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I등재
華夷觀과 文明ㆍ野蠻觀의 思惟 接點과 批判的 省察 = 'Hwa-Ih-gwan/華夷觀', and the Perception of the Civilized and the Barbaric -Determining where such thinkings cross paths, according to certain critical analyses
저자
이경구 (한림대학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09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발행기관 URL
수록면
109-142(34쪽)
KCI 피인용횟수
7
DOI식별코드
제공처
'Hwa-Ih-gwan/華夷觀', which for a long time had perceived the East Asian world as a space composed of different level of layers, also perceived the East Asian world as one which had 'dual' meanings, and dual aspirations. On one hand, it emphasized the fact(or notion) that races or peoples were inherently different, by their very nature. On the other, it supported the notion that it was possible to 'remodel' a race or people with the generally embraced qualities of a universal('superior') culture as a barometer. Such duality, in terms of meaning and aspiration, was actually very similar to another kind of structural duality that was displayed inside the modern East Asian community, in which the general notion of (the coexistence of) 'Civilized' and 'Barbaric', and concepts of discrimination and remodeling tagged to such notions, practically all coexisted.
Examined in this article, are the paths such notions and aspirations actually took, and also at what points they came across and philosophically encountered each other. And in the end of such examination, hopefully the similarities among certain 'critical analyses' of such notion of discrimination that existed in both the premodern periods and the modern period, produced and provided by the intellects of East Asia, would be determined.
The premodern period's intellects in East Asia all presented different levels of emphasis upon the meaning of 'Hwa-Ih-gwan/華夷觀', based upon their own times and places. Yet coming into the 18th century, the 'Hwa-Ih-gwan' perceptions of each of the three countries in (North)-east Asia started to exhibit noticeable changes within in their own. Joseon dynasty's Hong Dae Yong figured that when an entity, keenly aware of the 'relativity' of individual entities, could abandon and simply drop its own perception of itself as a sort of 'center', and only then one could acknowledge and appreciate the unique and natural values of other entities(in this case, countries) as well. On the other hand, Qing dynasty's Yongzheng emperor figured that the position of 'Civilized' and 'Barbaric' could always shift, as one could remodel itself to practice general(universal) virtues and morals. Yet in his case it was not like a goal was set to eliminate the differences between races and peoples. It was rather a notion that demanded the self-realization to be taken on the part of 'barbaric ones'. And as a third example, Japan's Asami Keisai acknowledged the relative nature of individual entities, yet argued that 'self-centered' notion of oneself be reinforced, and the absolute fix (in terms of acting and perceiving things) upon oneself be maintained.
Since the beginning of the modern period, the Western style perception of the 'civilized and barbaric' that East Asia came into contact for the first time, continued to conflict and clash wish the existing 'Hwa-Ih-gwan' perception. The concepts that were originally built inside 'Hwa-Ih-gwan' were replaced with new ones such as 'civilized' and 'barbaric' from the outside world. Yet the process was never a unilateral replacement. A merging was also happening at the same time. The process itself was made possible because there was already a background, namely concepts and terms that served the very purpose similar to those served by the aforementioned, newly imported concepts regarding 'the civilized and the barbaric'.
In the meantime, the East Asian intellects tried to present alternatives that could go beyond the concept of civilized and barbaric. They did not acknowledge the Western civilization as an absolute model or barometer to be observed or abided by. They suggested the existence of a 'General civilization', and then emphasized the relative importance of the sub-cultures under the influence of such general civilization. Their discussions turned out to be quite similar to the process which was featured by certain efforts in the 18th century designed to overcome the traditional 'Hwa-Ih-gwan' perception.
They...
동아시아를 차등 공간으로 보았던 華夷觀은 이중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종족 또는 민족성을 강조하는 차별 의식과 보편 문화를 통한 개조 가능성이 그것이다. 그 이중성은 근대 동아시아 사회가 접한 문명ㆍ야만관의 보편 및 차별ㆍ개조라는 의미와 구조적으로 닮아 있다. 본고는 그 사유 구조의 접점을 지적하는 데서 출발한다. 한편 동아시아의 지성들은 전근대와 근대에 걸쳐 그 차별 논리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었다. 그 비판의 논리적 유사성을 검증하는 작업이 본고의 도착점이다.
전근대 동아시아의 지성들은 화이관의 의미를 시대와 처지에 따라 다양하게 강조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동아시아 3국의 화이관은 중대한 변화를 보였다. 조선의 홍대용은 個物의 상대성을 인지한 주체가 ‘자기 중심성’을 폐기한다면 각각의 고유한 가치를 상호 승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청의 雍正帝는 보편 윤리를 실현한다면 화이가 언제든 바뀔 수 있다고 보았지만, 그 목적은 이질성의 극복이 아니라 이민족의 자각이었다. 일본의 아사미 케이사이는 주체의 상대성을 승인하였지만 자기 중심성을 강화하여 주체의 절대성을 지향하였다.
근대 이후 동아시아가 접한 서구식 문명ㆍ야만관은 기존의 화이관과 충돌을 일으켰다. 화이 개념에 연관된 개념들은 문명ㆍ야만에 연관된 새로운 개념들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전환의 한편에 습합 또한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문명ㆍ야만과 유사한 어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적어도 수용을 위한 발판은 내재했던 것이다.
한편 동아시아 지성들은 문명ㆍ야만을 넘어서는 대안을 성찰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서구 문명을 절대적 기준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보편 문명을 설정하고 그 하위에 존재하는 문명들의 상대성을 강조하였다. 그들의 논의는 18세기 화이관 극복의 과정과 유사하다. 나아가 그들은 화려한 서구 문명의 이면에 내재한 부조리와 침략성을 지적하며, 각 문명의 조화 속에 이루어지는 평화적 국제 질서를 구상하였다. 그들의 성찰은 선진화ㆍ세계화가 여전히 일방으로 작용하는 지금의 동아시아 질서를 탈주하는 또 하나의 길이 될 수 있다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
2027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1-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2-05-02 | 학술지명변경 | 한글명 : 유교사상연구 -> 유교사상문화연구외국어명 : THE STUDY OF CONFUCIANISM -> THE STUDY OF CONFUCIAN PHILOSOPHY AND CULTURE | KCI등재 |
2011-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9-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8-10-09 | 학술지명변경 | 외국어명 : 미등록 -> THE STUDY OF CONFUCIANISM | KCI등재 |
2006-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5-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FAIL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3-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2016 | 0.6 | 0.6 | 0.55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53 | 0.53 | 1.438 | 0.14 |
서지정보 내보내기(Export)
닫기소장기관 정보
닫기권호소장정보
닫기오류접수
닫기오류 접수 확인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확인
닫기이용약관
닫기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약관 (2017년 1월 1일 ~ 현재 적용)
학술연구정보서비스(이하 RISS)는 정보주체의 자유와 권리 보호를 위해 「개인정보 보호법」 및 관계 법령이 정한 바를 준수하여, 적법하게 개인정보를 처리하고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에 「개인정보 보호법」 제30조에 따라 정보주체에게 개인정보 처리에 관한 절차 및 기준을 안내하고, 이와 관련한 고충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개인정보 처리방침을 수립·공개합니다.
주요 개인정보 처리 표시(라벨링)
목 차
3년
또는 회원탈퇴시까지5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3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2년
이상(개인정보보호위원회 : 개인정보의 안전성 확보조치 기준)개인정보파일의 명칭 | 운영근거 / 처리목적 | 개인정보파일에 기록되는 개인정보의 항목 | 보유기간 | |
---|---|---|---|---|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자 가입정보 파일 | 한국교육학술정보원법 | 필수 | ID, 비밀번호, 성명, 생년월일, 신분(직업구분), 이메일, 소속분야, 웹진메일 수신동의 여부 | 3년 또는 탈퇴시 |
선택 | 소속기관명, 소속도서관명, 학과/부서명, 학번/직원번호, 휴대전화, 주소 |
구분 | 담당자 | 연락처 |
---|---|---|
KERI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정보보호본부 김태우 | - 이메일 : lsy@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439 - 팩스번호 : 053-714-0195 |
KERI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개인정보보호부 이상엽 | |
RIS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대학학술본부 장금연 | - 이메일 : giltizen@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149 - 팩스번호 : 053-714-0194 |
RIS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학술진흥부 길원진 |
자동로그아웃 안내
닫기인증오류 안내
닫기귀하께서는 휴면계정 전환 후 1년동안 회원정보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으신 관계로 개인정보가 삭제되었습니다.
(참조 : RISS 이용약관 및 개인정보처리방침)
신규회원으로 가입하여 이용 부탁 드리며, 추가 문의는 고객센터로 연락 바랍니다.
- 기존 아이디 재사용 불가
휴면계정 안내
RISS는 [표준개인정보 보호지침]에 따라 2년을 주기로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관하여 (재)동의를 받고 있으며,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휴면계정으로 전환됩니다.
(※ 휴면계정은 원문이용 및 복사/대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휴면계정으로 전환된 후 1년간 회원정보 수집·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RISS에서 자동탈퇴 및 개인정보가 삭제처리 됩니다.
고객센터 1599-3122
ARS번호+1번(회원가입 및 정보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