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신 120년의 역사, 신앙, 평가(Ⅱ): 장로회총회신학교시대-평양장로회신학교 재건과 복구기간(1940-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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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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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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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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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201(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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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평양장로회신학교가 강제 폐교를 당한 후부터 1960년까지 한국장로교회 안에는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재건하고 그 신학 전통을 회복하려는 일련의 움직임이 강하게 일어났다. 1945년 해방 이후 남한에 있는 조선신학교는 신학적으로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진보주의로 흘렀고, 1946년 설립된 고려신학교는 ICCC와 교류하며 분리주의 노선을 걸으며 총회의 인준을 받지 않았다. 고려신학교와 총회와의 갈등이 지속되었고, 1947년 10월 부임한 교장 박형룡 박사마저 고려신학교 교장직을 사임을 하고 그 학교를 떠났다. 1947년 조선신학교 재학생 51인 호소 사건 이후 총회는 조선신학교 개편안을 제시했으나 조선신학교가 이를 거부하였다. 박형룡 박사가 고려신학교를 떠난 후 경상노회는 고려신학교 인준을 취소하였고, 고려신학교와 총회 사이에는 갈등이 지속되었다. 그런 가운데 1948년 평양장로회신학교 회복을 갈망하는 이들이 중심이 되어 총회가 주관하는 서울장로회신학교를 설립했다. 남한에서는 조선신학교, 고려신학교, 장로회신학교 세 개의 신학교를 중심으로 세 개의 파벌이 형성되었다.
1951년 총회는 조선신학교와 서울장로회신학교의 인준을 취소하고 장로회총회신학교를 대구에서 개설하여 감부열이 교장을 맡아 운영하다 그 뒤를 이어 1953년 박형룡 박사가 교장직을 맡았다. 1951년 개편된 장로회총회신학교는 평양장로회신학교와 1948년 설립된 서울장로회신학교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가장 영향력 있는 학교로 발전했다. 1952년 고려파가 분열하고 1953년에는 기장이 분열한 상황에서 장로회총회신학교는 평양장로회신학교 전통을 회복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모토로 삼았고, 1954년 「신학지남」도 속간했다. 하지만 WCC의 신학적 변천으로 인해 친 WCC 에큐메니칼 지지자들과 이를 반대하는 NAE 측 사이에 첨예한 갈등이 총회 안에 지속됨으로 인해 또 다시 한국장로교는 분열의 위기에 직면했다. 게다가 남산의 신학교 부지를 구입하려는 노력과정에서 3천만환 사건이 발생했고, 이어 발생한 경기노회의 총대 선출 사건은 WCC 에큐메니칼측과 이를 반대하는 NAE 측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심화시켜, 결국 한국장로교는 1959년 예장통합과 예장합동으로 세번째 대분열을 맞고 말았다. 신학교도 장로회신학교와 총회신학교로 분열되었다. 본 논문은 1940년부터 1960년까지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재건과 복구 과정을 면밀하게 추적하였다.
Between 1940 and 1960, there was a major push within the Presbyterian Church in Korea to rebuild the Pyongyang Presbyterian Seminary (PTS) and restore its theological heritage after it was forcibly closed. The Chosun Theological Seminary (CTS, 조선신학교) in South Korea shifted theologically to Karl Barth’s neo-orthodoxy after the country’s liberation in 1945, and the Korea Theological Seminary (KTS, 고려신학교), founded in 1946, walked the separatist line while having fellowship with the ICCC, but was not approved by the General Assembly. During this time, tensions between KTS and the General Assembly persisted, and the principal, Dr. Park Hyungryong, resigned after just six months and departed the school. The General Assembly submitted a plan to reform CTS in 1947 after the appeal of 51 students enrolled in CTS, but CTS rejected it. The Kyeongsang Presbytery canceled KTS’ accreditation after Dr. Park Hyung-ryong left, and the confrontation between KTS and the General Assembly continued. Meanwhile, in 1948, those who wished for the PTS to be restored founded the Seoul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SPTS, 서울장로회신학교), which was overseen by the General Assembly. Thus, three seminaries existed in South Korea: CTS, KTS, and SPTS, and factions formed around these schools.
The General Assembly established the Presbyterian General Assembly Theological Seminary (PGATS, 장로회총회신학교) in Daegu in 1951, with Campbell as the first principal, followed by Dr. Park Hyung-ryong. Because it inherited the traditions of PTS, Pyongyang, and SPTS, which were formed in 1948, the PGATS has grown into the most influential school. In a scenario when the Koshin and Kichang denominations broke in 1952 and 1953, the PGATS adopted the most essential slogan of maintaining the PTS tradition, and republished Shinhakjinam(Theological Review) in 1954. However, after sending Kim Hyun-jung and Myung Shin-hong to the 2nd WCC General Assembly in Evanston in 1954, a sharp conflict between pro-WCC ecumenical supporters and NAE opponents remained within the General Assembly because to the WCC’s theological revision. As a result, the Presbyterian Church in Korea found itself in yet another schism. Furthermore, a case of misappropriation of 30 million hwan occurred during the process of attempting to purchase the site of a seminary in Mt. Namsan, and the subsequent election of commissioners by the Kyunggi presbytery intensified the confrontation and conflict between the WCC Ecumenical and the NAE side who opposed it. The seminary was also divided into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長神) and Presbyterian G. A. Theological Seminary(總神). This thesis closely traced the reconstruction and restoration process of Pyongyang Presbyterian Seminary(平神) from 1940 to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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