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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말기 仁川陸軍造兵廠의 地下化와 강제동원 피해 = At the end of the Japanese colonial rule, the undergroundization of the Incheon Army Arsenal and the damage of forced mobil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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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 연구(Journal of Korean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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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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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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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214(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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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perialist Japan built the Incheon Army Arsenal to continue the Second Sino-Japanese War. the Incheon Army Arsenal was established in 1939, was officially organized in December 1940, and opened in May 1941. The Incheon Army Arsenal mainly produced rifles and bullets, and also made bayonets, various ammunition, grenades, automobiles, aircraft parts, and submarines. However, after 1943, the war situation worsened and the Japanese archipelago and the Korean Peninsula were attacked directly by the U.S. forces in early 1945, changing the role and organization of the army’s arsenal in Incheon. Although there was no major change in the production weapon itself, the scale and method of production were changed according to the so-called mainland decisive battle policy. The biggest change was the undergroundization of major production facilities. The undergroundization of the Incheon Army Arsenal was specifically planned in March 1945. The main goal was to hide major production facilities in underground facilities that were horizontally excavated in the mountains near Bupyeong. The total size of the undergroundization facility, including underground and semi-underground facilities, was 15,112m2, and the cost was 53,824,500 won. The Japanese forcibly mobilized a large number of Koreans to make the arsenal underground. According to the mobilization plan prepared by the Incheon Army Arsenal, 4,000 people will be required to construct the underground facility, and 11,000 additional people will be mobilized to the headquarters and the Pyongyang Plant to operate the arsenal following the decisive battle on the mainland. In particular, it was planned to relocate the bullet facilities of the Tokyo 1st Arsenal to the underground facility of the Incheon Army Arsenal. This meant that the Japanese imperialism shifted responsibility and damage to Joseon for the war of aggression. Since the U.S. military was stationed at the Incheon Army Arsenal after liberation, and until recently, the Eighth Army Camp Market was located, various historical facts related to the Arsenal had sunk to the bottom of the water. In the future, the continuous investigation and research of the ruins related to the underground arsenal, and the investigation of the damage caused by forced mobilization should be continued.
더보기제국주의 일본은 중일전쟁을 지속하기 위해 인천육군조병창을 건설하였다. 인천육군조병창은 1939년 건설 계획이 수립되었고, 1940년 12월 공식 편성되었으며, 1941년 5월 문을 열었다. 인천육군조병창에서는 소총과 실포를 주로 생산하였으며, 총검과 각종 탄약, 수류탄, 자동차, 항공기 부품, 잠항정 등도 만들었다. 그런데 1943년 이래 전황이 악화되고, 급기야 1945년 초 미군에 의해 일본 열도는 물론 한반도가 직접 공격의 대상이 되자 인천육군조병창의 역할과 조직에 변화가 생겼다. 생산 병기 자체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생산 규모와 방식을 이른바 본토결전 방침에 맞춰 변경하게 되었던 것이다. 가장 큰 변화는 주요 생산시설의 지하화였다. 인천육군조병창의 지하화는 1945년 3월 구체적으로 계획되었다. 주요 생산시설을 부평 인근의 산지에 수평으로 굴착한 지하시설에 은닉하는 것이 골자였다. 지하와 반지하시설 등을 포함한 지하화 시설의 총 규모는 1만 5,112m2였으며, 소요 경비는 5,382만 4,500원이었다. 일제는 조병창의 지하화를 위해 수많은 조선인을 강제동원하였다. 인천육군조병창 측이 작성한 동원 계획에 따르면 지하시설 건설을 위한 인력이 4,000명, 본토결전에 따른 조병창 운영을 위해 본부와 평양제조소에 추가로 동원할 인력이 1만 1,000명에 달했다. 특히 인천육군조병창의 지하시설에는 도쿄 제1조병창의 실포 설비를 이전할 계획이었는데 이것은 일본 제국주의가 침략전쟁에 대한 책임과 피해를 조선에 전가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해방 이후 인천육군조병창에는 미군이 주둔했고 최근까지도 미8군의 캠프 마켓이 자리했던 까닭에 조병창과 관련된 여러 역사적 사실들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었다. 향후 조병창 지하화와 관련한 유적의 지속적인 조사와 연구,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규명이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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