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I등재
광해군대의 궁궐 경영과 풍수지리설 = Feng shui and the Palace Construction in the Reign of Prince Gwanghae
저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12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발행기관 URL
수록면
225-256(32쪽)
KCI 피인용횟수
9
제공처
During the reign of Prince Gwanghae, several palaces like Changgyeong, Ingyeong and Gyeongdeok were constructed or repaired. Even when one considers the fact that Gyeongbok, Changdeok, and Changgyeong Palaces were entirely destroyed by fire during the 1592 invasion of Hideyoshi, the palace construction was done unusually frequently. The Prince rebuilt the burnt palaces and tried to construct two new palaces, at the same time. This caused a severe controversy in his government and he had to face a strong opposition derived from the financial difficulty caused by the war but he carried out his original intention.
There were various reasons for this situation but the Prince’s belief in Feng Shui was a key factor. He was interested in Feng Shui under the influence of his father, King Seonjo. The King took an interest in Feng Shui since the war. He thought that the location of the capital or palaces had a certain connection with the war, therefore Feng Shui became the principle of his capital reconstruction plan. Even though the King’s plan had not been profoundly conducted, Feng Shui became widely prevailed at the time.
The Prince Gwanghae became interested in Feng Shui with a different reason from his father. It was the weak justification for his enthronement. He was reluctant to live in Changdeok Palace cause the palace was where King Danjong and Prince Yeonsan were dethroned. So he tried to justify his enthronement with Feng Shui. His plan to transfer the capital to Kyoha under the name of the decline of the capital Hanyang’s fortune reveals his intention. His simultaneous constructions of Ingyeong and Gyeongdeok Palaces in spite of strong opposition of his merits also shows his belief in Feng Shui. The construction of Gyeongdeok Palace was especially inspired by the rumor of King’s fortune in Saemun village.
The King and Prince’s interest in Feng Shui and its various applications, caused a strong interest in Feng Shui among gentries as well. Feng Shui in fashion at the time was a superstitious one which ws the principle of the grave spot selection. Gentries’ concern for Feng Shui could also have been cause by the Japanese invasion, but it is more likely to had been inspired the sovereigns’ belief in a superstitious Feng Shui. Even though concerns were raised on the wide spread of a superstitious Feng Shui, but the wide interest in Feng Shui was consistently dispersed.
광해군대에는 창경궁의 보수 공사를 비롯하여 인경궁․경덕궁의 창건 등 여러 차례에 걸쳐 궁궐 조성 사업이 이루어졌다. 임진왜란으로 기존의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이 모두 소실되어 궁궐 재건이 불가피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광해군대에 추진된 이러한 궁궐 공사는 정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광해군은 기존 궁궐의 복원 사업을 추진하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두 궁궐을 동시에 조성하여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을 겪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은 상태라 공사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광해군은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다.
광해군대에 궁궐 공사가 집중적으로 추진된 데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특히 풍수지리설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광해군은 풍수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는 부친 선조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었다. 선조는 임진왜란을 겪은 것을 계기로 풍수지리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양 내지 궁궐의 풍수와 전란 사이에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선조는 전란으로 파괴된 한양을 재정비하고 궁궐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풍수설을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계획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였지만 선조대 후반의 이러한 상황은 이후 풍수설이 유행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광해군의 경우 선조와는 다른 이유에서 풍수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바로 취약한 정통성 때문이었는데 이는 단종과 연산군이 폐위된 곳이라는 이유로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던 데서 엿볼 수 있다. 광해군은 풍수설을 통해 자신의 취약점을 보완하고자 하였다. 한양의 기운이 다했다는 풍수가의 주장에 동조하여 交河로의 천도를 계획한 것은 그 대표적인 시도였다. 또 풍수적인 이유로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경궁과 경덕궁 공사를 동시에 강행하였다. 특히 경덕궁 공사의 경우 ‘새문동 왕기설’에 자극받아 공역을 재촉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선조와 광해군이 풍수설에 관심을 갖고 이를 궁궐 공사를 비롯한 여러 사업에 활용하면서 사대부들 사이에도 풍수설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유행한 풍수는 신비적인 속성이 강한 음택 풍수였다. 사대부들이 풍수설에 관심을 갖게 된 데는 왜란의 영향도 적지 않았겠지만 국왕이 신비주의적 풍수를 신봉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신비적인 풍수설의 확산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풍수지리설의 유행을 막기는 힘들었다.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
2027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1-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1-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9-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4-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3-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2-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1999-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2016 | 0.87 | 0.87 | 0.96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97 | 0.98 | 2.253 | 0.44 |
서지정보 내보내기(Export)
닫기소장기관 정보
닫기권호소장정보
닫기오류접수
닫기오류 접수 확인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확인
닫기이용약관
닫기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약관 (2017년 1월 1일 ~ 현재 적용)
학술연구정보서비스(이하 RISS)는 정보주체의 자유와 권리 보호를 위해 「개인정보 보호법」 및 관계 법령이 정한 바를 준수하여, 적법하게 개인정보를 처리하고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에 「개인정보 보호법」 제30조에 따라 정보주체에게 개인정보 처리에 관한 절차 및 기준을 안내하고, 이와 관련한 고충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개인정보 처리방침을 수립·공개합니다.
주요 개인정보 처리 표시(라벨링)
목 차
3년
또는 회원탈퇴시까지5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3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2년
이상(개인정보보호위원회 : 개인정보의 안전성 확보조치 기준)개인정보파일의 명칭 | 운영근거 / 처리목적 | 개인정보파일에 기록되는 개인정보의 항목 | 보유기간 | |
---|---|---|---|---|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자 가입정보 파일 | 한국교육학술정보원법 | 필수 | ID, 비밀번호, 성명, 생년월일, 신분(직업구분), 이메일, 소속분야, 웹진메일 수신동의 여부 | 3년 또는 탈퇴시 |
선택 | 소속기관명, 소속도서관명, 학과/부서명, 학번/직원번호, 휴대전화, 주소 |
구분 | 담당자 | 연락처 |
---|---|---|
KERI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정보보호본부 김태우 | - 이메일 : lsy@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439 - 팩스번호 : 053-714-0195 |
KERI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개인정보보호부 이상엽 | |
RIS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대학학술본부 장금연 | - 이메일 : giltizen@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149 - 팩스번호 : 053-714-0194 |
RIS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학술진흥부 길원진 |
자동로그아웃 안내
닫기인증오류 안내
닫기귀하께서는 휴면계정 전환 후 1년동안 회원정보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으신 관계로 개인정보가 삭제되었습니다.
(참조 : RISS 이용약관 및 개인정보처리방침)
신규회원으로 가입하여 이용 부탁 드리며, 추가 문의는 고객센터로 연락 바랍니다.
- 기존 아이디 재사용 불가
휴면계정 안내
RISS는 [표준개인정보 보호지침]에 따라 2년을 주기로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관하여 (재)동의를 받고 있으며,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휴면계정으로 전환됩니다.
(※ 휴면계정은 원문이용 및 복사/대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휴면계정으로 전환된 후 1년간 회원정보 수집·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RISS에서 자동탈퇴 및 개인정보가 삭제처리 됩니다.
고객센터 1599-3122
ARS번호+1번(회원가입 및 정보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