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I등재
순조대 경연의 운영과 그 정치적 의미 - 召對·別講을 중심으로 = A Study on Royal Lecture of King Sunjo(1800~1834) and its Political Meaning - with a focus on Sodae and Byeolgang
저자
황유나 (이화여자대학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22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발행기관 URL
수록면
283-329(47쪽)
KCI 피인용횟수
0
제공처
Gyeongyeon (經筵) system was composed of Beopgang (法講, the lectures on law) and Yangdae (兩對, two meetings). The previous kings had put Beopgang at the center of this system, while King Sunjo mainly made use of Yangdae, which consisted of Sodae (召對, Nonscheduled Meeting) and Yadae (夜對, Night Meeting), and Byeolgang (別講, Special Lecture). Byeolgang is a royal tutoring system that extended and improved Sodae and was developed in 1811 (11th year of Sunjo). Sodae and Byeolgang could be convened and conducted at any time he wished to. Also, he could summon any bureaucrat, no matter whether the bureaucrat was an official counselor or not. Accordingly, Sodae could work as a place where King Sunjo accepted more extensive political opinions and had a chance to examine whether a bureaucrat would fit in a certain governmental position.
Through Sodae, King Sunjo evaluated the participants’ competency in order to extend his pool of talents. Moreover, he had the participants give lectures on Kukjobogam (國朝寶鑑), which explained the great achievements of the previous kings, in order to tackle the abuses of government and create a plan for his administration. All these steps were intended to inherit the Tangpyeong (蕩平) politics of King Youngjo and King Jeongjo.
In 1817 (17th year of Sunjo), the death of Park Jongkyeong from Bannam Park Clan changed the political terrain where Kim Josun from Andong Kim Clan began to consolidate the hegemony. Hence, King Sunjo sought a role as a mediator to set a balance of power between the Sedo families by means of Sodae and Byeolgang. He had the bureaucrats, whom he had selected through Sodae, participate in the lectures in the same ways as before. Additionally, he unexpectedly summoned the young bureaucrats from Gyeonghwasajok (京華士族), whom he expected to form a future power group comparable to Andong Kim Clan, and had them give a lecture in the presence of the King. King Sunjo selected topics from the lecture literature which was chosen on a daily basis from the books edited and compiled by King Jeongjo. Because King Jeongjo envisaged a king(君) as a teacher(師), these selections implied King Sunjo’s political aim to reinforce his authority as a king. In addition, the state affairs were often discussed and resolved in Sodae and Byeolgang; convened several times a day, their importance in governmental decision-making increased.
경연제도는 朝講․晝講․夕講의 法講과 召對․夜對의 兩對로 구성되어 국왕이 신료들과 經史의 학문적 토론과 정치적 사안에 대한 논의를 수행한 교육과 정치의 장이었다. 조선시대 국왕들은 법강을 중심으로 경연을 실시하였는데 그와 달리 순조는 소대, 또 새롭게 제도화한 별강을 중심으로 경연을 운영했다. 소대와 별강은 제도의 시행이 온전히 국왕의 의사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므로 국왕의 통치 의지, 통치 행위의 수준이나 상태를 단적으로 파악하는 척도로 활용할 수 있다.
순조의 경연 운영은 시기에 따라 활용 방식의 차이가 상당했다. 1804년 친정을 시작한 이후 1812년까지 순조가 보여준 경연 운영은 유교적 통치이념에서 강조하는 이상적인 운영상에 부합하는 방식이었다. 국왕은 정무를 보지 않는 시간에도 수시로 近侍를 불러 질문하고 논쟁하여[發問論難] 신료와 자신의 정견을 확인하고 그를 국정운영에 반영하였다. 특히 소대와 야대를 주로 활용하여 국왕과 신료 간의 거리를 좁혔고 그 과정에서 개별 신료의 성향을 파악하고 발탁하여 정치적 성장을 보조하기도 했다. 탕평의 기치를 명시적으로 내세우지는 않았으나 간헐적으로 내비치는 계술의 의지와 구체적 행위로 볼 때, 탕평을 내세웠던 선왕의 뜻과 통치를 이어 국정을 주도적으로 운영하는 데 순조의 본의가 있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1813년부터 효명세자가 대리청정하기 전인 1826년까지의 경연 운영은 조선 후기 경연 운영의 맥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양상이었다. 순조는 특히 1818년부터 소대와 별강을 활용하여 하루에 여러 차례 조정 내 신료들과 대면하면서 권력의 누수를 막고 국왕을 보좌하는 신료의 역할을 강조하고자 했다. 이는 정치권력이 김조순의 노론 북당을 중심으로 한 세력에 편중되는 상황에서, 흔들리는 통치 기조를 정비하고 권력 구도의 변화를 연착륙시키기 위한 대응으로서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다만 당시의 소대와 별강 운영에서 경연제도가 본래 가진 修己적 성격과 군신 간 논의의 장으로서의 성격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 점 때문에 후반기 소대와 별강의 운영은 공허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순조는 1821년 초까지 1,100회가 넘는 소대와 별강을 지속적으로 실시하였다. 순조는 소대와 별강에서 수시로 公事를 처리해 機務가 적체되지 않도록 하고, 당대 주요 벌열 가문의 자제를 불러들여 忠良한 신료의 역할을 강조하고 기강을 확립하려는 한편 정치권력의 핵심에서 소외된 정파의 인사들을 소대와 별강에 꾸준히 참여하게 하여 신료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국왕에 진달하는 창구로 삼았다.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
2027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1-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1-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9-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4-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3-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2-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1999-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2016 | 0.87 | 0.87 | 0.96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97 | 0.98 | 2.253 | 0.44 |
서지정보 내보내기(Export)
닫기소장기관 정보
닫기권호소장정보
닫기오류접수
닫기오류 접수 확인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확인
닫기이용약관
닫기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약관 (2017년 1월 1일 ~ 현재 적용)
학술연구정보서비스(이하 RISS)는 정보주체의 자유와 권리 보호를 위해 「개인정보 보호법」 및 관계 법령이 정한 바를 준수하여, 적법하게 개인정보를 처리하고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에 「개인정보 보호법」 제30조에 따라 정보주체에게 개인정보 처리에 관한 절차 및 기준을 안내하고, 이와 관련한 고충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개인정보 처리방침을 수립·공개합니다.
주요 개인정보 처리 표시(라벨링)
목 차
3년
또는 회원탈퇴시까지5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3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2년
이상(개인정보보호위원회 : 개인정보의 안전성 확보조치 기준)개인정보파일의 명칭 | 운영근거 / 처리목적 | 개인정보파일에 기록되는 개인정보의 항목 | 보유기간 | |
---|---|---|---|---|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자 가입정보 파일 | 한국교육학술정보원법 | 필수 | ID, 비밀번호, 성명, 생년월일, 신분(직업구분), 이메일, 소속분야, 웹진메일 수신동의 여부 | 3년 또는 탈퇴시 |
선택 | 소속기관명, 소속도서관명, 학과/부서명, 학번/직원번호, 휴대전화, 주소 |
구분 | 담당자 | 연락처 |
---|---|---|
KERI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정보보호본부 김태우 | - 이메일 : lsy@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439 - 팩스번호 : 053-714-0195 |
KERI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개인정보보호부 이상엽 | |
RIS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대학학술본부 장금연 | - 이메일 : giltizen@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149 - 팩스번호 : 053-714-0194 |
RIS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학술진흥부 길원진 |
자동로그아웃 안내
닫기인증오류 안내
닫기귀하께서는 휴면계정 전환 후 1년동안 회원정보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으신 관계로 개인정보가 삭제되었습니다.
(참조 : RISS 이용약관 및 개인정보처리방침)
신규회원으로 가입하여 이용 부탁 드리며, 추가 문의는 고객센터로 연락 바랍니다.
- 기존 아이디 재사용 불가
휴면계정 안내
RISS는 [표준개인정보 보호지침]에 따라 2년을 주기로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관하여 (재)동의를 받고 있으며,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휴면계정으로 전환됩니다.
(※ 휴면계정은 원문이용 및 복사/대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휴면계정으로 전환된 후 1년간 회원정보 수집·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RISS에서 자동탈퇴 및 개인정보가 삭제처리 됩니다.
고객센터 1599-3122
ARS번호+1번(회원가입 및 정보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