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I등재
중일전쟁기 일본군의 중국 공습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苦鬪 = Japanese military’s air raid on China and fight for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during Sino-Japanese War
저자
조건 (동북아역사재단)
발행기관
학술지명
한국 근현대사 연구(Journal of Korean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권호사항
발행연도
2020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7-52(46쪽)
KCI 피인용횟수
0
제공처
소장기관
제국주의 일본은 1937년 중국을 상대로 전면전을 도발한 직후부터 대규모 공습을자행하였다. 일본군은 중국을 상대로 무차별 공습을 감행했으며 그로 인한 중국인민의 피해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일본군의 잔학함이 극에 달했던 남경학살역시 공습에서 비롯되었다. 주목할 점은 일본군 비행대가 중국 상공에서 폭탄을퍼붓던 그때 우리 임시정부의 요인을 포함한 수많은 동포들 역시 그 하늘 아래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2년 윤봉길 의거를 계기로 상해를 떠나 중국 각지를이동하면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특히 중일전쟁이 시작된 1937년 이후에는 하루가 멀다고 쏟아지는 일본군의 공습을 피해 가며 장사·광주·불산·유주·기강 등의도시들을 전전하였다.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이 기록한 증언 속에는 당시의 고난과 피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임시정부는 1940년 이동을 멈추고 중경에 안착하면서 본격적으로 대일전쟁에뛰어들었다. 무엇보다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군사적 방편을 통한 항일투쟁 노선을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중경대공습으로 불리는 일본군의 대규모 공습으로 초기 임시정부의 활동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임시정부는 중경에 안착한 이후에도 세 차례에걸쳐 청사를 옮겨야만 했다. 청사 이전은 여러 이유들이 중첩된 탓이었지만 가장주요한 까닭은 역시 공습 피해 때문이었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당시 일본군의 공습으로 인해 약 7,6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15,000여 동의 가옥이 피해를 입었다고 집계하였다. 물론 공식 집계 외 실제피해는 더욱 극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당 정부의 집계 그 어디에도 임시정부와우리 동포들의 피해 실태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중국의 현지 신문이나 외신들의기사 속에서도 우리 동포들의 고투는 찾아볼 수 없다.
일본군의 중경공습은 1938년부터 1943년까지 계속되었다.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공습으로 인한 고투를 묵묵히 견디며 조국의 독립을 위한 투쟁을멈추지 않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항일독립투쟁은 일본군의 공습 피해를 견디며살아남은 그 지점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Imperial Japan carried out a massive air raid on China rightly after provoking a full-scale war against China in 1937. Japanese military made a massive air raid on China, causing indescribable damage on Chinese people. Nanjing massacre that brutality of Japanese military ran to an extreme also stemmed from air raid. Notable is the fact that many of Korean people including key figures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lived under the same sky at the moment when Japanese aviation corps took out cluster bombs at Chinese air.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Republic of Korea kept on anti-Japanese struggles moving into various regions of China leaving Shanghai on the occasion of the notable undertaking of Yun Bonggil in 1932. In particular, after Sino-Japanses War in 1937,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wandered from Changsha, Gunangzhou, Fóshān, Liushou to Gijiang and other cities while avoiding a barrage of Japanese military air strike day after day. The testimony record of key figures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and their family contained the suffering and damage of the time.
The Provision Government of Republic of Korea entered into a anti-Japanese war in earnest when stopping movement and settling in Chongquing in 1940.
Above all it presented the Anti-Japanese struggle line through military means by creating Korean Liberation Army. However the massive air strike of Japanese military called as Chongqing Massive Air-raid led to the restriction of initial activities of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The government had to transfer the government building three times after settling in Chongqing. Even though there were many overlapped reasons, the major reason is the damage by air strike.
Nationalist Party of China calculated that at the time Japanese air raid left approximately 7,600 people dead and 1,500 homes damaged. Of course practical damage other than official estimation would be worse. But there was no record of damage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and Korean people suffered in the estimation of Nationalist Party of China. Even in Chinese newspaper or foreign newspaper articles, the struggle of Korean people could not be noted. The air strike of Chongqing by Japanese military continued from 1938 to 1943.
The key figures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including Kim Gu stood the bitter struggle caused by air raid but did not stop the fight for Korean independence. We should not forget that anti-Japanese struggle of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began from the moment of surviving the damage of air strike by Japanese military.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
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3-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2016 | 0.66 | 0.66 | 0.71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65 | 0.62 | 1.675 | 0.11 |
서지정보 내보내기(Export)
닫기소장기관 정보
닫기권호소장정보
닫기오류접수
닫기오류 접수 확인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확인
닫기이용약관
닫기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약관 (2017년 1월 1일 ~ 현재 적용)
학술연구정보서비스(이하 RISS)는 정보주체의 자유와 권리 보호를 위해 「개인정보 보호법」 및 관계 법령이 정한 바를 준수하여, 적법하게 개인정보를 처리하고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에 「개인정보 보호법」 제30조에 따라 정보주체에게 개인정보 처리에 관한 절차 및 기준을 안내하고, 이와 관련한 고충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개인정보 처리방침을 수립·공개합니다.
주요 개인정보 처리 표시(라벨링)
목 차
3년
또는 회원탈퇴시까지5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3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2년
이상(개인정보보호위원회 : 개인정보의 안전성 확보조치 기준)개인정보파일의 명칭 | 운영근거 / 처리목적 | 개인정보파일에 기록되는 개인정보의 항목 | 보유기간 | |
---|---|---|---|---|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자 가입정보 파일 | 한국교육학술정보원법 | 필수 | ID, 비밀번호, 성명, 생년월일, 신분(직업구분), 이메일, 소속분야, 웹진메일 수신동의 여부 | 3년 또는 탈퇴시 |
선택 | 소속기관명, 소속도서관명, 학과/부서명, 학번/직원번호, 휴대전화, 주소 |
구분 | 담당자 | 연락처 |
---|---|---|
KERI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정보보호본부 김태우 | - 이메일 : lsy@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439 - 팩스번호 : 053-714-0195 |
KERI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개인정보보호부 이상엽 | |
RIS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대학학술본부 장금연 | - 이메일 : giltizen@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149 - 팩스번호 : 053-714-0194 |
RIS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학술진흥부 길원진 |
자동로그아웃 안내
닫기인증오류 안내
닫기귀하께서는 휴면계정 전환 후 1년동안 회원정보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으신 관계로 개인정보가 삭제되었습니다.
(참조 : RISS 이용약관 및 개인정보처리방침)
신규회원으로 가입하여 이용 부탁 드리며, 추가 문의는 고객센터로 연락 바랍니다.
- 기존 아이디 재사용 불가
휴면계정 안내
RISS는 [표준개인정보 보호지침]에 따라 2년을 주기로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관하여 (재)동의를 받고 있으며,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휴면계정으로 전환됩니다.
(※ 휴면계정은 원문이용 및 복사/대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휴면계정으로 전환된 후 1년간 회원정보 수집·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RISS에서 자동탈퇴 및 개인정보가 삭제처리 됩니다.
고객센터 1599-3122
ARS번호+1번(회원가입 및 정보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