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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왕의 유토피아, 베르사유 = The Utopia of Sun King, Versailles
저자
정동준 (대진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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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연도
2015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61-10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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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공처
The Utopia of Sun King, Versailles
Dong-Jun Jeong
The aim of this article is to explain how Louis XIV attain a sure footing for an absolute royal authority.
During 3 decades from 1559, three french kings were murdered in Paris or the vicinity of the city. The death of the kings was without fail caused the Queens’ Regency, preceded by her young son in the throne. The Regency was backed up by prime ministers, like Concini, Richelieu and Mazarin. For this reason Louis XIV was left in negligence for a long time, without attendance and education, in a precarious situation under 18 years’ Regency.
Another factor threatening the royal throne was Paris, Parisian Nobleman and Parisian people. According to New Town Planning of the late kings, mansions of the noblemen besieged King’s Palais des Tuileries. During the Frondes, Parisian noblemen stirred up a mob or mobilized the armed force, to menace the throne. The king, through the experience of Frondes, made a firm determination on his direct governance.
When Premier Mazarin died in 1661, Louis XIV He did not elect a prime minister, and announced his own direct governance. His first act as the governor was to purge Nicolas Fouquet, the most powerful nobleman, with the help of Colbert. Then he wanted to build up a new space for politics, culture and Arts outside Paris, with himself as the center. The king summoned local Construction Participants in Fouquet’s Vaux le Vicomte Chateau and garden(Le Notre, Le Vau and Le Brun) to Versailles. With them, Louis reared an architectural Utopia at this place, reflecting Italian Baroque style. Construction of this Utopia, Versailles Palace and Garden was the manifestation of king’s strong will to differentiate himself from his noblemen.
Louis XIV also made a plan for an uncomfortable cohabitation at Versailles with noblemen as the consumer class. The menacing noblemen were called to the royal palace and they became “courtisans” with lower nobles, clergies and bourgeois. The new courtisans did not belong to a single hierarchy, so they were divided, conflicting with each other. Furthermore, they were induced to luxury and excess spending for boasting of their social status and rank. Consequently, they became dependent on the financial support from their lord, Louis XIV. And the king prepared a <court etiquette>, creating the guide manuals for court society. The courtisans’ daily routine was controled according to regulations and timetable fixed by this <etiquette>. So it was highly useful system for the domination over the courtisans by the King. This system comprised several manuals such as <wake-up ceremony>, <diner ceremony>, working perfectly anywhere and at anytime like an accurate mesh in Versailles.
Whether Louis XIV was an absolute monarch or not, is actively debated these days. Whether the bureaucracy operated will become the assessment criteria on the contrasting assessments on him. Nevertheless, from the dimension of strengthening the royal power, Louis XIV was a successful king. He build up Europe’s best palace and garden. By operating the software named <etiquette>, he made the noblemen as his meek followers. And he was on the peak of the utopia, established by the <etiquette>.(Daejin University)
태양왕의 유토피아, 베르사유
정 동 준
본 논문의 목적은 루이 14세가 어떻게 절대군주정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1559년부터 30년 동안 3명의 프랑스 군주들이 파리 또는 파리 인근에서 살해당하였다. 국왕의 사망 뒤에는 어김없이 왕좌에 오른 어린 아들을 앞세운 황후의 섭정이 뒤따랐다. 섭정은 콘치니, 리슐리외, 마자랭과 같은 재상들의 지원 아래에 ㅇ유지되었다. 이런 이유로 루이 14세는 오랫동안 존재감 없는 국왕으로 남아 있었으며, 18년 동안 관심이나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왕권을 위협하는 또 다른 요소는 파리, 파리의 귀족들 그리고 파리 시민들이었다. 과거 국왕들의 새로운 도시계획에 따라, 국왕이 머무는 튈르리 왕궁은 귀족들의 저택들로 포위되었다. 프롱드 난 사이에 파리의 귀족들은 폭동을 부추기거나 군대를 동원하여 왕권을 위협하였다. 프롱드 난을 겪으면서 국왕은 자신이 직접 통치를 하겠다는 친정(親政)의 의지를 굳혔다.
1661년 마자랭 재상이 사망하자, 루이 16세는 재상을 임명하지 않았고, 친정을 선언하였다. 그가 통치자로서 한 첫 번째 행동은 콜베르의 도움을 받아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귀족인 니콜라 푸케(Nicolas Fouquet)를 숙청하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국왕은 파리를 벗어난 곳에 정치, 문화, 예술을 위한 새로운 공간 - 그 공간의 중심에 국왕 자신이 위치하는 –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그는 푸케의 보르비콩트 성(城)과 정원을 건설하는 데에 참석한 르 노트르, 르 보, 르 브룅을 소환하여, 베르사유의 건설에 투입하였다. 루이 14세는 이탈리아의 바로크 건축양식을 반영하여, 베르사유에 자신의 유토피아를 수립하였다. 베르사유의 왕궁과 정원의 건설은 자신과 귀족들을 차별화시키려는 그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또한 루이 14세는 베르사유에서 순수 소비계층인 귀족들과의 불편한 동거를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위협적인 대귀족들은 하급귀족들 성직자들 그리고 부르즈와들과 함께 왕궁으로 초대되어, 궁정인이 되었다. 새롭게 구성된 이 궁정인들은 하나의 단일 계급으로 정리될 수 없었고, 그래서 그들은 분열되고 서로 갈등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적인 서열과 지위를 과시하기 위하여 사치와 낭비를 하여야 하였다. 결국 이들은 자신들의 군주인 루이 14세로부터의 금전적인 지원에 매달려야 하는 예속적인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국왕은 베르사유를 위한 매뉴얼인 <궁정예법>을 마련하였다. 궁정인들의 하루 일과는 이 <궁정예법>에 의하여 마련된 규정, 일정에 따라 통제되었다. 그러므로 <궁정예법>은 국왕이 궁정인들을 제압하는 시스템으로서 매우 효과적이었다. <궁정예법> 시스템은 <기상의식> <식사의식> 등과 같은 여러 매뉴얼로 구성되어, 어디에서건 어느 때이건 정교한 그물처럼 베르사유에서 작동하였다.
루이 14세가 절대군주였는지 아닌지는 요즈음 논란거리이다. 또한 국왕이 관료제를 꿰뚫고 있었는지 아닌지도 확실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권강화의 측면에서 본다면, 루이 14세는 성공한 왕이었다. 그는 유럽 최고의 왕궁과 정원을 건설하였다. <궁정예법>이라는 소프트웨어를 작동시킴으로써, 국왕은 귀족들을 자신의 온순한 순종자들로 만들었다. 그리고 <궁정예법>에 의해 확립된 유토피아의 정점엔 루이 14세가 있었다.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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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8-12-28 | 학회명변경 | 한글명 : 한국서양문화사학회 -> 한국세계문화사학회영문명 : The Korean Society Of Western Civilization -> Korea Association of World History and Culture | KCI등재 |
2018-12-27 | 학술지명변경 | 한글명 : 서양 역사와 문화 연구 -> 세계 역사와 문화 연구외국어명 : Journal of Western History and Culture -> World History and Culture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6-12-30 | 학술지명변경 | 한글명 : 서양사학연구 -> 서양 역사와 문화 연구외국어명 : Journal of Western History -> Journal of Western History and Culture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9-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7-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2016 | 0.3 | 0.3 | 0.34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32 | 0.29 | 0.671 | 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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