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언어, 재현의 경계에서― 스나이더의 공(空)의 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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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연도
2015년
작성언어
Korean
자료형태
한국연구재단(NRF)
공(空), 즉 부재를 담아내는 스나이더의 시 속에서 전통적 이원대립항과 주체/타자의 이분법은 리얼리티를 이해하고 언어화하는 추상적 사고 자체가 문제시되면서 전복된다. 구문적, 구조적 생략이라든가, 이미지를 완전히 고정시키길 거부하면서 세계를 경험하는 일상적 방식을 흐트러뜨리는 것, 행, 연, 시 형식을 파괴하고 의미 형성 자체를 문제시하는 것 등은 기존 시의 문법적, 구문적, 의미적 공간을 언어가 이론적으로 생성할 수 없는 즉각적 인식을 선취하는 장으로 변화시킨다. 조건화된 리얼리티 중 가장 조건화된 언어를 어떠한 언어적 접근도 가능하지 않은 대상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하면서 그의 시는 언어만큼이나 공백에서도 의미를 담는 시가 된다. 대표작 「다진돌」(“Riprap”)이 보여주듯이 그의 시는 구체화된 바위들을 형상화하면서도 그 돌들 사이에 항상 여백과 공간을 마련한다. 그는 궁극적 재현의 대상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 시적 행위의 주체인 화자 자신도 제거하면서, 주체와 대상이 사라진 공간 속에서 “사고의 정지”(thought-pause)라는 빈틈과 간극을 마련하여 독자로 하여금 그 빈 공간을 통해 새로운 직관적 인식으로 나가도록 유도한다. 스나이더는 시인이나 독자가 쉽사리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을 통해 시를 그 자신의 지적대로 “비언어적인 의미”로 다가서기 위한 매개로 만든다. 일인칭 화자와 타동사를 사라지게 하고 수식과 논리적 연결을 생략하며 병렬적으로 제시되는 스나이더의 언어는 “사고의 정지”를 불러일으키면서 선불교에서의 공의 개념을 형식 자체에 새겨놓는다. 스나이더의 시는 현상계의 구체적 이미지들로 채워져 추상화를 벗어나있지만 이 이미지들은 역설적으로 써놓은 것만큼 쓰지 못한 것을 환기시키며 그 구체성 속에서 초월을 지시한다. 탈근대의 언어관을 따른다면 스나이더의 공(空)은 거대한 우연적 차이의 체계인 언어를 초월하거나 버려야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성(佛性)은 언어와 달라 조건화되어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따라서 언어에 의해 포착되지도 않는다. 이런 면에서 스나이더의 공은 불가능한 텔로스이지만 이것은 역설적으로 그의 시를 언어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강력한 수단으로 만든다. 스나이더는 비지시적이며 이접적인 시를 통해 의미화의 기제를 비우면서 언어를 통해 언어를 초월하게 만드는 능력을 보여주며, 어떻게 동양의 시에서 나타난 비언어적 공을 영시의 재현의 전통 속에 접목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직접적 체험의 매개되지 않은 인식, 이는 언어 없는 깨달음을 의미한다. 즉각적이면서도 무매개적인 인식과 경험이란 반이론적, 반문화적, 낭만적인 관념이다. 이는 현대 문학 비평의 대전제, 즉 선행하는 언어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보는 언어 지상주의에 도전하며, 언어의 절대적 특권에 근본적 질문을 제기한다. 그의 ‘공의 시학’ 은 탈근대의 언어 절대주의와 위축된 주체, 재현의 기능과 가능성에 대한 회의적 전제들을 되짚길 요구하며, 서구의 학문적 전제에 적지 않은 도전과 반성을 요구한다. 본 연구는 ‘공의 시학’을 통해 새로운 언어, 주체, 재현의 가능성을 모색하면서 지금 우리의 학문 풍토와 패러다임의 한계를 광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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