宗의 僧門에서 주로 이루어졌으며 고려 말기에는 懶翁禪師系와 普愚禪師系의 두 僧門에서 활발하게 造塔活動을 전개하였으며 국권회복기에 들어서자 조탑활동도 활기를 띠었다. 특히 두 高僧의 탑을 여러 곳에 세움으로써 僧寶의 위상을 더욱 極尊化하였다고 할 수 있다.
승탑의 구조는 傳統의 佛像臺座에서 착안되었는데 佛格과 동일한 僧塔의 臺座(基壇)를 구성하려는 의도로 보여진다. 탑신 또한 佛格과 대등한 조형물로 구성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에 합당한 탑신의 형태를 八角堂(塔)形 舍利器에서 응용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고려시대에 들어 圓球形(覆鉢形), 寶輿形, 石幢形, 스투파형, 鍾形 등의 다양한 형태의 탑신이 조성되는 것으로 보아 모두 佛舍利莊嚴과 관련된 조성물이 塔身으로 등장하는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신라하대에 크게 유행한 八角堂形 塔身은 비록 建物의 형태를 본뜨고 있으나 의미적으로는 八角堂形 舍利器를 의식하고 조성된 것이 거의 틀림없다고 여겨진다.
승탑의 莊嚴은 塔身部보다 基壇部에서 더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탑신이 승탑의 얼굴이라면 기단은 탑신을 치장하는 坐臺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新羅下代 僧塔양식의 진전과정에서는 基壇部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下臺石이 2단에서 3단으로 발전하고 장식문양의 구성도 갈수록 다양해졌으며, 조형성이나 부조의 기량도 수준을 높여갔다. 따라서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870년을 전후한 시기에서는 雙峰寺 澈鑒禪師塔, 高達寺 圓鑒大師탑 등에서 기량이 최고조에 달하였으며 그 이후로는 하대석이 강화되고 규모도 커졌으나 890년 이후에는 후삼국기의 혼란으로 인하여 기량이 침체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한동안 傳統樣式을 계승하면서 일부 造形技法에서 과장표현이 드러나는 고려시대의 새로운 특징을 보여주었으며 11세기에 들어 비로소 새로운 양식을 탄생시키고 조형기법도 향상됨을 드러내었다. 특히 智光國師玄妙塔에서는 전혀 새로운 寶輿形 僧塔樣式을 선보임으로써 과거의 전통양식과 다른 새로운 국제적 안목과 절정기의 기량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名作이 탄생하게 된 데에는 顯宗代 초에 겪었던 契丹과의 항쟁이 종식되고 화친을 맺으면서 한 세기 동안 고려에 평화가 찾아왔고 契丹, 宋 등과 國際的인 交流도 활발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이 시기의 傑作인 智光國師玄妙塔은 당시에 사용되던 화려하고 현란한 장식에 외국에서 전래한 첨단의 도안으로 구성된 舍利移運用 寶輿에서 탑형을 채택하는 새로운 안목과 藝術性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智光國師玄妙塔의 조영 이후로는 조탑기량이 쇠퇴하고 12세기에 들어 僧塔造營은 일시 중단되었는데 그 이유로는 大覺國師의 입적 이후의 火葬墓의 유행, 智光國師가 소속된 瑜伽宗(法相宗)과 다른 僧門의 차별화된 葬法의 채택, 智光國師玄妙塔을 계승할 만한 저력의 소진 등을 들 수 있다.
그 후 高麗王朝가 武臣政權期와 元 侵略期로 접어든 高麗後期에서는 禪宗이 다시 우위를 점하게 되고 僧塔造營도 재개되었는데 敎宗과 禪宗에서 모두 승탑이 조영되기는 하였어도 그 중에서 普照國師 知訥에 의한 曹溪宗의 활동과 함께 僧塔造營이 주도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전통의 명맥을 이었을 뿐 前期樣式을 회복하지는 못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중국에서 전래한 石幢形 僧塔形式이 등장하여 松廣寺를 중심으로 유행하기도 하였지만 역시 난국에 처한 당시의 정황으로 말미암아 손꼽을만한 僧塔을 선보이지는 못하였다. 다만 기법상으로는 승탑 각부의 단면을 두툼하게 처리하고 표현감각이 묵직해지는 특징을 드러내었다.
고려말기에 들어 元의 쇠망과 함께 高麗王朝는 國權을 회복하였는데 이때 중국 唐 나라 때부터 전통을 이어온 臨濟禪이 普愚, 懶翁 등에 의하여 새로이 高麗에 소개되어 新羅의 九山禪門이나 高麗後期의 曹溪宗과는 다른 禪風이 진작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새시대의 조류와 함께 당시 불교계에서는 懶翁禪師가 귀국하여 그의 스승인 智空禪師의 塔을 喇嘛塔 樣式으로 조성하고 이를 계승한 懶翁禪師의 僧塔에서는 새로운 高麗樣式의 鍾形 僧塔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僧塔樣式은 朝鮮時代 後期에 들어 鍾形 僧塔이 크게 유행되는 실마리가 되었다. 또한 懶翁禪師와 동시대에 활동한 高僧 普愚禪師의 僧塔에서는 形式은 傳統을 계승하였지만 技法에서 中國의 石造美術樣式을 드러내는 등 양식의 변화가 뒤따랐다. 普愚禪師와 懶翁和尙의 유골은 分舍利되어 여러 사찰에서 다양한 양식으로 僧塔이 건립되는 양상이 벌어지기도 하였으며, 특히 令傳寺 普濟尊者舍利塔에서는 아예 전통의 石塔이나 다름없는 石塔形 僧塔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이처럼 고려말기에는 僧塔造營에 활기를 얻어 다양한 僧塔이 조성되고 기량도 다소 회복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이 그대로 조선시대로 계승되어 朝鮮時代 初期僧塔의 名作인 檜巖寺址浮屠가 조성되기도 하였다.
新羅下代의 僧塔이 우리나라 僧塔의 精髓를 보여주었다면 高麗時代의 승탑은 樣式의 다양성을 드러낸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또한 造塔性向이나 양식의 흐름은 시기별로 사회적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역시 동반적인 변화를 보여줌으로써 양식사적 시기구분도 국사학계의 시기구분과 거의 일치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樣式系譜와 宗派系譜의 상관관계는 거의 성립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僧門의 系譜를 따라 양식의 계승관계가 이루어지지는 않은 것 같다. 오히려 新羅下代와 高麗時代 초기에는 僧門의 계보보다는 호남권, 중부권 양식 등으로 구분될 수 있는 요소들이 보이고 있어 양식의 흐름은 지역적 성향과 더욱 관계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더구나 고려시대에는 僧門別로 僧塔이 연속적으로 조영된 것이 아니어서 계보와 양식의 관계가 성립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高麗後期에 曹溪宗의 宗刹인 松廣寺를 중심으로 石幢形 僧塔이 유행되어 이른바 ‘松廣寺 樣式’이 이루어지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경향도 한정된 지역에서 형성된 지역적인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
신라하대 이래로 조영되어온 우리의 僧塔은 우리나라 石造美術分野의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모든 분야의 石造美術을 集大成한 石造美術文化의 대표적인 주체로써 강하게 뿌리내렸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신라하대와 고려시대를 지나오며 다양한 造塔過程과 樣式의 변화를 겪어온 우리의 僧塔은 朝鮮時代의 억불적인 분위기에서도 民藝的이나마 전국적으로 僧塔의 土着化時代를 열어 다양한 형식을 선보일 정도로 줄기찬 전통을 계승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오늘날에 이르러 과거의 수준 높은 傳統이 제대로 계승되지는 못하였지만 우리의 僧塔造營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韓國의 僧塔文化는 뿌리깊은 전통과 함께 앞으로도 무궁하게 발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新羅下代와 高麗時代의 僧塔이 검증해 주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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