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 靑銅器時代의 聚落構造와 社會組織
저자
발행사항
대전 : 忠南大學校 大學院, 2009
학위논문사항
학위논문(박사)-- 忠南大學校 大學院 : 考古學科 考古學專攻 2009. 2
발행연도
2009
작성언어
한국어
주제어
DDC
913 판사항(22)
발행국(도시)
대전
기타서명
The Settlement structure and social organization of the Korean Bronze age
형태사항
218p. : 삽화,도표 ; 26cm.
일반주기명
충남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지도교수:朴淳發
참고문헌: p.200-214
소장기관
이 논문은 청동기시대 취락의 구조와 사회조직에 대해서 검토한 글이다. 연구대상의 시간적 범위는 청동기시대 전기간을 포괄하며, 공간적 범위는 한반도 중서부지역으로 설정하였다. 전체적인 내용을 논의 순서에 따라 정리하면서 결론을 맺고자 한다.
먼저, 서론에 이어지는 Ⅱ장에서는 청동기시대 취락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기에 앞서 전제조건이 되는 개념설정과 편년을 검토하였다. 개념과 관련하여 미사리유형, 가락동유형, 역삼동․흔암리유형, 송국리유형과 같은 문화적 유형(Cultural Assemblage)을 새롭게 조정하거나 정리하였는데, 각각을 주거구조와 유물상에서 나타나는 핵심 요소를 중심으로 유형을 설정하였다. 청동기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조기의 미사리유형은 미사리식주거지(방형 또는 장방형 평면에 판석부위석식노지 설치)를 특징으로 하며, 토기에서는 미사리식토기(돌대각목문토기)와 삼각만입석촉이나 반월형석도, 편평석부 등의 석기를 표지로 한다. 전기는 가락동유형과 역삼동․흔암리유형으로 대표된다. 가락동유형의 전형적인 유구․유물복합체는 주거구조는 장방형 또는 세장방형주거지에 위석식노지를 비롯하여 초석, 저장공 등이 설치되며(가락동식주거지), 토기상으로는 이중구연과 단사선문의 가락동식토기가, 석기상으로는 이단병 또는 유혈구 마제석검을 비롯하여 삼각만입석촉, 이단경석촉, 양인석부, 반월형석도 등을 주요 구성요소로 한다. 역삼동․흔암리유형은 기왕의 역삼동유형과 흔암리유형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를 통해 하나의 유형으로 재설정하였다. 주거구조는 장방형 또는 세장방형 평면에 무시설식 또는 토광형의 노지에 주공식 기둥배치가 특징적인 역삼동식주거지이며, 토기는 공렬문과 구순각목문을 표지로 하는 역삼동식토기와 여기에 이중구연, 단사선 등이 결합된 흔암리식토기, 그리고 이들이 공반하는 양자를 포함하며, 석기는 (혈구)이단병식석검, 삼각만입․이단경석촉, 반월형석도 등을 중심으로 한다. 청동기시대의 가장 발전된 시기인 후기의 송국리유형은 방형 또는 원형의 송국리식주거지와 외반구연호인 송국리식토기, 이와 더불어 일단병식석검, 일단경식석촉, 삼각형석도, 유구석부 등이 조합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이와 함께 지석묘, 석관묘, 석개토광묘, 토광묘, 옹관묘 등 다양한 형식의 분묘가 유행한다.
청동기시대의 편년과 관련하여 우선, 조기-전기-후기로 나누는 근거를 제시하였다. 조기는 즐문토기 말기요소와 무문토기 요소가 결합된 양상, 그리고 이와 동시기의 돌대문토기 단순기로서 이전 시기에 비해 농경의 비중이 높아진 신석기-청동기시대의 전환기로 정의된다. 전기는 조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마제석검과 청동기, 그리고 분묘가 출현하면서 중국 동북지역 비파형동검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시기로 특징된다. 후기는 재지의 청동기문화를 계승․발전시키면서 보다 성숙한 농경문화를 꽃피우게 되는데, 이를 통해 송국리식주거지라는 새로운 주거형식과 다양한 분묘가 등장하게 되고, 사회복합도가 상당히 높아지는 시기에 해당한다.
조기는 자료가 부족하여 단계설정이 부족한 실정이지만, 전기는 전술한 가락동유형과 역삼동․흔암리유형이 서로 병존하는 것이 특징이다. 각 유형의 Ⅰ․Ⅱ․Ⅲ기는 각각 청동기시대 전기전반과 전기중반, 전기후반으로 구분되는데, 이들은 서로간의 접촉 또는 교류를 통해 상대 집단 또는 지역의 문화를 수용하게 된다. 이것을 단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중서부지역의 가락동유형과 역삼동․흔암리유형 유적의 분포상이다. 가락동유형은 차령산맥 이남의 충청 남동부지역에, 역삼동․흔암리유형은 차령산맥 이북의 충청 북서부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것을 말한다. 후기는 기존의 편년연구성과를 활용하였는데, 선송국리유형의 후기전반과 송국리유형의 후기후반으로 나눈 편년안이 타당하다고 보았다.
Ⅲ장에서 각 시기의 취락을 검토한 이후에, 이를 토대로 Ⅳ장에서는 취락의 입지와 주거지를 분석하였다. 취락의 입지는 생계방식과의 관련성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제한된 자료이지만 조기는 강변 충적지의 평지형만 확인되었는데, 전작농경이 주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기와 후기에는 평지는 물론 산지와 구릉으로 취락의 입지가 다양화하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중서부지역에서는 아직 평지취락의 조사예는 많지 않은 실정이다. 전기에는 산지형이 부각되면서 화전농경을 포함한 밭농사가 중심을 이루며, 후기에는 구릉형 취락이 주체가 되는데 이는 논농사의 확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이어서 개별 주거와 주거군을 분석하였다. 주거지의 분포양상은 전기의 가락동유형 취락은 전기전반(가락동Ⅰ기)의 점상취락에서 전기중․후반(가락동Ⅱ․Ⅲ기)에는 선상취락으로 변화되는 흐름이 간취되며, 역삼동․흔암리유형 취락은 전기전반(Ⅰ기)은 분명치 않지만, 전기중반(Ⅱ기)은 선상취락이 많이 보이며, 전기후반(Ⅲ기)에는 면상취락이 등장한다. 후기가 되면 면상취락이 급증하게 되는데, 이는 다시 괴형, 광장형, 환형으로 세분된다. 이 가운데 환형취락이 취락내에서 단위 주거군 간의 기능분화나 위계가 관찰되는 점에서 중심취락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개별 주거에 있어서 조기와 전기의 장방형 또는 세장방형의 대형 주거지는 복수의 노지가 설치된 점에서 볼 때, 세대공동체의 가옥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후기의 소형 방형 또는 원형 주거지는 개별 세대의 가옥이지만, 이들이 2~5동으로 군집된 주거군 역시 세대공동체로 해석된다. 청동기시대 후기의 송국리식주거지는 노지가 확인되지 않아 계절가옥 또는 공방적 성격의 주거 등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했지만, 주거지 내부의 타원형수혈이 노지일 가능성이 높다는 “타원형수혈 노지설”을 수용하여 이를 복원해 보았다. 이는 청동기시대 후기의 취락론을 펼치는 데 중요한 전제조건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거군의 분석을 통해 전기 주거지들간의 배치와 출입구의 위치에 주목하여 2동 조합의 주거군은 일렬배치, 병렬배치, 직교배치가 존재하며, 3동 조합의 주거군에는 일렬배치와 삼각배치가 존재함을 밝혀냈다. 이는 복수의 세대공동체의 조합을 의미한다. 전기와 후기 주거지는 모두 증개축 현상이 나타나는데, 전기의 장방형 또는 세장방형 주거지가 주로 장축방향으로 횡적인 확장이 나타는데 반해, 후기의 송국리식주거지는 기본구조의 결합에 의한 건축구조의 변화를 수반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최근 학계에 이슈화된 송국리식주거지의 형성과 관련해서는 경기남부와 충청북부의 신출 자료를 토대로 반송리식주거지라는 새로운 주거형식을 설정하고, 이것으로부터 송국리식주거지가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주장하였다. 즉 청동기시대 전기말 장방형주거지의 중심2주공으로부터 시작하여, 여기에 타원형수혈이 중심축에 있는 송국리식주거지와 달리 중심축에서 벗어난 곳에 설치되는 반송리식주거지를 주목한 것이다. 이에 따라 반송리식을 포함한 광의의 송국리식주거지가 처음 등장한 지역은 경기남부 또는 충청북부라는 새로운 견해를 피력한 것이다.
Ⅴ장에서는 취락의 구조와 사회조직을 고찰하였다. 청동기시대 조기의 미사리유형 취락은 아직 주거지만 확인된 상황이며, 전기의 가락동유형과 역삼동․흔암리유형 취락도 대부분 주거공간만으로 구성된 취락이 일반적이다. 그렇지만 극히 일부의 취락은 소규모의 분묘공간이 형성되면서 취락구성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와 함께 전기 취락의 매우 예외적인 현상으로 전기전반으로 편년되는 청원 대율리의 환호취락도 나타난다. 이는 가락동유형의 기원지로 지목되고 있는 서북한지역의 청천강~압록강유역에 계보를 둘 가능성을 언급하였다. 아무튼 전기취락은 천안 백석동취락과 같이 200여동의 주거지가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묘는 한 기도 분포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진 것에서도 단적으로 알 수 있듯이, 이 시기의 대부분의 취락들은 이동이 빈번한 화전농경을 주요 생계원으로 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청동기시대 전기에 분묘군의 형성이 미약한 가장 큰 이유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청동기시대 후기가 되면 취락의 내부 공간은 다양하게 바뀌면서 이와 동시에 질적인 변화도 수반된다. 주거공간만이 아닌, 군집 저장공의 형태로 저장공간이 부가되는 경우와 주거와 분묘공간의 조합, 그리고 주거, 저장, 분묘, 의례공간이 모두 세트를 이루는 취락 등으로 변모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수도농경의 확대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이 시기기야말로 본격적인 정주취락이 형성되는 시기이다. 이 가운데 주거공간+저장공간+분묘공간+전업적 수공업생산 공간+의례공간으로 구성된 취락이 부여 송국리나 보령 관창리취락과 같은 대형 또는 중심취락과 연결된다. 이와 함께 후기의 취락구성에서 주목되는 시설로는 지상건물과 저장공, 우물을 중시하였는데, 특히 지상건물과 저장공은 농경생산물의 저장시설로서 또는 의례공간과 같은 공공집회소로 활용되면서 취락 내부의 공간활용 및 위계관계 또는 취락간의 위상이나 성격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회조직과 관련해서는 전기 취락의 집단은 2단위의 계층으로 구성된 것으로 보았다. 즉 주거공간에서 확인되는 주거군간의 차별화를 통해 취락을 이끄는 지도자와 그의 가족들(세대공동체)을 상위계층으로, 나머지 취락 구성원들을 일반계층으로 나누었다. 또한 일부 유적에서 확인되는 분묘를 축조한 계층은 취락을 대표하는 지도자와 관련이 있으며, 나머지 대부분의 일반계층은 분묘를 축조하지 못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대전 비래동이나 서천 오석리 오석산유적과 같이 중서부지역 전기후반의 분묘에서 비파형동검이 부장되는 현상은 주목할 만한데, 이는 전기의 늦은 시기에 계층화의 맹아적인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을 시사하는 자료임에 틀림 없다.
후기에는 전기와 비슷한 2단계의 사회조직 형태를 취하는 취락도 여전히 존속하지만, 이 시기에는 상위계층과 중위계층, 그리고 일반계층으로 구성된 3단계의 서열화된 위계관계가 나타난다. 전기보다 후기의 취락이 농경생산의 증대에서 기인하는 대규모 저장공간과 분묘공간이 형성되는 등 사회복합도가 상당히 진전되었을 것이지만, 상위집단과 일반집단으로 양분되는 큰 틀은 대부분의 취락이 상당부분 유사하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그렇지만 보령 관창리나 부여 송국리취락과 같은 대형 또는 중심취락의 경우에는 분묘공간과 전업적 수공업생산공간, 저장공간, 의례공간 등의 취락내 분화가 활발히 진행되면서 더욱 다양하고 복잡한 조직관계가 형성된다. 중심취락 내의 사회조직이 상위-중위-일반계층으로 삼분되는 현상이 그것이다. 특히 송국리취락의 대형 지상건물과 동지주건물로 구성된 대규모 의례공간과 특정 계층을 위한 분묘공간은 수장의 존재를 상정하게 하는 중요한 자료로 이해하였다.
취락간의 관계 또는 위계 설정에서 주목한 것은 단위 취락의 공간구성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한 부여 송국리나 보령 관창리취락은 주거공간을 비롯하여 저장공간, 분묘공간, 전업적 수공업생산공간, 의례공간으로 이루어진 상위취락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공주 산의리와 같이 주거와 저장, 그리고 비교적 큰 규모의 분묘공간으로 구성된 취락은 중위취락으로 구분된다. 이 밖에 주거공간만으로 구성된 취락이나 주거+저장공간의 조합, 주거와 소규모 분묘공간의 조합, 주거+저장+소규모 분묘공간으로 이루어진 취락들은 일반취락으로 분류하였다. 즉 취락간의 위계는 상위취락, 중위취락, 일반취락으로 삼분되는데, 이들 각각의 단위 취락은 서로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연결된 네트워크망을 형성했던 것으로 이해하였다. 또한 관창리나 송국리와 같은 상위취락은 직접적인 관계망으로 상하(종속)관계를 형성한 일반취락을 포괄하는 중심취락으로 설정할 수 있으며, 그 외부의 주변 취락들과는 교류, 또는 교역 등을 통해 간접적인 관계망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았다. 특히 송국리 중심취락과 주변취락 간에는 강한 문화적 동질성에 바탕을 둔 공동의 의례행위가 행해졌을 가능성을 언급하였는데, 이 단위 취락을 넘어선 차원의 공동 의례는 상호 호혜적인 관계로 추정하였다.
한편, 청동기시대 후기의 취락 가운데에는 외부 지향적 성향을 가진 집단이 존재하며, 특히 중심취락의 상위계층이 외래계 취락을 대상으로 한 교류 또는 교역의 주체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 사례 연구로서 보령 관창리취락과 교성리취락간의 교류양상을 주목하였는데, 관창리취락의 초대형주거지에서 점토대토기 등의 외래계 유물이 출토된 것을 수장을 포함한 재지계의 상위계층이 외래계 취락과 접촉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중서부지역에서는 청동기시대 후기의 송국리식주거지에서 송국리식토기와 수석리식토기(점토대토기)가 공반되는 유적들이 속속 확인되고 있는데, 보령 관창리유적을 비롯한 이 유적들은 송국리유형과 수석리유형의 편년적 위치와 함께 재지계 문화와 외래계 문화의 역학관계를 추적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주거구조 및 공반 유물상에 대한 검토를 통해 관창리 유적의 늦은 단계는 “재지주체(주거지․유물)+외래수용(유물)”의 “관창리형 취락”으로, 교성리 유적은 “외래주체(주거지․유물)+재지수용(유물)”의 “교성리형 취락”으로 개념화시켰다. 관창리형 취락의 경우 송국리식주거지에서 점토대토기, 흑도장경호, 두형토기 등 각종 외래유물이 세트로 확인되는 점에서 외래계 신기종의 수용에 보다 적극적이었던 것 같으며, 이와는 대조적으로 교성리형 취락에서는 토착 송국리유형의 적색마연토기만이 소량 공반되는 점에서 차별된다. 이와 같이 “관창리형 취락”과 “교성리형 취락”이 공존하는 현상은 요령지방으로부터 새롭게 등장한 교성리 취락 집단(이주민)과 재지의 토착 관창리 취락 집단(재지민 또는 선주민)간에 상대방 집단의 특징적인 유물을 공유하는 “교류”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시기에는 양 집단의 주거구조는 변화없이 물품교류만 이루어지는데, 이는 문화의 선택적 수용의 결과로 이해하였다.
유적의 입지적 특징을 통해서 볼 때, 등장 초기의 점토대토기 사용집단은 가경지를 선점하고 있던 토착 송국리유형 집단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산상의 고지에 취락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때의 긴장, 갈등, 대립 국면은 점토대토기집단으로서는 생계경제상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였을 것이므로, 재지 선주민들과의 부단한 접촉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이때의 구체적인 접촉 대상은 선주민 사회의 상위계층으로 추정되는데, 선주민 사회의 상위계층에 있어 외래유물은 집단 내에서 여타 구성원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상에서 관창리형 취락과 교성리형 취락의 양상이 나타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와 같이 송국리유형→수석리유형으로의 변화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재지계(선주민) 집단에 대한 외래계(이주민) 집단의 접촉시도와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했던 재지계 집단 상위계층의 수용 욕구였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서부지역 청동기시대 사회조직의 양상을 검토하였는데, 구미 고고학계에서 논의되어 온 평등사회와 계층사회의 일반적인 특징을 비교하였다. 그 결과 청동기시대 후기에 유력 개인이나 유력 집단의 존재, 경제적 측면의 재분배와 전문 수공업자의 존재, 그리고 3단계의 위계 형성 등은 계층사회의 특징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렇지만 사회적 계층화가 제도화된 세습적(귀속적) 지위, 즉 세습 지배자의 존재를 입증할만한 근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 후기 송국리유형 단계의 사회를 획득지위만 허용되는 계층사회인 “단순 계층사회(simple stratified society)”로 규정하였다. 한편, 자료가 부족하여 자세한 설명을 할 수는 없었지만, 청동기 부장묘가 존재하는 청동기시대 전기사회는 서열사회(rank society)로 분류된다.
이상으로 논문의 내용을 장별로 요약정리하였는데, 다음은 논문을 작성하면서 느낀 점을 약간 언급하고자 한다. 본고에서 검토한 청동기시대 취락의 구조와 사회조직에 대한 분야는 최근부터 연구가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수많은 선학들의 연구논문이 작성될 당시만해도 좁은 의미의 취락으로 볼 수 있는 주거공간만을 대상으로 조사와 연구가 진행되었고, 분묘공간 역시 주거공간과의 유기적인 관계는 다루어지지 않은 것이 현실이었다. 삶의 영역과 죽음의 영역이 별개로 논의될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이 글에서는 취락의 전모가 파악된 유적을 분석 대상으로 삼고자 노력하였으며, 주거공간만으로 이루어진 취락을 비롯하여, 주거지역과 매장지역을 아우르는 넓은 차원의 취락 연구를 시도한 것에 의의를 부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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