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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개평마을의 풍천노씨가(豊川盧氏家)와 가풍(家風) = Study on Pungcheon No Family(豊川盧氏家) of Hamyang Gaepyeong Village and Family Tradition(家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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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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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353(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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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research analyzed correlation between development of Pungcheon No Family who settled down in Hamyang Gaepyeong village in late 15th century and their family tradition(家風).
Pungcheon No Family was a family who settled down in Gaepyeong village when No Sukdong, who was appointed as Daesaheon and Yejochampan after having passed literary exam during Sejong’s reign, married Kim Jeom’s daughter, who was a son-in-law of Jeong Bokju. Later, Pungcheon No family developed by being closely connected with Hadong Jeong family through grandchildren of Kim Jeom and his wife Hadong Jeong.
Pungcheon No family of Gaepyeong thrived during the great grandchild, No Jin after the son, No Bun and grandchild No Woomyeong. No Jin attained distinction as Ijopanseo, and educated lots of literary men in Yeong, Honam region as a great scholar, after his death, he was enshrined in Dangju Seowon of Hamyang and Goryong Seowon of Namwon respectively.
Since No Jin, lots of leaders of righteous armies were produced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and the Manchu war, also, since the 17th century, flourished to the point where the greatest number of people are included in the list of the yangban, Hyangan. Particularly, this family produced No Gwangdu, appointed as Hojopanseo and No Gwangri, excellent in Seongrihak and sentences during the 19th century, and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is family produced lots of persons who worried about the future of the country by participating in Singanhwe.
Such prosperity of Pungcheon No family of Gaepyeong village was closely related to the formation of family tradition of Pungcheon No family since Yibhyangjo. Firstly, Yibhyangjo No Sukdong of Gaepyeong village left 8-character will, ‘Seongsinyeomgong geunganhwahe(誠信廉公謹簡和惠)’, based on faithfulness and loyalty through Susin and Chula, while No Bun left ‘Cheongsinyeomgyeol’, which emphasized self cultivation and uprightness of government position, No Woomyeong left moderation(中庸) in daily life, and Lee Jonghyeong Nosang of No Jin left Anbinnakdo(安貧樂道) as his will. Also, No Jin specified No Sukdong’s 8-character will as the regulation to be kept by the family for generations, taking the lead of filial duty(孝悌) and loyalty(忠信), and formed family tradition of Pungcheon No family of Gaepyeong village, emphasizing the way of moderation in everything.
Also, No Jin created the genealogy of Pungcheon No Family for the first time. He produced a genealogy for his descendents to know each other and promote friendship, preparing a basis for both Pungcheon No family and Hadong Jeong family prosper henceforth by including the persons of Gyeongju Kim family and Hadong Jeong family in the genealogy, who were connected as relatives in the same village. Later, the two families exchanged influence deeply both in political and academic aspects. Later, these families enshrined Jukdang Jeong bokju of Hadong Jeong family, who greatly influenced formation and development process of Hadong Jeong family and Pungcheon No family of Gaepyeong village, Songjae No Sukdong of Pungcheon No Family, and Singodang No Woomyeong, grandson of No Sukdong, besides Jo Seungsook, a late Goryeo loyal subject from the same village by establishing Dogok Seowon on the upper side of the village in 1701 (Sukdong’s reign 27th year). Later, in 1820, enshrined No Saye, who represented Pungcheon No family since Nojin, and Jeong Sumin, who represented Hadong Jeong family of Gaepyeong village since Jeong Yeochang, in Dogok Seowon in 1820(Sunjo’s reign 20th year). In 2000, Mangangjae Jeong Deokha was enshrined, who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during Sunjo’s reign. This was a result of harmony and development between Hadong Jeong family and Pungcheon No family in one village in a deep relationship.
본고는 15세기 초 함양 개평마을에 정착한 풍천노씨 가문이 번창하여발전한 과정과 가풍(家風)과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것이다. 풍천노씨가는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과 예조참판을 지낸 노숙동이 하동정씨정복주의 사위인 김점의 딸과 혼인하여, 외손봉사를 통해 개평마을에 정착하였다. 개평의 풍천노씨가는 공신이었던 노숙동에 이어 아들 노분과 손자노우명을 거쳐 증손자인 노진에 이르러 가문이 크게 번창하였다. 노진은이조판서로서 현달하였고, 대학자로서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기 때문에, 지리산권 일대의 영, 호남 지식인과 후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노진 이후로도 개평마을의 풍천노씨가에서는 왜란과 호란 때에는 많은 의병장이 배출되었고, 17세기 이후에는 양반들의 명단인 향안(鄕案) 에 함양에서 가장 많은 인물이 수록될 정도로 번창하였다. 특히 19세기에 이르러서 호조참판을 지낸 노광두나, 성리학과 문장에 뛰어난 노광리를 배출하였고, 일제 시대에는 신간회에 가담하여 민족의 장래를 고민하는 인물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개평마을의 풍천노씨가가 번창한 것은 향당에서의 효제(孝 悌)와 조정에서의 충신(忠信), 그리고 매사에 예의염치를 중시하였던가풍의 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개평마을의 입향조 노숙동은성실과 신의에 바탕을 두고 수신과 출사에 걸쳐 지켜야 할 도리를 밝힌‘성신염공근간화혜(誠信廉公謹簡和惠)’ 8자 유훈을 남겼고, 아들 노분은 수신과 청렴한 관직생활을 강조한 ‘청신염결’, 손자 노우명은 일상행활에서의 중용(中庸), 증손자인 노진의 종형인 노상은 안빈낙도(安 貧樂道)를 가훈으로 남겼다. 이러한 유훈을 이어받은 노진은 노숙동의8자 유훈을 가문의 법도로 확정짓고 효제를 솔선수범하였으며, 중용을강조하였다. 이어 노진의 종제 노주는 나라가 위급할 때에 거의(擧義) 하였고, 노진의 종증손 노형운은 효제충신과 예의염치를 강조하였으며, 노진의 증손 노형필 은 정주의 격언에 따른 실천을 중시하였다.
특히 노형운이나 노형필 등은 가풍 외에도 그들이 사사(私事)하였던한강 정구의 명체적용(明體適用)이나 예학, 여헌 장현광의 지행병진(知行竝進)의 영향을 깊이 받은 것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효제를 토대로 향당과 출사의 가풍을 수립하였던 풍천노씨가에서는 향촌사회에서 족보를 간행하고 사당과 서원향사에도 더욱 힘을기울이게 되었다. 1701년 이후로는 마을의 경쟁관계에 있던 하동정씨와 연합하여 도곡서원을 설립・운영함으로써 가문의 명성을 높이고두 가문의 화합을 대외적으로 과시하였던 것이다.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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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6-05-15 | 학회명변경 | 한글명 : 남명학연구소 -> 경남문화연구원영문명 : The Nammyonghak Study Institute -> Institute of Gyeongnam Culture | KCI등재 |
200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3-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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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66 | 0.66 | 0.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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