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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後期 寶城士人 朴馨德의 生涯와 鄕村敎化策 = Park Hyeong-Deok(朴馨德), an Aristocrat in Boseong in the Late Chosun, his Life and Scheme for the Community Reclamation
저자
김봉곤 (전남대학교)
발행기관
학술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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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연도
2009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후보
자료형태
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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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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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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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수령권이 강화되고 재지사족들의 향촌지배력이 약화된 조선 후기 특히 정조 연간과 순조 초에 보성출신의 士人 박형덕이 어떻게 사족으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향촌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는가를 살펴본 글이다.
박형덕은 선조 때의 보성의 유명한 학자였던 朴光前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나, 그가 살았던 시기는 사족들의 향촌지배력이 점차 약화되고 있었던 때였다. 이에 그는 향교를 출입하고 수령과 교유하면서 향촌사회에서 사족의 위상을 높이려고 하였고, 同姓村落을 새롭게 마련하여 족적 결속과 문중세의 확산에 노력하였다.
그는 우선 농촌에서의 농업생산력 증대에 주력하였다. 그는 불균등한 토지 소유나 三政의 문란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각종 농법을 보급하거나 개선하여 농업 생산력의 증대를 꾀하였다. 당시 빈부격차가 극심한 현실에서 사족이나 농민들이 어느 정도 농지를 갖고 생산 활동에 종사하여 부가 축적되어야 부모를 봉양하거나 유교적 예속을 실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796년에 寶城 鳴鳳洞으로 동족들의 거주지를 옮긴 이후에 새로운 정착지에서 유교적인 윤리를 통해 동족들의 결속을 도모하는 한편, 보성지역을 유교적으로 교화하고 유교적인 예속을 보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수령에게 건의하여 鄕校-面訓長-書堂의 敎育體系를 보성지역에 구축하고자 하였으며, 『小學』 교육을 통해 올바른 심성의 도야를 꾀하였다. 또한 향약을 실시하여 부모나 부자, 친척, 붕우, 이웃 간에 孝悌나 和睦 등 유교적 도덕을 확립하고 관・민간에 기강을 확립하고자 하였으며, 鄕飮酒禮 등의 유교적 예속을 널리 보급하고자 하였다. 그의 이러한 향촌 교화책은 정조 대 이후 정학을 숭상하고 이단을 배척하려고 하였던 국가의 정책에 사족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사족의 역할을 증대시키려고 하였던 것과도 관계가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실제 『소학』을 교육하거나 향음주례에도 직접 참여하였으며, 鄕約長이 되어 향약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또한 서원이나 사우에 배향된 인물에 대한 충절과 효행을 찬양하거나, 수령들에게 많은 충절 인물에 대한 표창이나 지원을 부탁하였다. 이러한 그의 활동으로 향촌사회에서의 그의 명망이 크게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그가 옮겨간 마을이나 보성 지역에 유교적 예속과 기풍이 크게 장려되었다. 19세기에 이르면 보성 지역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효자나 열녀가 다수 배출되었으며, 한말에는 일제의 부당한 국권 침탈에 맞서서 의병운동이 크게 일어나게 되었는데, 박형덕과 같은 향촌 지식인의 교화활동과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This paper describes the life of Park Hyeong-Deok, an aristocrat who was from Boseong, and his scheme through which he helped the local nobility raise its status and have an influence on the community in the late Chosun period when county magistrates(守令)'s power was becoming bigger, and on the other hand, the local aristocrats were losing their influence.
Park was a descendant of Park Gwang-jeon, who was a renowned scholar in Boseong when the king was Seon-jo. When he lived, the local aristocrats were losing their control over the community. So, he tried to regain their authority by joining Hyangyo(鄕校 County School) and mixing with the county magistrates(守令), and he also made efforts to strengthen family ties and increase the clout of lineages by establishing new communities consisting of same family names.
He first paid attention to improving agricultural production. He was critical of the inequality of landownership and the breach of Sam-Jung(three administrative policies) and he attempted to disseminate and refine various agricultural techniques to increase production. At the time, the gap between rich and poor was very huge, and people needed land to make a living by farming so that they could support their family and implement Confucian obligations.
He moved the residence of his relatives to Myeongbongdong in Boseong in 1796, and promote the domestic union in the new location. Furthermore, he tried to reclaim the Boseong area through Confucianism. He suggested to the local official an idea to build an educational system in Boseong, and gave efforts to help people to develop their mind by teaching them Sohak. Besides, he practices Hyang-yak to raise Confucian morality such as order and harmony, and tried to spread the Confucian manners. His scheme for the community reclamation was closely related with the aristocrats' efforts to strengthen their influence by participating in the government's policy to pursue the originality of Confucian and exclude heterodoxy.
He taught Sohak(小學) and took part in Hyang-eum-ju-lae(鄕飮酒禮), and he was the head of Hyang-yak(鄕約). He also praised the loyalty and filial piety of the figures who were enshrined in Seowon(書院) or Sawoo(祠宇), and suggested to the officials providing support and commendation to them. Thanks to all of his efforts, he earned high reputation in the community, and the Confucian manners were promoted through the areas where he was staying. By the 19th century, there were lots of filial sons and daughters in Boseong, and there were the resistance of the loyal troops against Japanese invasion, which was closely related with the efforts of the local literati like Park.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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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8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2-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20-03-26 | 학회명변경 | 영문명 : Chonnam National University Honam Study Center -> Institute of Honam Studies | KCI등재 |
2019-06-24 | 학술지명변경 | 한글명 : 호남문화연구 -> 호남학외국어명 : The Journal of Honam Area Studies -> The Journal of Honam Studies | KCI등재 |
2019-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 KCI등재 |
2018-12-01 | 평가 | 등재후보로 하락 (계속평가) | KCI후보 |
201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FAIL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12-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기타) | KCI후보 |
2011-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10-01-01 | 평가 | 신청제한 (등재후보1차) | |
2009-06-28 | 학술지명변경 | 외국어명 : 미등록 -> The Journal of Honam Area Studies | KCI후보 |
2009-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2차) | KCI후보 |
2008-08-18 | 학회명변경 | 한글명 : 호남문화연구소 -> 호남학연구원영문명 : Chonnam National University Honam Culture Research Center -> Chonnam National University Honam Study Center | KCI후보 |
2008-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6-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2016 | 0.32 | 0.32 | 0.3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38 | 0.41 | 0.508 | 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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