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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安重根)과 최재형(崔在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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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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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DC
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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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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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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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114(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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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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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여름 함경도 두만강 국경지역의 일본군수비대를 공격했던 연해주의병 운동의 중심조직은 동의회였다. 최재형은 동의회의 총장으로서, 안중근은 평의원으로 선임되었으며, 국내로 진공한 동의회 의병부대 조직에서 안중근은 우영장으
로 활동했다. 하르빈 의거의 동지 우덕순 역시 동의회 회원이었다. 동의회의 중심세력은 안중근과 그의 의형제인 엄인섭, 김기룡을 중심으로 한 ‘87형제파’의청년들이었다.최재형은 1893년이후 연추면의 도헌(都憲)으로서 1908년 당시 한인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한인사회의 지도자였다. 최재형이 동의회의 최고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군대를 상대로 하는 청부업과 상업 활동을 통해 축적한 경제력과 러시아지방당국자들과 한인농민들 사이에서의 두터운 신망을 바탕으로한 한인사회에서의 영향력이었다. 국내로부터 망명해오는 대부분의 애국지사들이 연추 마을과 노보키예프스키(1905년이후)에 위치했던 최재형의 집에서 식객으로 머물렀고 안중근도 예외가 아니었다.동의회가 최재형파와 이범윤파로 분열 대립되었을 때, 안중근은 최재형파에 속했다. 안중근은 이범윤측이 지목한 최재형파 핵심인물 9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안중근은 이범윤의 권위주의적이며 봉건적인 태도를 달가워하지 않았으며,후일 하르빈사건 심문과정에서도 “이범윤과는 의견이 맞지 않아 행동을 같이한적이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유인석이 최재형에게 보낸 편지에서평가한 바, 안중근은 최재형과 동지적 관계에 있었다. 즉, 유인석은 안중근이 “일찌기 도헌[都憲-최재형] 휘하의 병사가 되어 도헌의 집에 머물면서 늘 다시 거의(擧義)하여 원수를 갚고 나라를 되찾을 것을 의논하였”다고 했던 것이다. 1932년에 쓴 책에서 최호림이 동의회를 좌우 2파로 나누고, 안중근을 엄인섭, 장봉한, 최병준, 황병길과 함께 ‘동의회 좌파’인 최재형파 인물로 분류했던 것도 이와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1908년 국내진입 의병운동에서 패퇴한 후 안중근은 연해주와 흑룡주(아무르주)의 한인거주지들을 순방하였는데, 북으로는 멀리 아무르강가의 러시아와 중
국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사만리(블라고슬로벤노예)마을에까지 찾아갔다. 수청지방에서는 일진회 회원들에게 잡혀 목숨을 잃어버릴뻔 했다. 1908년 이후 의병운동이 쇠퇴하게 된 데는 러시아당국의 의병활동 금지정책이 가장 큰 원인이었지
만, 이에 못지 않게 한인사회의 의병활동에 대한 부정적 입장, 특히 의병운동의 최대후원자였던 최재형 자신이 의병운동과 거리를 두게 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재형은 1909년 봄 안중근 등 수청파가 중심이 된 한
인일심회를 적극 협조하였다. 이후 하르빈의거에 이르기까지 안중근은 각지를 순방하며 교육에 힘쓰고 국민 단합을 고취하였는데, 노보키예프스키에서는 최재형의 집에 머물면서 도움을 받았다.1908년 여름의 국내진공작전이후 침체된 상황에서 안중근이 중심이 되어 연추에서 결성한 단지동맹, 동의단지회는 “일심단체(一心團體)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기어이 목적으로 달성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안중근 등 12명이 결성한 동의단지회와의 관련성을 확인할 수 없으나 “최재형이라는 사람이 있어 우리 일을 만히 돌보아 주었”다는 우덕순의 회고를 보건대, 최재형이 안중근이 회장이었던 동의단지회 등의 활동을 여러 가지로 지원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현재로서 안중근이 하르빈으로 떠나가기 전에 최재형과 자신의 의중을 밝혔는지, 밝혔다면 어느 정도로 구체적으로 이토오 히로부미 처단계획을 협의했는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안중근이 하르빈으로 떠나기 전까지 노보키예프스키의 최재형 집에 기식하면서 후원과 보호를 받고 있었던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하르빈 의거 직후 일본당국이 최재형을 하얼빈 의거의 연루혐의자로 지목한 37명 가운데 첫 번째 인물로 지목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안중근이 하르빈 의거 공판투쟁에서 방어하고 숨기고자 했던 여러 사실 가운데 최재형과의 관계가 그 하나였다. 안중근은 우덕순과의 공모사실이나 1908년 여름 동의회 의병의 국내진공 참여 사실, 그리고 단지동맹의 결성 사실 등은 일본당국자들의 집요한 추적에 밀려 방어하는데 실패했지만, 대동공보 관계자들의 관여사실(유진율, 이강의 자금, 총기 제공문제)이나 최재형과의 관계를 숨기는데 성공하였다.안중근이 1910년 2월 7일에 열린 제1회 공개 공판정에 ‘팔도(八道) 의병총독(總督)’으로서 김두성이란 인물을 내세운 것 역시 한편으로는 자신의 공판투쟁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이와 아울러 이 전략은 최재형을 보호하고 그와 관련된 사실들을 숨기고자 했던 것이라 판단된다.
The Dongeuihoe(同義會, Association of Comrades) was the driving force behind the infiltration of the euibyeong(義兵, Righteous Army) into the border area of Korea in the summer of 1908. Choe Jae-hyeong and An Jung-geun were elected respectively as the president and council member of the Dongeuihoe. An Jung-geun led the right half of the euibyeong troops which attacked the northern border area across the Duman River. An's comrade, U Deok-sun was also a member of the the Dongeuihoe. The core force of the the Dongeuihoe was composed of young people of “the eighty seven group”whose key leaders were An Jung-geun, Eom In-seop and Gim Gi-ryong Choe Jae-hyeong had worked as the magistrate(doheyeon, 都憲) of the Ianchikhe(煙秋) prefecture located in the southern part of the Russian Maritime Province since 1893 and eventually became the most influential person among Koreans in Russia. It was his economic power and high reputation among local Russian authorities and Korean people which led to his presidency of the Dongeuihoe. Most of the political exiles who crossed the border to Russia sought asylum at Choe Jae-hyeong's residence in Ianchikhe village and Novokievskii(after 1905). An Jung-geun was among them. When the Dongeuihoe was divided between supporters of Choe Jae-hyeong and Yi Beom-yun, An Jung-geun sided with Choe and was one of nine key members of the Choe's group. An Jung-geun was unfavorable toward Yi Beom-yun's authoritative and feudalistic behavior. An Jung-geun once explained to a Japanese oliceman that he disagreed with Yi Beom-yun and accordingly had never worked together with Yi. Yu In-seok had commented in his letter to Choe Jae-hyeong that An Jung-geun and Choe were close comrades. Yu wrote, “An Jung-geun served as a soldier to Doheon(Choe Jae-hyeong) and always discussed with Choe about ways to initiate a movement for revenge upon the enemies and restoring the independence of Korea.” In his book, Choe Ho-rim grouped the members of the Dongeuihoe into two factions, right wing and left wing, and classified An Jung-geun into Choe' Jae-hyeong's left wing along with Eom In-seop, Jang Bong-han, Choe Byeong-jun and Hwang Byeong-gil. After the failure of the euibyeong army's attack on the Japanese border guard in the summer 1908, An Jung-geun visited Korean villages in the Russian Maritime Province and Amur Province. An Jung-geun visited a Korean village called Blagoslovennoe(Samanni in Korean) which was located by the Amur River in the Amur Province. In Suchan, An Jung-geun was captured and almost killed by the members of the Ilchinhoe(Advancement Society). Together
with the Russian policy of prohibiting the military activities of the euibyeong army, unfavorable opinions toward the euibyeong army among Koreans and Choe Jae-yeong's efforts to distance himself from the euibyeong group were contributing factors to the decline of the euibyeong activities since the Fall of 1908. evertheless, Choe Jae-hyeong supported the activities of the Ilsimhoe which An Jung-geun and his Sucha group organized in the early 1909. Since that time, An Jung-geun visited Korean villages and stressed the importance of education and the unity of Korean people. When An Jung-geun went to Novokievskii, he stayed at Choe Jae-heyong's residence. In spring of 1909, An Jung-geun cut off a ring finger together with eleven comrades organizing a secret society whose members were to “have one-mind and unity and devote themselves towards the independence of their nation.” U Deok-sun noted that Choe Jae-hyeong supported their activities in many ways and that Choe
Jae-hyeong' must have supported the activities of the Danji Dongmaeng (Society of Cut Fingers). We do not know whether An Jung-geun revealed his plan to assassinate Ito Hirobumi to Choe Jae-hyeong and if so, the extent to
which he discussed with Choe about his plan.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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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5-05-31 | 학술지명변경 | 한글명 : 외대사학 -> 역사문화연구 | KCI등재 |
200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2-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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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75 | 0.75 | 0.64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56 | 0.49 | 1.216 | 0.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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