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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전반 滿洲로 歸附한 조선인들 - 『八旗滿洲氏族通譜』를 중심으로 - = Naturalized Koreans into Manchu (滿洲) in Early Seventeenth Century
저자
우경섭 (인하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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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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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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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10(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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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7세기 전반 한반도 서북 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이 만주로 귀화하여 청조의 유력 가문으로 성장해 간 사례에 대한 연구이다.
첫 번째 韓雲(韓潤)과 韓尼(韓澤) 형제는 1624년 일어난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망명한 경우로, 만주 귀화의 동기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사례이다. 반란의 주모자 韓明璉이 伏誅된 뒤 후금에 망명한 아들 한운과 조카 한니는 귀화 직후부터 조선 국경의 수비 상황을 토설하고 조선 정벌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등, 적국 후금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가문의 기반을 닦아 갔다. 그리고 정묘호란의 선두에 서서 의주를 함락시키는데 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강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조선에 대한 재침을 건의하는 등 후금 내부의 반조선 의식을 주도하였다. 또한 그들의 후손들 역시 청조가 북경에 입성하고 차하르와 복건 지방을 정벌하는 과정에 참여하여 대대로 관작을 세습해 감으로써, 한운 일가는 만주 지역 조선인들 중 유력 가문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두 번째 新達理(金汝圭) 가문은 귀화 경위가 분명하지 않지만, 일개 귀화인이 만주에 정착하여 名閥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1620년대 평안도 일대를 휩쓸던 毛文龍 세력의 횡포를 피하여 형제들을 이끌고 후금으로 귀화한 것으로 보이는 신달리는 조선 출신 통사관들의 반후금 활동을 고발함으로써 만주족의 신임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신달리 자신이 병자호란의 선봉에서 강화도를 함락시키는데 기여하였고 그의 형제ㆍ자손들 또한 征明戰의 과정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움으로써, 후금에 귀화한 조선인들 가운데 단연 두각을 나타내며 八旗의 상층부로 도약할 기반을 마련하였다.
신달리 가문은 17세기 후반~18세기에 이르러 청조의 중앙관직에 오른 후손들을 배출하기 시작하였다. 신달리의 손자 金常明은 강희ㆍ옹정ㆍ건륭 세 황제를 섬기며 정1품 領侍衛內大臣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그는 황실의 신임을 바탕으로 조선과 청나라의 외교 사안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며, 영조의 世弟冊封 및 仁祖反正 辨誣事를 해결하는데 막후에서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신달리의 동생 三達理의 증손인 金簡의 경우 工部尙書와 吏部尙書를 역임하며 『四庫全書』 편찬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로, 그의 누이동생은 건륭제의 총애를 받던 后妃 淑嘉皇貴妃였다. 황실의 외척으로서 청조의 핵심부에 위치했던 김간은 정조 즉위 직후 조선에서 보낸 討逆奏文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조선 측 입장을 대변하여 그 처리를 주선하는 등, 조선의 대청외교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김간의 아들 金縕布 역시 戶部尙書에 오를 정도로, 18세기 후반 신달리의 집안은 명실상부한 遼左名家이자 高麗望族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이후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기까지 조선에 가장 심대한 영향을 미친 외부세력은 청나라였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면 한운과 신달리 같은 17세기 전반 ‘附虜人’들의 활동은 분명 주목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조ㆍ청 관계의 부침에 따라 다중적 정체성을 드러내었던 그들 附虜人들의 행적을 발굴하고 범주화하는 작업은 一國史의 시야에 갇혀 당쟁의 차원에서 조선후기 정치사를 해석하던 관점에서 벗어나, 동아시아 역사의 전개 과정 속에서 조선왕조가 겪어야 했던 국제적ㆍ국내적 위기를 정합적으로 이해하는데 작은 실마리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This research is a case study on the Northwestern Koreans who were naturalized into Manchu and became one of influential family under the Q'ing dynasty in early seventeenth century.
The Hanyun(韓雲)ㆍHanni(韓尼) brothers, the first case, had been implicated in the Yi Kwal's revolt in 1624 and fled to Manchu. This fact made their motives clearly known. Since naturalized, they firmly settled their family with collaboration with the Later Jin (後金) dynasty, the collaboration such as reporting Chosun's borderline defense system to Manchu leaders and rallying causes to invade Chosun. They led the first invasion of Chosun (丁卯胡亂) and contributed to the occupation of Uiju(義州), a borderline town. Even after the peace treaty, they continuously demanded invasion of Chosun, hawkish attitude that made them leading anti-Chosun figures. Their offspring also participated in Q'ing's occupation of Beijing(北京) and expeditions to Chakhar(察哈爾) and Fujian(福建) so that they could inherit officialdom and become powerful family among Manchu Koreans for generations.
While the second case, Xindali(新達理) family is not clear in their motives to go to Manchu, it is an exemplary case that a low-profile person settled and arose as a distinguished family in Manchu. It seems that he moved to the Later Jin in order to avoid the Maowenrong(毛文龍) force who prevailed over Northwest Chosun in the 1620s. He secured Manchu's trust while accused Korean translators of their anti-Later Jin activities. Xindali himself became a spearhead in the second Manchu invasion of Chosun (丙子胡亂) and contributed to the Kanghwa(江華) Islands. His brother and descendants also achieved military exploits in a war against Ming dynasty, the merits that made his family stand out among Manchu Koreans and prepared a road to the upper class in the Eight Banners Division (Baqi, 八旗).
Xindali family began to produce high officials in Q'ing dynasty around late seventeenth and eighteenth century. For example, Xindali's grand son, Jinchangming(金常明) served three emperors such as Kangxi, Yongzheng, and Qianlong while reaching the highest official. Xindali's brother, Sandali(三達理) had a great-grandson, Jinjian(金簡) who initiated a project of the Imperial Collection of Four (Siku Quanshu, 四庫全書) publication under Qianlong emperor while he became Minster to the Board of Works(工部尙書) and Minister to the Board of Civil Appointments (吏部尙書). His sister was the queen (后妃 淑嘉皇貴妃), who was beloved by Qianlong. With the deep trust on the part of the Q'ing court, they could exert great influence upon Q'ing and Chosun diplomacy and somewhat helped Chosun's diplomacy vis-a-vis Q'ing dynasty.
From 1637 just after Q'ing invasion of Chosun, to 1894, the first Sino-Japanese War, the biggest influential factor to Chosun dynasty had been Q'ing dynasty. Considering this fact, "collaborators with barbarians (附虜人)" such as Hanyun and Xindali in the early seventeenth century might draw attention from historians. They show multiple identities with the fluctuation of the Chosun and Q'ing relation. A research into these "collaborators" would shed some lights on more comprehensive understanding of the domestic and international crisis that Chosun dynasty had to face among the East Asian history rather than the limited one nation and political history centering on factional strife.
분석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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