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
저자
발행사항
용인 : 단국대학교 대학원, 2015
학위논문사항
학위논문(박사) -- 단국대학교 대학원 , 사학과 한국사 전공 , 2015. 2
발행연도
2015
작성언어
한국어
발행국(도시)
경기도
기타서명
A Study on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fter Liberation
형태사항
vii, 242 p : 삽화 ; 30 cm.
일반주기명
단국대학교 학위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지도교수:한시준
참고문헌 : p.202-222
소장기관
이 논문은 해방 후 大韓民國臨時政府와 임시정부 세력이 1948년까지 존속하고 활동했던 실체를 규명하고 정리한 것이다. 1945년 8월 해방을 맞은 후 1948년 8월까지 활동했던 임시정부와 그 세력에 대해 노선과 조직체제의 변화 과정, 해방 후 전개한 정치활동과 외교 및 군사․선전활동 등을 살펴보았다.
해방을 맞은 임시정부는 통일적이고 자주적인 민족국가를 수립하고자 했다. 임시정부는 三均主義에 기초한 「建國綱領」의 민족국가 건설 방향과 노선을 계승한 환국방침과 「당면정책」을 발표하고 정부로서 환국하여 국내에 과도정권을 수립한 뒤 그 법통과 직능을 봉환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중국․미국 측에 ‘승인외교’ 활동과 환국과 관련된 교섭을 진행했다.
환국 교섭과 함께 임시정부는 외교와 군사 활동을 전개하였다. 임시정부는 중국 내 동포들의 생명과 재산보호 및 안전한 귀국을 위해 韓僑宣撫團과 駐華代表團을 조직했다. 또한 주화대표단을 통해 임시정부의 우방이자 지지 기반이었던 중국 정부와의 관계를 지속해 나갔다. 독립국가 수립에 필요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 확군운동도 전개하였다. 확군운동은 韓國光復軍의 조직과 세력을 확대시키는 방법으로 추진되었고, 그 결과 중국 내 각 지역에 6개의 暫編支隊와 국내지대가 편성되었다. 하지만 중국 측의 확군 금지조치 등 내외적인 문제로 활동이 불가능해진 한국광복군은 1946년 5월 16일 해산하였다.
임시정부는 개인자격으로 환국했지만 국내에서 ‘정부’로서 과도정권 수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좌익진영 및 미군정․이승만의 정계 통합 방안을 거부하고 特別政治委員會를 설치하여 독자적으로 임시정부 중심의 민족통일전선과 과도정권 수립을 추진하였다. 또한 정치공작대와 행정연구위원회를 내무부 산하에 조직하여 임시정부의 조직을 확대․강화하고 국민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1945년 12월 28일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 소식이 전해지자 임시정부는 반탁운동과 임시정부 봉대운동을 추진했다. 임시정부는 긴급 국무위원회를 개최하고 산하에 信託統治反對國民總動員委員會를 조직하여 각 정치단체와 국민들과 함께 거국적인 반탁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계를 주도한 임시정부는 12월 31일 미군정으로부터 ‘정권 접수’를 시도했다. ‘정권 접수’ 시도가 좌절되자 1946년 2월 1일 非常國民會議를 소집하여 과도정권을 수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가 2월 14일 미군정의 자문기구 民主議院으로 전락되면서 이러한 노력은 좌절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과도정권 수립 운동은 임시정부의 위상과 노선 및 세력을 축소․변화시켰다. 미군정은 임시정부의 해체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비상국민회의 소집 과정에서는 朝鮮共産黨과 金元鳳․金星淑 등이 주도하는 朝鮮民族革命黨과 朝鮮民族解放同盟 계열 등 좌익진영을 하나로 통합하지 못하였다. 때문에 해방 이전 좌우연합정부와 통일의회 체제를 가지고 있었던 임시정부의 조직과 체제는 축소되었다. 임시정부의 노선 역시 반탁과 임시정부 법통성에 동조했던 李承晩․韓國民主黨 등 우익진영과 연대․연합함으로서 ‘우파합작노선’으로 전환되었다. 이로써 임시정부는 그 명의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그 위상 역시 위축되고 말았다.
이처럼 임시정부는 1946년 2월 이후 그 명의를 사용하지 못했다. 위상과 가치 역시 국내 정치 세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지속적으로 축소․약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韓國獨立黨과 臨時議政院의 법통과 직능을 계승한 비상국민회의(국민의회),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주요 인사를 포함한 임시정부 세력을 통해 임시정부의 정신적 자산과 법통성을 유지시켜 나갔다.
임시정부 세력은 1947년 제2차 반탁운동과 임시정부 봉대운동을 재개하였다. 당시 미군정은 좌우합작위원회와 입법의원을 자신의 의도대로 추동하고 있었고, 동시에 소련 군정과 함께 반탁 세력을 배제하는 방법으로 미소공동위원회 재개를 추진하고 있었다. 김구와 이승만은 미군정의 계획대로 이끌려 가는 국내 정세에 공동으로 대응하기로 결정했다. 합의에 따라 김구와 임시정부 세력은 국내에서 1947년 1월 24일 반탁운동을 주도할 反託獨立鬪爭委員會를 결성하여 조직적이고 거국적인 반탁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신탁통치 반대운동으로 정국을 주도하게 된 임시정부 세력은 재차 과도정권 수립을 추진하였다. 우선 1947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제2차 전국대의원대회를 소집하여 그 명칭을 國民議會로 바꾸고 3월 3일 임시정부 봉대를 통한 과도정권을 수립했다. 하지만 미군정의 저지와 이승만 및 한국민주당의 거부로 공식적으로 성립되지 못했다. 이로서 국내에 들어가 과도정권을 세우고 임시정부의 모든 것을 인계한다는 방침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김구와 임시정부 세력은 ‘남한단정’과 ‘남한단선’을 반대하고 통일국가 수립을 추진하였다. 1947년 상반기 이승만에 의해 ‘남한단정론’이 대두되었고, 이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과 9월 17일 미국이 한국문제를 UN에 이관하자 이승만과 한민당 등 우익 세력에 의해 더욱 강력하게 확대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국민의회와 한국독립당은 남북총선거를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이를 위해 제43~44회 임시의회에서 조직을 쇄신하고 「대한민국 헌장」과 선거법을 제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국민의회와 한국독립당은 분열․축소되었다. 국민의회의 한 축이었던 獨立勞動黨과 임시정부를 지켜왔던 李始榮이 국무위원과 국민의회 및 한국독립당을 떠났다. 또한 한국독립당은 입법의원 및 미소공동위원회 참여를 주장했던 黨內 국민당․신한민족당 계열을 1947년 6월 제명시킴으로써 당세도 크게 약화되고 말았다. 이로써 임시정부 세력은 더욱 축소되었고 정치적 입지도 약화되었다.
임시정부 세력의 노선은 통일정부 수립으로 변화되었다. 1948년 1월 김구는 미소 양군 철수→ 남북지도자회의→ 남북총선거를 통한 통일된 자주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특히 한국문제 해결을 위해 남북지도자회의 소집을 요청하였다. ‘남한단정’을 주장했던 이승만 및 우익진영과 단절하고 김규식을 포함한 중간파와 연대를 통한 통일정부수립운동으로 임시정부 세력의 노선이 변화한 것이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이 열렸다. 2월 26일 UN소총회에서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자 임시정부 요인들은 단독선거 출마를 거부하고 북측에 남북지도자회담을 제의했다.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협상에서는 전국 총선을 통한 통일국가 수립과 남한 단선․단정 등을 반대한다는데 합의했다. 하지만 이러한 합의는 실현되지 못했다. 남북협상을 통해 민족의 분단을 저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던 임시정부 세력의 노력은 좌절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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