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개천절 수호 교단 간 활동 근거지 비교 연구 = Foundations of Religious Groups That Protected the National Foundation Da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Rule: A Comparative 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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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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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어
KDC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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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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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239(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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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학계에서는 흑백논리로써 “대종교는 항일 단체, 단군교는 친일 단체”로 인식하고서 연구를 진행해 왜곡된 성과를 축적해 왔다. 대종교와 단군교는 뿌리가 같은 종교로 나철과 정훈모가 1909년 음력 1월 15일 한성부 북부 재동 8통 10호(가회동 14번지)에서 단군교로 출발했고, 개극절(개천절의 초명) 행사를 자문동(현재의 원서동)에서 같이 했다. 그렇기 때문에 공평한 조건에서 서울의 개천절 행사를 중심으로 대종교와 단군교의 전개과정을 고찰해 보고자 했다.
첫째, 나철(1863∼1916)이 교주로 있던 대종교는 1914년에 총본사를 북간도 화룡현으로 이전하면서 서울 ‘북촌’에 남도본사를 두었고, 1930년까지 한반도 교구를 관할했다. 간동 31통 5호에 있던 남도본사는 1921년에 가회동 23번지(318평, 1,051㎡)와 계동 101번지(539평, 1,782㎡)에 각각 설립되어 약 300미터의 거리를 두고 경쟁 관계가 되었다. 전자의 가회동 남도본사는 국어학자 신명균(1889∼1940), 종교인 김용기(1876~?) 등이 주도했고 1924년에 회선시교당으로 이름을 바꾸어 공식 활동을 지속했다. 그러나 계동남도본사의 세력이 커지면서 1924년 말에 끝내 문을 닫게 된다.
반면 계동 101번지 건물은 거물급 친일파 윤덕영(1873~1940)이 구입한 것이며, 친일파들의 막대한 자금력으로써 개천절 등 많은 행사를 지속했고 교육사업과 경전편찬도 전개했다. 강우(1862∼1931)를 비롯한 대종교 남도본사 간부진과 대종교청년회, 대종교진흥회도 모두 계동에 집결되었다. 그러나 1926년 대종교진흥회장 박용태(1888~1938)가 교비 2500원(현재 가치 1,578만원)을 가지고 중국 톈진으로 가서 독립운동 자금으로 활용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남도 본사에 대한 지원이 끊기게 되었다. 이에 남도본사 지도자들은 계동을 떠나 1927년 효자동 106번지에 남일도본사를 복원했다가 간동 88번지를 거쳐 1930년 2월에 고양군 한지면 신당리 162번지 묘지땅으로 이전해서 겨우 유지했다. 그러나 지도자 강우가 병환으로 운영을 하지 못하면서 결국 폐문되고 말았고 그도 1년 뒤 사망했다.
둘째, 정훈모(1868~1943)가 교주로 있던 단군교는 1910년 10월 12일 서울 중부 니동 자택에 총본부를 설치하고 활동을 개시했다. 단군교 총본부는 이후 박동, 와룡동, 경운동 등 북촌의 남단 지역에서 포교 활동하는 과정에서 1912년부터 1915년까지 정훈모가 교주의 자리에서 밀려나는 내분을 겪고서 다시 복귀해 1921년에 북촌을 벗어나 서울 ‘동촌’인 충신동, 동숭동, 연건동 등지에서 1929년까지 활동했다. 정훈모는 유교 사상과 의례를 기반에 두고 국조 단군에 대한 예식을 정비해 어천절을 승어대제로, 개천절을 강어대제로 이름을 바꾸어 제례를 계속 지냈다.
1930년 10월 3일 식도원 주인으로서 부를 축적한 안순환(1871~1942)의 지원으로 경기도 시흥군(현재의 서울 금천구 시흥 4동) 녹동서원 내에 단성전을 지으면서 6년간 활동하던 중 1936년 일제에 의해 폐교되었다.
1910년에 개극절이 개천절로 바뀌고 오늘날 국경일로 제정되기까지 일제하 서울에서 개천절 수호에 노력했던 대종교 남도본사와 단군교 총본부의 역할, 지도자들의 공적, 그리고 예식에 대해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사료되었다.
The academic world has accumulated its share of distorted studies presenting a black-and-white view that “Daejonggyo is anti-Japanese and Dangungyo is pro-Japanese.” Daejonggyo and Dangungyo have the same religious root as Ra Cheol, and Cheong Hunmo established Dangungyo on January 15, 1909, under the lunar calendar, at 8-10 Jae-dong, Bukbu, Hanseongbu(14 Gahoe-dong). The ceremony of Gaegueuk-jeol(original name of Gaecheon-jeol) at Jamun-dong(now Wonseo-dong) was also held at the same time. This paper aims to explore the development of Daejonggyo and Dangungyo focusing on the religious rituals of Gaecheon-jeol in Seoul under impartial circumstances.
First, Daejonggyo and its leader, Ra Cheol(1863~1916), moved their Chongbonsa (headquarters) to Helong-County, China, in 1914, and left the Namdobonsa(the Seoul branch office with jurisdiction over Daejongyo dioceses south of Baekdu Mountain) at “Buckchon”, Seoul, in order to manage the Korean Peninsula diocese until 1930. Namdobonsa, which was originally located at 31-5 Gan-dong, was rebuilt at 23 Gahoe-dong and at 101 Gyedong, respectively, and each competed against the other within a 300-meter distance. The Gahoe-dong Namdobonsa, led by leaders such as Shin Myeong-kyun(1889~1940), a Korean linguist, and Kim Yong-ki(1876~?), a religious man, changed its name to Hoeseon Sigyodang(the Church of Daejonggyo) and continued its official activities. However, it eventually closed down in late 1924 as the Gyedong Namdobonsa grew much bigger.
On the other hand, the building at 101 Gyedong was owned by Yun Deok-yeong(1873~1940), who used the massive funds provided by his groups of pro-Japanese collaborators to organize numerous activities including Gaecheon-jeol rituals, educational enterprises, and publication of its scriptures. The executive staff of Daejonggyo Namdobonsa(the Korean Peninsula diocese) including Kang Woo(1862~1931), the Daejonggyo Youth Association, and the Daejonggyo Promotion Society also assembled in Gyedong and eventually they all united. However, after Park Yong-tae(1888~1938), the leader of Daejonggyo Promotion Society, was found guilty of embezzling its operating expenses of 2,500 won(current value: 15.78 million KRW) to fund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Tianjin, China, in 1926, the financial support for Namdobonsa was terminated. This led the executive staff to leave Gyedong and re-establish Namdobonsa at 106 Hyoja-dong in 1927, which moved again to 88 Gan-dong, and then finally, in February 1930, it was established in a building within a cemetery at 162 Sindang-ri, Hanji-myeon, Goyang-gun(now Sindang-dong, Seoul). However, when Kang Woo's failing health hindered him from performing his administrative duties, the organization eventually closed down and Kang Woo died a year later.
Second, Dangungyo with Cheong Hunmo(1868~1943) as its leader established its Chongbonbu(headquarters) at Ni-dong, Jungbu, Seoul(now Unni-dong) on October 12, 1910, and commenced its activities. Amid its propagation activities conducted in the south of Buckchon, such as in Bak-dong, Waryong-dong, and Gyeongun-dong from 1912 to 1915, Cheong Hunmo was ousted from the leadership due to an internal conflict. After assuming leadership again, Cheong left Buckchon in 1921 and continued his work in Chungsin-dong, Dongsung-dong, and Yeongeon-dong, the “Dongchon” of Seoul, until 1929. He organized religious rituals for Dangun(the founder of Gojoseon, the first Korean nation) based on Confucian ideals and the Confucian ritual system and changed Eocheon-jeol to Seung-eo-Daeje, and Gaecheon-jeol to Gang-eo-Daeje.
On October 3, 1930, the Dansung-jeon Hall shrine was built in Nokdongseowon(Confucian Academy) at Siheung-gun, Gyeonggi-do Province(Siheung 4-dong, Geumcheon-gu, Seoul), with financial support from An Sun-hwan(1871~1942), who had accumulated much wealth as the president of the Sikdowon Restaurant; however, activities continued there for six years until the shrine was shut down by the Japanese police in 1936.
This study seeks to cast new light on the endeavors, achievements, and religious ceremonies of Daejonggyo Namdobonsa and Dangungyo Chongbonbu and their leaders in preserving the spirit of Gaecheon-jeol from its conception as a Gaegueuk-jeol until its enactment as a national holiday under the Japanese colonial r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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