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과 초기 한국 개신교, 1885-1919 = Epidemics, Governments, and Protestantism in Korea, 1885-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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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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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연도
2020
작성언어
-주제어
KDC
200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1-36(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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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개신교 의료 선교가 시작된 1885년부터 무오 독감이 끝나는 1919년까지 35년 간 전염병과 기독교(개신교)와 정부의 상호관계를 다룬다.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이나 서양/미국 종교인 기독교는 한반도에 들어온 외부 세력이지만 자리를 잡고 토착화하려고 했다. 반면 이들을 통제하고 정권을 유지하려고 했던 정부와 그들을 함께 사회 변화를 경험한 한국인들의 삶과 대응이 있었다. 이들의 만남에서 크게 세 가지 문제가 대두했다. 첫 이슈는 전염병 방역에서 정부와 교회의 관계이다. 둘째 이슈는 전염병 담론에서 과학과 종교의 관계이다. 셋째 이슈는 전염병 유행에 따른 교회 내부의 변화로 예전과 선교와 신학의 변화이다. 이 논문이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초기 기독교 의료 선교는 개종의 수단으로써 개인 환자 치료에 머물지 않고, 1886년 콜레라 유행부터 방역 사업에 참여하고, 1895년 을미년 콜레라 유행 때는 피병원과 적십자로 표시한 콜레라대를 운영하여 위생 방역과 환자 구호에 나섬으로써 붉은 십자가가 구원의 상징이 되었다. 갑오개혁 이후 세균론으로 대변되는 문명화 담론이 확산될 때 개신교도 1899년, 1902년 콜레라 유행 때 무교의 귀신론과 대결하면서 세균론을 전파하고 서양 의학과 영미 종교를 믿는 체험적 공동체를 형성했다. 개신교는 조선과 대한제국 정부와는 상호 협력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전염병 방역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선교를 확대했다. 반면 개신교는 침략 외부 세력인 일제의 통감부의 경찰 위생과는 경쟁 관계속에서 공중보건 분야에서 주도권을 상실했으나, 의료 선교와 간호 사업을 전국으로 확장하고, 방역 운동, 부흥 운동, 교육 계몽 운동을 동시에 진행하면서 민족의 고난과 함께 했다. 총독부는 1910년 60,000명을 죽인 만주 흑사병 이후 한국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면서 1911년 총독시해 음모사건으로 기독교 민족주의를 탄압했다. 개신교는 1918년 무오독감 대유행 때에는 마스크를 쓰고 위생담론에 침묵하였으나, 세브란스병원에서 세균학적 연구를 진행했다. 서북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 개신교는 음모사건 이후 8년 간 기독교 민족주의를 강화한 결과 전국 교회망을 이용하여 삼일운동에 조직적, 주체적으로 참여했다.
더보기This paper discusses the relationships among epidemics, Protestantism and the governments in Korea from the beginning of the Protestant medical mission in 1885 to the end of Spanish Flu (Muo Influenza) in 1919. Three outsiders ― epidemics, Christianity, and Japanese imperialism ― interacted in the fatal years of early modern Korea. By controlling epidemics on one hand and checking the progress of Christianity on the other, the Korean and Japanese governments maintained their political upper hand. This paper tackles three major issues emerged from their encounters. The first issue is the church and state relationship in dealing with epidemics. The second issue is the science and church relationship in the discourse on infectious diseases. The third issue is the change of the church itself in its liturgy, missions, and theology. The major arguments of this paper are as follows. Early Christian medical missions invested in the treatment of individual patients to get more converts, but also participated in the quarantine projects since the cholera outbreak in 1886. During the Eulmi cholera outbreak in 1895, the Chejungwon as a mission hospital and the Christian Cholera Corps, wearing the red cross, provided people with hygiene education, quarantine shelters, and patient relief works. By the commitments of the Korean Christian corps, the red cross became a symbol of salvation to the mass in fear. When the discourse of civilization was disseminated in Korea from the Gabo Reform in 1894, Protestant missionaries confronted with the shamanistic belief in evil spirits as the cause of diseases and they found good chance to propagate the germ theory during the cholera outbreaks in 1899 and 1902. Korean Christians formed a community of faith in both Western medicine and Anglo-American religion. Protestant churches expanded their constituency by participating in anti-cholera hygiene while maintaining cordial cooperation with the governments of Joseon and the Daehan Empire. On the other hand, Protestants lost their medical hegemony in public health at the competion with the police hygiene of the incoming Japanese imperialist government. Protestantism launched the hygiene movement, the revival movement and the educational enlightenment movement simultaneously, along with sharing the sufferings of the Korean people during the rule of the Resident-Governor Government. After the deadly Manchurian Plague in 1910, the Japanese Governor-General Government strengthened control over Koreans, and repressed Christian nationalism through the Conspiracy Case in 1911. Protestant Christians, wearing masks during the Spanish Flu in 1918-19, performed the church services and remained silent in the hygiene discourse, except conducting bacteriological studies at Severance Hospital. During such a silent and suffering winter they organized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initiated by Presbyterians and Methodist in the northwestern provinces, and participated in the peaceful protest rallies by utilizing the nationwide networks. It was a result of strengthening Christian nationalism for eight years after the Conspiracy C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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