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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후戰 이후 朝明·朝金關係와 林畔之變 - 광해군 外交의 성격과 政局의 변화를 포함하여 - = After the Battle of Sarhu: Joseon–Ming, Joseon–Later Jin Relations and the Imban Incident (林畔之變)
저자
한명기 (명지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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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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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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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158(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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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년 3월 사르후전 이후에도 명과 후금의 군사적 대결이 이어지면서 조선은 2중의 외압에 직면했다. 연패하여 수세에 처한 명은 조선을 활용하여 후금을 견제하려는 以夷制夷策에 더욱 집착했다. 칙사 등을 보내 조선을 회유하고 감시하면서 재징병을 종용하는 한편, 여의치 않자 監護論을 흘리는가 하면 1621년 遼陽 실함 이후에는 모문룡이 아예 조선으로 밀고 들어왔다. 연승하여 기세가 등등해진 후금도 조선에 대한 압박 수위를 점점 높였다. 사르후전 무렵에는 조선에 ‘중립’을 강조하더니 이후 화친을 내세우면서 國書와 差官을 파견하라고 요구했다. 요양 장악 이후에는 遼民 송환과 모문룡 박송을 요구하더니 광녕 점령 무렵에는 조선을 아예 명으로부터 떼어내려고 시도했다.
광해군은 사르후 전투 패전 이후 계속 ‘명에 정성으로 사대하고 후금에 계책으로 기미한다’고 표방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사르후전에 파병할 당시부터 사실상 형세를 보고 변화에 대응하는 觀勢應變의 자세를 보였다. 그것은 사르후 패전 이후 명과 후금의 대결을 관망하고 승패를 주시하는 자세로 구체화되었다. 사르후 패전 이후 명의 재징병 요구는 물론 명군의 조선 진입도 단호히 거부했던 것, 후금의 국서에 답하고 차관을 파견하라고 강조하고 후근 사신들을 우대하라고 역설했던 것은 전형적인 관세응변의 행동이었다.
비변사 신료들은 事大는 형세와 승패에 관계없이 일관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요양 실함 이후에는 명의 원조 요청에 더욱 강한 거부의 자세를 보인다. 이 상황에서 모문룡이 돌발적으로 진입해 온 것은 광해군의 ‘관세응변’ 구상을 흔들어 놓았다.
모문룡이 진입하고 임반지변이 일어났을 때 광해군이나 그의 측근들이 보였던 대응은 광해군이 후금과 내통했거나 화친하려 했다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고 보인다. 광해군은 임반지변과 광녕 함락을 계기로 조선과 명이 후금을 감당할 수 없다고 확신했던 것으로 보인다. 명 사신 梁之垣에게 막대한 뇌물을 주면서도 병력과 군량 제공을 거부한 것은 이 같은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이제 후금을 다독여 침략을 막는 데 집중했고, 명과의 관계는 부차적인 것으로 인식했다.
폐모론을 주도함으로써 권력의 정점에 올랐던 이이첨은 사르후전 척화론을 내세워 광해군의 대후금 정책에 도전했다. 광해군은 이에 폐모론 이후 이이첨 중심으로 굳어진 政局 지형을 바꾸려고 시도했다. 이 때 중용된 朴承宗, 朴燁과 鄭遵, 李廷龜, 李時發, 韓浚謙 등이 外交와 邊務를 주도했다. 이이첨과 대북파는 ‘討逆論’을 내세워 이정귀 등을 탄핵하고 광해군의 신임을 되찾으려 시도했지만 광해군은 거부했다. 사르후전 이후 대외정책의 방향을 놓고 광해군과 이이첨의 밀착이 깨진 것은 인조반정 주체들에게는 행운이었다.
요컨대 사르후전 이후 몰락할 때까지 광해군이 취한 대외정책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철저하게 형세(-승패)를 살펴 향배를 정하려는 觀勢應變策이었다고 할 수 있다.
Even after the Battle of Sarhu in March 1619, as the military confrontation between Ming and Later Jin continued, Joseon faced a dual external pressure. The Ming, suffering repeated defeats and forced onto the defensive, became even more fixated on a policy of “using barbarians to control barbarians” (以夷制夷), seeking to restrain Later Jin by leveraging Joseon. The Ming dispatched imperial envoys and others to conciliate and monitor Joseon while urging renewed conscription; when this did not go as desired, it floated arguments for “guardianship” (a supervision/protectorate plan). After the fall of Liaoyang in 1621, Mao Wenlong(毛文龍) even pushed directly into Joseon.
Later Jin, emboldened by successive victories, also steadily raised the level of pressure on Joseon. Around the time of Sarhu it had emphasized Joseon’s “neutrality,” but afterward it invoked peace and demanded that Joseon send a state letter and an official envoy. After securing Liaoyang, it demanded the repatriation of Liaodong refugees and the expulsion of Mao Wenlong; around the time it occupied Guangning, it went further and attempted to detach Joseon outright from the Ming.
After his defeat in the Battle of Sarhu, King Gwanghaegun continued to proclaim that he would “serve the Ming with utmost sincerity as a tributary state while managing relations with Later Jin through strategy and calculation.” In reality, however, from the time he first dispatched troops to the Sarhu campaign, he had already adopted a stance of gwanse eungbyeon (觀勢應變) — observing the balance of power and responding flexibly to changes. After the defeat at Sarhu, this took concrete shape in his attitude of watching the confrontation between Ming and Later Jin from the sidelines and carefully monitoring which side would prevail. His firm refusal not only of the Ming court’s renewed demands for conscripted troops but also of allowing Ming forces to enter Joseon territory, his insistence on replying to Later Jin’s state letters and sending envoys, and his repeated calls to treat Later Jin envoys generously were all classic examples of such a gwanse eungbyeon posture.
Officials of the Bibyeonsa (Border Defense Council) emphasized that sadae—serving the suzerain—ought to remain consistent regardless of the balance of power or the fortunes of war. Gwanghaegun, however, adopted an increasingly resolute stance of refusing Ming requests for aid after the loss of Liaoyang. In this situation, the sudden incursion of Mao Wenlong into Joseon seriously disrupted Gwanghaegun’s carefully laid gwanse eungbyeon design.
The way Gwanghaegun and his close associates responded when Mao Wenlong entered and the Imban Incident (林畔之變) broke out was sufficient to arouse suspicion that Gwanghaegun had been in secret communication with Later Jin or was seeking peace with them. It appears that, taking the Imban Incident and the fall of Guangning as a turning point, Gwanghaegun became convinced that Joseon and Ming together could no longer cope with the power of Later Jin. It was against this backdrop that he, while bestowing enormous bribes upon the Ming envoy Liang Zhiyuan(梁之垣), nonetheless refused to provide troops or military provisions. From this point, he focused on placating Later Jin in order to prevent invasion, and came to regard relations with Ming as of secondary importance.
Yi I-cheom (李爾瞻), who had risen to the apex of power by leading the movement to depose the queen mother (the p’emo-ron), challenged Gwanghaegun’s Later Jin policy by advancing a hardline cheokhwa-ron (policy of “rejecting peace”) in connection with the Sarhu campaign. In response, Gwanghaegun sought to reshape the political landscape that had solidified around Yi I-cheom after the p’emo-ron. At this time, figures such as Park Seungjong (朴承宗), Pak Yeop (朴燁), Jeong Jun (鄭遵), Yi Jeonggwi (李廷龜), Yi Sibal (李時發), and Han Jungye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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