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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호란 직후 ‘李仁居의 난’ 연구 = A study on 'Rebellion of Lee In-geo' just after the Later Jin invasion of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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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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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160(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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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the Later Jin invasion of Joseon occurred in 1627(Injo 5), Joseon made a pledge of relationship of brother with the Later Jin(後金). But the pledge was against criticism on foreign policy of King Gwanghaegun(光海君) which is one of justifications for Injo(仁祖) coup. So some continued to oppose peace treaty with the Later Jin.
‘Rebellion of Lee In-geo(李仁居)’ occurred in September, 1627 just after the Later Jin invasion of Joseon was the first rebellion to oppose peace treaty with the Later Jin. Lee In-geo resented peace treaty with the Later Jin and called himself ‘ChanguiJoongheung Daejang(倡義中興大將)’, and said that he would gather up the military and go up to Seoul to punish retainers of group to oppose war(主和派) and fight with the Later Jin in Uijoo(義州). However, Jin Geuk-il(陳克一), a Confucian without official rank in Hoengseong(橫城) and Hong Bo(洪寶), the governor of Wonju(原州牧使) informed situation of rebellion to the Court. Especially, Hong Bo gathered soldiers before taking action by the Court and caught Lee In-geo.
In the process of investigation on group of Lee In-geo, there was a statement that “a true lord(眞主) exists”. But he overlooked this statement. This is because he did not want to get royal clansmen to suffer in regards to the rebellion of Lee In-geo.
On the other hand, so called ‘the rebellion of Yoo Hyo-lip(柳孝立)’ occurred in January, 1628(Injo 6). Yoo Hyo-lip etc., saying secret orders of Queen Mother and King Gwanghaegun, made Gwanghaegun another King and tried to have the honor of having Inseonggun(仁城君) as King. Injo ordered to burn statement to describe crime related to Yoo Hyo-lip to protect royal clansmen again. To Injo, it was no different from ‘Deposing mother and killing younger brother(廢母殺弟)’ of Gwanghaegun to punish royal clansmen only with simple statement and rebel’s statement.
However, there was a statement that “a true lord exists” in regards to the rebellion of Lee In-geo. In the rebellion of Yoo Hyo-lip, he tried to have the honor of having Inseonggun as King. So public opinion at the time recognized that the two events were connected. As a result, investigation was made again on the group of Lee In-geo who stated that “a true lord exists”. In the end, Injo ordered exile and then suicide to Inseonggun.
Since then, Injo held Hoimaengje(會盟祭) together with Somu meritorious retainers(昭武功臣) who contributed to suppress the rebellion of Lee In-geo and Nyeongsa meritorious retainers(寧社功臣) who contributed to suppress the rebellion of Yoo Hyo-lip etc. Two Nokhoons were integrated to one, 『Somunyeongsarokgwon Dogamuigwe(昭武寧社錄券都監儀軌)』.
As the result of the Later Jin invasion of Joseon, Joseon could not discuss longer about criticism on Gwanghaegun’s betray of ‘Grace to save ruined nation(再造之恩)’ which was justification for Injo coup. Rebellion of Lee In-geo(李仁居) just after the Later Jin invasion of Joseon painfully pointed out self-contradiction of subject forces for Injo coup. And in the rebellion of Lee In-geo, rebellion of Yoo Hyo-lip etc., Inseonggun who was one of royal family was killed based on simple statement and rebel’s statement. This overshadowed criticism on ‘Deposing mother and killing younger brother(廢母殺弟)’ of Gwanghaegun which was another great justification. This also made lose cause of Injo coup.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조선은 後金과 형제관계의 맹약을 맺었다. 그러나 후금과의 맹약은 인조반정의 명분 중 하나였던 광해군의 대외정책에 대한 비판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후금과의 강화에 반대하는 주장이 계속되었다.
1627년 9월에 발생한 ‘이인거의 난’은 정묘호란 직후 후금과의 강화에 반대하여 일어난 최초의 역모 사건이었다. 이인거는 후금과의 강화에 분개하여 스스로 ‘倡義中興大將’이라 하고는 군사를 모아 서울로 올라가 主和派 신료를 처단하고 義州로 나가 후금을 막겠다고 성언하였다. 그렇지만 橫城의 幼學이었던 陳克一과 原州牧使 洪寶가 반란의 정상을 조정에 알렸고, 특히 홍보는 조정의 조치 전에 군병을 모아 이인거를 붙잡았다. 인조는 이인거의 무리를 취조하는 과정에서 “眞主가 있다”는 진술이 나와 문제가 되었음에도 이러한 진술을 묵과하였다. 인조는 이인거의 난과 관련되어 종친이 피해를 입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한편 1628년(인조 6) 1월에는 소위 ‘柳孝立의 난’이 발생하였다. 유효립 등은 대비와 광해군의 밀지를 운운하며 광해군을 上王으로 삼고 仁城君을 추대하고자 하였다. 인조는 유효립의 공초를 불태우라고 명령함으로써 또다시 종친을 보호하려고 하였다. 인조에게 있어 단순한 고변과 역적의 진술만으로 종친을 처벌한다는 것은 광해군의 ‘廢母殺弟’와 다름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인거의 난’에서 “진주가 있다”라는 진술이 나오고, 유효립의 난에서 인성군 추대 시도가 나오면서, 당시의 여론은 두 사건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인식하였다. 따라서 “진주가 있다”고 진술하였던 이인거의 무리에 대한 재국문이 이루어졌다. 결국 인조는 부득이 인성군의 유배와 자결을 명하였다.
이후 인조는 이인거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昭武功臣과 유효립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寧社功臣 등과 함께 會盟祭를 거행하였으며, 두 차례의 녹훈을 한 차례로 하여 『昭武寧社錄券都監儀軌』를 만들었다.
정묘호란의 결과 조선은 인조반정의 명분이었던 광해군의 ‘再造之恩배반’이라는 비판을 더 이상 논할 수 없게 되었다. 정묘호란 직후 일어난 이인거의 난은 인조반정 주체 세력들의 자기모순을 뼈아프게 지적한 셈이 되었다. 그리고 이인거의 난과 유효립의 난 등 역적의 고변과 진술만으로 왕실의 일원인 인성군을 죽인 것은 인조반정의 또 다른 대명분이었던 광해군의 ‘폐모살제’에 대한 비판을 무색하게 만들었고 인조반정의 명분을 스스로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었다.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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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6-02-26 | 학술지명변경 | 외국어명 : The History of Seoul -> Seoul and History | KCI등재 |
2016-02-03 | 학술지명변경 | 한글명 : 鄕土서울 -> 서울과 역사외국어명 : The Hyangto Seoul -> The History of Seoul | KCI등재 |
2015-10-22 | 학회명변경 | 한글명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 서울역사편찬원영문명 : The City History Compilation Committee Of Seoul -> Seoul Historiography Institute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9-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7-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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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27 | 0.27 | 0.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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