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I등재
榮留王代 政局主導權의 變化樣相과 淵氏勢力
저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09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95-130(36쪽)
KCI 피인용횟수
11
제공처
榮留王代(618~642)의 정국운영에 대한 기존연구의 대체적인 견해는 온건한 성향의 정치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해 나갔고 이러한 분위기가 642년 淵蓋蘇文政變이 발생되는 시점까지 지속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기존연구에서 영류왕대의 정국운영을 위와 같은 구도에서 인식한 근거는 영류왕 즉위 후 외교노선이 급격히 온건한 방향으로 흐르는 정황이다. 그러나 618년 영류왕이 즉위한 이후부터 630년대 초반까지의 대외정책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것은 강경책과 온건책이 적절히 결합된 정상적인 외교노선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대백제·대왜관계라든지, 천리장성의 축성, 그리고 7세기 초반 중원세력의 재편과정에서 나타난 국제정세의 변화 등으로 볼 때 영류왕대의 외교노선은 영양왕대의 그것에서 급격히 변화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당시 외교노선의 부분적인 변화를 근거로 정치세력의 교체를 가정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영류왕의 즉위로 정치세력이 교체되지 않았다면, 다시 말해 온건한 성향의 국내계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영류왕대의 정국운영은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사실 영류왕대에 국내계세력이 장악했다고 하는 견해는 그 자체에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훗날 영류왕과 대립하게 된 연씨세력은 평양계세력의 대표적인 귀족세력으로 강경한 성향을 지녔던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한다면 연씨세력은 영류왕대의 세력교체 과정에서 도태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연씨세력은 영류왕이 즉위하면서부터 오히려 권력기반을 더욱 탄탄히 다져나가게 된다. 이는 금석문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모순이 발생되는 원인은 기존연구에서 연씨세력을 평양계세력으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금석문에 나타난 그들의 가문내력이 비교적 짧다거나 혹은 고구려왕실과의 친연성을 강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인들의 묘지명을 전체적으로 분석해 보면 연씨세력의 가계서술 방식은 보편적인 방법을 따르고 있다. 즉 묘지명의 가계서술 형식을 가지고 가문내력의 길고 짧음을 판단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東部라는 거대한 세력기반을 소유하고 있었고, 물에서 기원했다는 신화적 전통을 간직하고 있었던 고구려의 대표적인 귀족세력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연씨세력을 평양천도 이후 갑자기 출현한 신진귀족세력으로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평양계세력과 국내계세력의 대결이라는 구도는 427년 평양천도 이후의 정치를 묘사한 개념이다. 이것을 618년 영류왕이 즉위하는 시점까지 끌고 와서 적용시킨다면 영류왕대의 정치사는 강경세력과 온건세력의 대결구도 속에서 이해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는 당대의 정치사가 2분법적 대결구도로 단순화 된다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따라서 영류왕대의 정치사는 위와 같은 구도에서 벗어나서 인식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영류왕대의 정국운영을 새롭게 들여다보면 연씨세력은 영류왕 즉위 초에 정치적인 협력관계를 형성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들이 영류왕 즉위 후 막리지를 역임하게 된다든지, 영류왕이 귀족연립정권 아래에서 영양왕의 적장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을 유추해보면 양자의 결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630년대 경관파괴를 기점으로 영류왕의 정국주도권이 약화되면서부터는 연씨세력이 고구려의 권력을 장악해 나갔고 이때부터 연씨세력과 영류왕은 정치적인 대립관계를 형성시키게 되었다. 당시 연씨세력의 입지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은 ‘병권을 장악하여 기세가 삼한을 아우르고 명성은 5부의 우두머리가 되었다.’는 금석문의 기록이다.
그런데 630년대 말 연씨세력의 대표 격인 연태조가 사망하고 신라 칠중성에 대한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면서부터는 정국의 주도권은 다시 영류왕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재차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영류왕은 태자를 입조시키는 등의 급진적인 친당정책을 추진하여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정적인 연씨세력의 약화를 유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연씨세력의 새로운 수장인 연개소문과 영류왕의 대립이 본격화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타난 영류왕대 정국주도권의 변화양상은 뒤에 일어나는 연개소문 정변의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게 된다.
The political situation during the ruling time of King Yeongryu has been understood by the two main theories. The one is the coalition government by nobles(貴族聯立政權) and the other is the competition between the faction of Pyeongyang(平壤系勢力) and the faction of Gugnae(國內系勢力). From the end of 6th century to the early of 7th century, the faction of Pyeongyang had assumed that they had the political power of Goguryeo(高句麗). But after King Yeongryu(榮留王) was crowned in 618 the faction of Pyeongyang fell into a decline. On the other hand the faction of Gugnae entered into the politics of Goguryeo.
By the way Yeongaesomun’s family(淵氏勢力) was the member of the faction of Pyeongyang. So they also fell into a declined. And from that time, King Yeongryu became the political opponent of Yeongaesomun’s family. Especially in 640th, when the threat from Dang dynasty was approached the above two people conflicted with the policy dealing with the threat. The King Yeongryu insisted on peace, on the other hand Yeongaesomun maintained the strong action. In the result Yeongaesomun raised in revolt against King Yeongryu and killed him. This is the general understanding about the political situation during the ruling time of King Yeongryu,
But it is doubt that Yeongaesomun’s family was the member of the faction of Pyeongyang. And also after King Yeongryu was crowned in 618 the faction of Pyeongyang fell into a decline indeed. Through the historical materials it doesn’t seems like that. When King Yeongryu was crowned Yeongaesomun’s family must have supported with him. More over they still had been maintaining their political power even after the accession of King Yeongryu. These facts clash with the traditional understanding.
Yeongaesomun’s family leaded some policies such as diplomatic relations with Backje(百濟)ㆍWae(日本) and also constructing Cheonlijangseong(千里長城) during the ruling time of King Yeongryu. At this time Dang dynasty demanded to destroy Gyeonggwan(京觀) of Goguryeo. Even though a lot of nobles like Yeongaesomun’s family advised against destroying Gyeonggwan, King Yeongryuu admitted it. But With the result, the political power of King Yeongryu decreased, on the other hand that of Yeongaesomun’s family was moved up. So from that time the relationship of King Yeongryu and Yeongaesomun’s family had changed to a political competitor.
At the end of 630th Goguryeo attacked to Silla(新羅) to recover their own territory around the Han River(漢江) but the attempt was failed. On the contrary the threat from Dang dynasty was approached again. To make matters worse Yeontaejo(淵太祚), the chief of Yeongaesomun’s family was dead. The strongest political competitor of King Yeongryu has been disappeared. That was a new chance to seize the political power for King Yeongryu.
King Yeongryu didn’t lost a fair shake of chance. He achieved the leadership of Goguryeo again. Especially King Yeongryu turned all situations to his advantage through the friendship with Dang dynasty. At the same time he soften up Yeongaesomun, new chief of Yeongaesomun’s family and new political competitor. A series of these political changes naturally made the relationship between King Yeongryu and Yeongaesomun hostile day by day. And also this situation became the background of Yeongaesomun(淵蓋蘇文)’s coup d’ etat(政變).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
2028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2-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21-07-02 | 학회명변경 | 영문명 : Institute of KoguryoBalhae -> Association of Koguryo Balhae | KCI등재 |
2019-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6-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2-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9-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8-02-14 | 학술지명변경 | 한글명 : 고구려연구 -> 고구려발해연구외국어명 : The Koguryo Yonku -> The KoguryoBalhae Yonku | KCI후보 |
2008-02-13 | 학회명변경 | 한글명 : 고구려연구회 -> 고구려발해학회영문명 : Institute of Koguryo Studies -> Institute of KoguryoBalhae | KCI후보 |
2008-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7-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6-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FAIL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5-05-30 | 학회명변경 | 영문명 : 미등록 -> Institute of Koguryo Studies | KCI후보 |
2005-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3-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2016 | 0.78 | 0.78 | 0.93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9 | 0.93 | 2.013 | 0.38 |
서지정보 내보내기(Export)
닫기소장기관 정보
닫기권호소장정보
닫기오류접수
닫기오류 접수 확인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확인
닫기이용약관
닫기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약관 (2017년 1월 1일 ~ 현재 적용)
학술연구정보서비스(이하 RISS)는 정보주체의 자유와 권리 보호를 위해 「개인정보 보호법」 및 관계 법령이 정한 바를 준수하여, 적법하게 개인정보를 처리하고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에 「개인정보 보호법」 제30조에 따라 정보주체에게 개인정보 처리에 관한 절차 및 기준을 안내하고, 이와 관련한 고충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개인정보 처리방침을 수립·공개합니다.
주요 개인정보 처리 표시(라벨링)
목 차
3년
또는 회원탈퇴시까지5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3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2년
이상(개인정보보호위원회 : 개인정보의 안전성 확보조치 기준)개인정보파일의 명칭 | 운영근거 / 처리목적 | 개인정보파일에 기록되는 개인정보의 항목 | 보유기간 | |
---|---|---|---|---|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자 가입정보 파일 | 한국교육학술정보원법 | 필수 | ID, 비밀번호, 성명, 생년월일, 신분(직업구분), 이메일, 소속분야, 웹진메일 수신동의 여부 | 3년 또는 탈퇴시 |
선택 | 소속기관명, 소속도서관명, 학과/부서명, 학번/직원번호, 휴대전화, 주소 |
구분 | 담당자 | 연락처 |
---|---|---|
KERI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정보보호본부 김태우 | - 이메일 : lsy@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439 - 팩스번호 : 053-714-0195 |
KERI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개인정보보호부 이상엽 | |
RIS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대학학술본부 장금연 | - 이메일 : giltizen@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149 - 팩스번호 : 053-714-0194 |
RIS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학술진흥부 길원진 |
자동로그아웃 안내
닫기인증오류 안내
닫기귀하께서는 휴면계정 전환 후 1년동안 회원정보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으신 관계로 개인정보가 삭제되었습니다.
(참조 : RISS 이용약관 및 개인정보처리방침)
신규회원으로 가입하여 이용 부탁 드리며, 추가 문의는 고객센터로 연락 바랍니다.
- 기존 아이디 재사용 불가
휴면계정 안내
RISS는 [표준개인정보 보호지침]에 따라 2년을 주기로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관하여 (재)동의를 받고 있으며,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휴면계정으로 전환됩니다.
(※ 휴면계정은 원문이용 및 복사/대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휴면계정으로 전환된 후 1년간 회원정보 수집·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RISS에서 자동탈퇴 및 개인정보가 삭제처리 됩니다.
고객센터 1599-3122
ARS번호+1번(회원가입 및 정보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