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기 신라의 天下觀과 對日認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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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연도
2003년
작성언어
Korean
자료형태
한국연구재단(NRF)
신라는 377년(내물 22) 前秦에 사신을 파견하여 최초로 중국과의 교섭을 시작하였고, 진흥왕대에 한강 유역을 확보하여 직접 남북조 왕조들과 교류하면서 이후로는 중국 왕조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빈번하게 교섭했다. 天子國과 제후국의 제도, 격식과 그 차이에 대한 인식도 이 과정에서 형성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
우선 신라는 중국 왕조에 대해서는 詔, 朕, 勅, 皇帝, 崩, 陛下, 天子 등 천자국 예법의 용어를 철저히 따르고 있다. 그러나 당시 신라에서 漢 왕조의 世系나 年號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있었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이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편찬시 撰者가 끼워넣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유사』 王曆에 보이는 중국 황제 명칭도 마찬가지다. 상고기의 관련 자료가 드문 것은 이 시기에 중국과의 접촉이 빈번하지 않았고 따라서 천자국 제도에 대한 신라측의 인식도 불완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진흥왕대 이후는 천자국 예법에 쓰이는 용어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금석문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중국 왕조에 대한 천자국 대우는 진덕왕대에 중국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통일전쟁에서 唐과 연합하면서 강화되어 나갔다. 이와 궤를 같이하면서 신라는 국내외적으로, 특히 대중국관계에 있어서 제후국 예법을 준수했다. 국왕의 명칭은 '△△王' '△△大王'으로 쓰였고, 초기부터 왕비도 '妃'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국왕이 신료나 백성들에게 내린 명령, 布告의 글은 중고기 이후 하대에 이르기까지 '敎曰, 下敎, 敎書'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냉수리비」「봉평비」「적성비」 등에도 '敎' '敎令' '敎法' 등의 용례가 보인다. 또한 상고기부터 국왕에 대한 '殿下'라는 호칭도 보인다. 그리고 『사기』 남해 21년 이후 신라말까지 왕의 죽음에 대해서 '薨'을 사용하고, 중국 천자에 보낸 글은 '表'를 칭하고 있다.
그러나 신라는 대내적으로 천자국 제도도 시행하고 있었다. 상고기부터 국왕에 대해 朕, 崩, 詔, 帝, 陛下 등의 천자국 예법이 쓰인 예가 보인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기록이 난삽한 면이 있어 당시의 사실과 다를 수 있고, 고려 말 一然의 인식이 일정부분 반영되어 표현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국제관계에서 字小事大의 명분에 투철한 유학자였던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신라의 천자국 예법 사용 예가 보이는 것이다. 이외에도 『삼국사기』는 중고기부터 王母를 '太后'로, 상고기부터 '太子' 호칭을 전하고 있다. 이는 금석문에서도 확인된다.
신라에서 내부적으로 천자국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는 것은 각종 금석문 자료를 통해서 입증된다. 이는 법흥왕대에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하고 「진흥왕순수비」에 '帝王建號'를 표방하고 있는 사실과도 관련될 것이다. 한편 『삼국유사』에서 신라의 수도를 '帝京'으로 표현하고 「고선사 서당화상비」에서 왕궁을 '帝關'으로 표현한 것도 흥미롭다.
『삼국사기』『삼국유사』 그리고 금석문 자료들을 대략적으로 검토해 본 결과, 신라는 상고기부터 천자국 예법을 동원하여 국왕의 권위를 수식하려고 노력한 듯 하다. 삼한시기 이래 제천의례 등 종교적 행사와 주술을 통해 국왕의 신성성과 초월성은 강조되어 왔다. 이후 중국이나 고구려, 백제로부터 유교적 天子 관념이 도입되고, 중국과의 교섭을 통해 황제국 예법이 소개되면서 신라는 이제 제도, 격식의 차원에서 천자국 제도를 원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국체를 대외에 선양하려고 시도한 듯 하다. 상고기에는 천자국 제도에 담긴 중국적 천하관에 대한 인식도 빈약했고 중국세력은 신라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 못했으므로 대외적인 천자국 체제도 가능했을 것이다.
중고기 이후로 왕권 중심의 집권체제가 강화되면서 대내적인 천자국제도는 部體制를 해체하고 신료들에게 국왕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며 民을 직접 지배하는 데 실질적인 효용성을 발휘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隋, 唐의 위력을 인식하면서 중국과의 대외교섭에 있어서는 事大의 禮를 준용했다.
진덕왕, 무열왕대에는 唐 문화를 적극 수용하면서 漢化政策을 펴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천자국제도를 지속했다. 여기에는 통일국가로서의 자부심, 唐과의 일전을 승리로 이끈 신라의 실질적인 국가적 위상도 작용했을 것이다.
下代는 왕족 내부 계파간의 치열한 다툼과 귀족 연립체제로 인해 왕권이 극도로 약화된 시기로 평가된다. 하지만 자료상으로는 여전히 국왕이 天子로서 군림한 것처럼 전해진다. 특히 헌강왕, 진성여왕대는 이 시기의 금석문자료가 비교적 많이 남아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천자국 제도가 적용된 예가 다수 나타난다. 이것이 당시의 실제 국왕권, 신라 국체와 어떻게 관련되는지는 앞으로 검토가 필요하리라 본다.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귀족들에 의해 국왕은 실제 정치운영에서 배제되고 天子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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