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I등재
百濟 都城의 始末
저자
朴淳發 (충남대학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13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KDC
911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1-34(34쪽)
제공처
본고는 백제 각 시기 도성의 定都와 廢都 과정을 검토하였다. 한성기 도성은 하북위례성→하남위례성→한산·한성으로 이해되는데, 하북위례성의 위치는 확실치 않다. 하남위례성은 풍납토성으로 판단되며, 대략 2세기대에 등장한 것으로 보이는 환호 취락이 백제 국가 성립기인 3세기 중후엽에 성벽취락으로 전환되었다. 거의 동시기에 몽촌토성 도 축조되었으나, 왕의 거소로 사용된 시기는 근초고왕대인 371년 “移都漢山” 이후이다. 그 무렵 지명의 漢子化와 더불어 慰禮城은 漢城으로 표기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성은 475년 함락 직 전까지 풍납토성(北城 혹은 大城)과 몽촌토성(南城 혹은 王城)으로 구성된 양성 체제로 유지되 다가 주민의 다수인 8,000여 명이 고구려 지역으로 遷徙되면서 도시적 기능이 상실되고, 그 가운 데 몽촌토성은 고구려 군사의 거점으로 전환되었다. 그 무렵 고구려군은 금강유역 이남의 대전지 역까지 남하하여 熊津으로 천도한 백제를 위협하였으며, 남한지역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고구려 횡혈식석실묘가 분포하는 경기 남부 수원·용인~충북 충주 이북은 고구려의 지방으로 실질적인 지배가 이루어졌던 고고학적 근거로 이해된다. 한성 함락의 위급 상황을 맞아 웅진에 정도한 배경은 한성기에 이미 그곳에 군사 거점성이 마 련되었고 王·侯와 같은 지방 수장의 居官이 있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지형적 한계로 인한 잦은 풍수해와 도시 공간의 부족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비로 천도하였다. 천도 이후 웅진은 5方 가운데 하나인 北方으로 전환되었다. 사비 신도성 조성 과정에 소요되는 工役과 신도성 거주 인구 확보를 위해 대략 武寧王 시기에 “內外遊食者歸農” 등 일련의 조치가 취해졌으며, 그 가운데 車嶺 이북 한강 이남 주민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사비도성 내부 최하층에서 출토되는 고구려계 토기가 이후 백제의 泗沘樣式 土器로 정착되고 있는 점은 그러한 사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비도성의 폐도는 660년 7월 당과 신라 연합군에 의해 도성이 함락되고 왕을 포함한 12,000 여 명의 주민이 당으로 압송되면서 도시 기능이 소멸되었으나,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한 사비도성 핵심지역은 백제 고지 지배를 위한 唐 熊津都督府 관부의 소재지로 전환되었다. 大唐銘 와당· 당 연화문 와당 출토 와요지·首府銘 인각와 등이 그러한 사정을 전하고 있다. 수부명 인각와의 “首府”에 대해 그간 구체적 검토 없이 백제가 그들의 都城을 自稱한 것으로 이해하였으나 이는 잘못이다. “首府”라는 단어 자체가 문헌에 등장하는 시점은 淸代 1697년에 판각된 『貴陽通志』에서이며, 지방의 최고 행정단위인 省 소재지, 자치주나 자치구의 정부 소재 지, 속국이나 식민지 지배기구 소재지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부 여 출토 수부명 인각와는 “首府”의 最古 용례로서 그 자체 동아시아적 중요성을 가진다. 수부명 인각와는 대당명 와당 등 당 웅진도독부 존속기간에 제작된 당계 와당과 공반되는 점이나 백제 인각와의 원형 印郭과 다른 장방형 인곽으로 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백제 멸망 이후에 제작된 것 으로 판단된다. 부여에서 집중 출토되고 있는 당 웅진도독부 관련 고고자료로 보면, 그간 고대사 학계에서 통설로 여기고 있는 662년 웅진도독부 공주 移置說은 성립되지 않는다.
더보기This article manipulated the problems with the foundation and transfer of a series of Baekje capital. The first capital, called Habookwylesung(河北慰禮城), assumed to be located in some place of northen part of Han river, where archaeological evidence has been found never. Hanamwylesung(河南慰禮城) transferred to the southern part of Han river, has been attributed to Pungnab(風納) earthen wall site in which the village surrounded ditches had erected ca. in 2nd century A.D, and modified to earthen wall town in the late 3rd century A.D. with the occurrence of full fledged Backje state. Thereafter, often called Hansung(漢城) period`s Backje capital had been composed of two earthen walled town ; above mentioned Pungnab, and newly founded Mongchon(夢村) site that used for another palace since 371 A.D. Hansung period`s Backje capitlal was been fallen by Goguryo(高句麗) attack at 475 A.D. when most of Backji people had been moved into Goguryo with consequently vacant city excepting Mongchon earhen wall reused as Goguryo military camp. e emergent situation of Hansung capital falling compelled Baekje move her capital to Ungjin(熊津) that is now Gongju city Chungnam province. Ungjin assumed to one of the base of late Hansung period`s Baekje regional ruler. But was Ungjin never suitable place to long-term capital. ereby assumed to begin soon new capital building project at another place. The result of some long range plan of new capital was Sabi(泗沘) capital, where is now Buyo prefecture Chungnam province. Sabi was the last capital of Baekje from 538 to 660 A.D, when Tang(唐) and Shilla(新羅) allied forces fell the capital. On the falling of Sabi capital was been moved a number of resident into Tang, thereby the cease of city function. After the withdrawal of her main force Tang established ruleing system of Xiungjindudufu(熊津都督府) at Sabi, assumed to Busosansung(扶蘇山城) fortress, the back secret garden of Baekje`s palace. Roof tile ornament with Datang(大唐) letters, lotus leafs and Subu/Shou Fu(首府) letters stamped roof tile etc. ever found in Buyo well fits such historical situation. In Korean ancient history academic circles has been there Some argument around the first location thereafter movement of Xiungjindudufu to Gongju city. Archaeological evidences above mentioned clearly tell us that the location of Xiungjindudufu was Buyo, the last capital of Baekji from 660 to 672 A.D the final withdrawal of Tang ruling system. Lastly, a noteworthy nding is that Shou Fu word already used in the half of 7th century and this is the oldest case in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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