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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무용과 부산 = New Dance and Bu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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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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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is necessary to hold two perspectives on New dance. New dance triggered changes in the status of dance art such as liberation and expression of the body, independence of dance as a fine art, and the birth of a dancer as an artist, but it also played a role as propaganda for Japanese colonial rule. During the transition to cultural rule in the 1920s, Japan emphasized the unity of Japan and Joseon and promoted Japanese culture as superior and advanced, positioning Joseon's things as outdated. internalized the cultural imperialism of Joseon youth and encouraged them to study in Japan. The pure dance and absolute dance that New Dance put forward as the banner may have been a pure ideology that blinded the colonial reality.
Since the 1920s, in line with cultural politics, Korean New dance performances have been frequently performed in Korea, mainly in Gyeongseong and Busan. In particular, Busan was a gateway city for Western culture through Korea. In the history of nationals culture been treated as a periphery of art. Contrary to the conventional view that the colonial era was a blank period for Busan dance, the enthusiasm of the New dance was hot. Regardless of the performance of Ishii Baku in 1926 or performances of Choi Seung-hee discussed as the starting point of the New dance were held in Busan in the same year, so it is safe to say that Busan is the city where the New dance began like Gyeongseong.
In addition, Busan was a city where new dance performances by Ishii Baku, Choi Seung-hee, Jo Taek-won, and Bae Gu-ja were actively performed. This is a sign that shows that Busan has Spectators who can appreciate the art of dance, a theater environment that can implement a New dance, and geographical convenience. In this atmosphere, New dancers such as Bae Gu-ja, Park Young-in, Park Oe-seon, and Kim Hae-rang were born and grew up. In the meantime, after studying in Japan, he did not return to the region other than Kim Hae-rang, so Busan has been recognized as a city where New dance performances and dancers stayed and left. This was the limit of Busan, a colonial city where Korean colonial rule of predatory education flourished.
However, New dancer such as Yoshiki Seina opened a dance research institute and created New dance works such as the absolute dance work etude <Inspiration> while continuing educational activities. A group called Busan Yeowolhoe created Poetic dance such as <The Rainy Moon> and <The Bird Chaser>. In other words, Busan was not just a cultural gateway, but a region where New dances were created and enjoyed.
신무용에 대해서는 두 가지 관점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 신무용은 몸의 해방과 표현, 순수예술로서의 무용의 독립, 작가로서의 무용가 탄생 등 무용예술의 위상에 변화를 촉발했으나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위한 프로파간다 역할 또한 수행하였다. 1920년대 문화통치로 전환하면서 일제는 일본과 조선이 하나임을 강조하며 일본문화를 우수하고 선진적인 것으로 선전함으로써 조선의 것을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위치시켰다. 문화통치에 의해 만들어진 신화는 조선 청년들의 문화제국주의를 내면화시켜 일본 유학을 부추겼다. 신무용이 기치로 내세운 순수무용, 절대무용은 식민지 현실에 눈을 멀게 하는 순수 이데올로기였을지도 모른다.
1920년대 이후 문화정치에 발맞추어 일본의 신무용 공연이 경성과 부산을 중심으로 국내에서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부산은 일본을 경유한 서구문물이 드나드는 관문도시였다. 그동안 국가문화사에서 부산은 예술의 변방으로 다루어져 왔다. 식민지시대가 부산무용의 공백기라는 기존의 관점과는 달리 신무용 열기는 뜨거웠다. 1926년 석정막의 공연이나 1930년 최승희의 공연을 막론하고 신무용의 기점으로 논의되는 두 공연 모두 같은 해에 부산에서도 이루어졌기에 부산 역시 경성처럼 신무용이 시작된 도시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게다가 부산은 석정막, 최승희, 조택원, 배구자 들의 신무용 공연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도시였다. 이는 부산이 신무용이라는 새로운 무용예술을 감상할 관객층, 신무용을 구현할 수 있는 극장 환경, 지리적 편이성 등을 두루 갖추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표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배구자, 박영인, 박외선, 김해랑과 같은 신무용가가 나고 성장하였다. 그동안 일본 유학 후 김해랑 외에는 지역으로 돌아오지 않았기에 부산은 신무용 공연과 무용가가 머물렀다가 떠난 도시라고 인식되어 왔다. 이는 일제의 약탈적 교육이 성행하는 식민도시 부산의 한계였다. 하지만 길목성홍과 같은 신무용가가 무용연구소를 열어 무음악 무용작품 습작 <인스피레이션> 등의 신무용작품을 창작하는 한편 교육활동을 지속적으로 하였으며 부산여월회라는 단체가 <비 내리는 달님>, <새를 쫓는 자>와 같은 무용시(舞踊詩)를 창작했다. 즉 부산은 문화적 관문을 넘어 신무용을 창작하고 그것이 향유되는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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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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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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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5-05-04 | 학술지등록 | 한글명 : 한국문학논총외국어명 : Theses on Korean Literature | KCI등재 |
2004-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3-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2-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1-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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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29 | 0.29 | 0.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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