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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부산고고회의 설립과 활동에 대한 고찰 = A Study on the establishment and activities of the Pusan Archeological Society during 1930s
저자
이순자 (숙명여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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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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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연도
2008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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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153-194(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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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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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조선 식민통치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식민지 지배의 정당화 작업이었다. 그리고 일제는 식민통치의 논리를 구축하기 위한 일련의 작업으로서 고적조사사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각 지역에서 실시된 고적조사사업은 중앙의 조선총독부에서 일괄적으로 관리하거나 사업을 진행시키기에는 인력과 재정적인 면에서 많은 한계성을 가지고 있던 사업이었다. 따라서 구체적인 사업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시행부서로서 각 지역의 지방고적보존회와의 긴밀한 연계성을 지니고 사업을 진행시켜 나갔다.
일제 강점기 지방고적보존회의 역할이 해당 지역의 고적을 비롯한 유서 깊은 문화유산을 보호, 관리, 현창하는 것을 주요 사업으로 시행되었는데 실제 그 명칭은 다양하다. 이 가운데 본고의 주제가 되었던 부산고고회는 아마추어 고고학자들이 참여하였다든가 활동 내용적인 면에서 조금 색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그 역할만은 다른 지역의 지방고적보존회와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부산고고회의 설립 및 활동, 그리고 부산박물관의 설립 추진 운동을 통해 부산지역에서 타 지역의 지방고적보존회와 유사한 성격을 지닌 부산고고회의 면모를 살펴보고자 한다.
부산고고회는 1931년 9월 12일 설립되어 1936년까지 활발하고 구체적인 활동이 파악되며 1940년대 초반까지는 유지되었던 단체로 보인다. 회원은 주로 부산과 부산 주변에 거주하는 아마추어 고고학자들로 부산을 중심으로 고고학에 관련된 연구 및 그 취지의 보급을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였다. 설립 초기 회원은 일찍이 조선에 건너와 부산 주재 기간이 긴 사람들이었으며, 1936년 이후에 새롭게 회원이 된 사람들은 주로 교원들이었다. 부산고고회에 참여한 인물들을 분석해본 결과 이들은 패총, 와, 토기, 청자 등 일찍부터 조선의 유물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인물들로 부산고고회 설립을 시작으로 조선총독부가 진행하는 고적조사사업과는 별도로 민간 차원에서 좀더 본격적으로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부산고고회의 회칙을 검토한 결과 이 단체는 일제강점기 다른 지방고적보존회의 회칙과 그 내용면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으며, 굳이 차별성을 들면 그 명칭에 맞게 지방고적보존회는 지방 고적의 보존에 중점을 두었다면, 부산고고회의 경우는 연구활동에 중심을 두었음이 차이라고 보아진다.
부산고고회의 주요활동은 강연회 등 학술발표회 개최, 연구여행 및 발굴조사, 전람회 등을 통해 연구 자료 수집 공개, 보존 방법의 강구 등이었으며, 1935년경에는 고적지의 보존을 위해 나무로 푯말을 세우기도 하였다. 강연회 등 학술발표회의 주제는 패총을 중심으로 한 선사시대 관계가 가장 많으며, 그 외 와 및 도기 관련, 왜성 관계, 낙랑 관계 및 박물관 관계 등 주제가 다양한데 주로 부산지역의 출토 유물을 중심으로 한 강연이었다.
연구여행 및 발굴조사 활동은 주로 패총, 왜성 조사 연구와 와ㆍ토기의 수집 연구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1935년에 고적지 네 곳에 목재 標柱를 세우는 등 ‘향토’ 지역에서의 고적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적극적으로 현창하고자 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밖에 수집 자료에 대한 전람회를 개최함으로써 전시활동을 병행하였다. 대체로 전람회는 회원의 수집품인 와, 토기, 도자기가 전시의 중심을 이루었으나 이와 더불...
One of most crucial tasks for Japanese colonization of Korea was a justification for its colonial rule. Japanese government promoted the investigations of historical sites as groundwork for organizing the logic of colonial rule. However, the investigations enacted in local areas had a lot of limitations in terms of finance and mobilization. So they were promoted in close relationship with each local society for reservation of historical sites as an indispensable agency for specific projects.
The major functions of societies for reservation during Japanese colonization were protection, supervision, and enhancement for historic remains. Their titles were varying. The Pusan Archeological Society, which was one of societies for reservation, had similar aspects with other societies, though it had some peculiarities in its activities. Thus this study elucidated the similar aspects of the Pusan Archeological Society with other societies or reservation, focusing on its endeavor for establishing Pusan Museum.
The Pusan Archeological Society was established on Sept. 12th, 1931. We can find its specific activities in 1936, and can assume that it survived until at least early 1940s. Its members consist of amateur archaeologists who lived around Pusan. Its purpose was to study and popularize archeology in Pusan. Early members were those who stayed long in Pusan since their early coming to Korea, while new members after 1936 were mostly teachers. According to the analysis of participants in the Pusan Archeological Society, I can conclude that they concerned in Korean antiques such as shell heaps, roofing tiles, earthen vessels, and porcelain from early time, and they founded ground for civil activities apart from the investigations promoted by Japanese government.
From examining the rules in the Pusan Archeological Society, I find that its rules were not so far from other societies for reservation at that time, though, if I mention one difference, the Pusan Archeological Society concentrated more on researches, while societies for reservation more on preservation of historical sites.
The main activities of the Pusan Archeological Society were hosting academic seminars, going research trips or excavations, exhibiting data for researches, and devising methods for reservation. In 1935, it established wood posts for reservation of historical sites. Most of topics for its academic seminars and lectures were the pre-historical period ruins such as the shell heaps. The topics also included porcelains, Japanese fortresses, Nakrang ruins, and museum. Most of them concerned remains found in area around Pusan.
Its research trips and excavations concentrated on investigating the shell heaps and Japanese fortresses and collecting roofing tiles and earthen vessels. In 1935, it established the wood posts in four historical sites for displaying the significance of "local" sites. Besides, it exhibited its collections. The exhibitions consisted of members’ collection of roofing tiles, earthen vessels, and porcelains. But, sometimes it concerned castles, Japanese trade post, and various evidences of the "local history" in Pusan -for example, the history of Japanese who stayed in Pusan since the opening of harbor.
It also promoted the construction of museum. However, the most impending issue was financial one. To solve it, the Pusan Archeological Society held two exhibitions and contacted with Kashii Kentarou(香椎源太郞), one of entrepreneurs in Pusan. But it failed for various reasons. There were a fundamental gap between Kashii and a municipal office in Pusan, transfers of the administer of Kyungnam providence and the secretary of the department of interior, and the decease of Kashii’s wife.
Another figure who involved with the establishment of Pusan museum was Kuroita Katsumi(黑板勝美). Kuroita, who was also a committee member of the Investigation of Historical Sites in Japanese government, called meeting in Pusan for five or six times ...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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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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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6-06-10 | 학술지명변경 | 한글명 : 전남사학 -> 역사학연구 | KCI등재 |
2006-03-21 | 학회명변경 | 한글명 : 전남사학회 -> 호남사학회영문명 : Chonnam Historical Association -> Honam Historical Association | KCI등재 |
200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3-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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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68 | 0.68 | 0.68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63 | 0.6 | 1.183 | 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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