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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剛三昧經』의 성립과 유통에 대한 재고 = A Reconsideration on the Composition and Circulation of the Vajrasamadhi Sutra[金剛三昧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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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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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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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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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paper purports, examining critically the existing results of research on the composition of the Vajrasamadhi sutra, to propose the writer’s argument on it focusing upon problems having been overlooked there.
Since Gogen Mizuno(弘元 水野) had proposed the apocryphalness of the work, most discussions on the composition of it had been progressed, in relationship with the history of early Ch’an(禪) in China, around the theory of er‐ru si‐xing(二入四行), with the accompanying result that even the possibility of its composition in Silla(新羅) had been discussed within that boundary. In 1992, Sanghyeon Kim questioned its composition in Silla. In 1995 and 1998, Dongshin Nam proposed to approach it rather from a new perspective of the conflicts between the New Translation[新譯] trend and the Old Translation[舊譯] trend or between the Sunyata[空] school and the Being[有] school. In 1998, Kosei Ishi(石井公成) argued that this apocryphon does not belong to the direct line of the Tung‐shan fa‐men(東山法門) since the source of its thought nearly provoking laymen not to respect ordained persons can be ascribed to Fu ta‐shih(傅大師). Gyutahk Shin proposed that it might be rather a manual of practice belonging to the Hua‐yen school. On the other hand, most of the other scholars have supported that it was composed in relationship with the Tung‐shan fa‐men by Someone around Wonhyo(元曉) in China or Silla, while there are some who do not yet have any clear view.
According to the observation of the writer on the existing discussions, some questions might be raised about the credibility of the biography of Wonhyo within the Song Gao‐seng‐chuan(宋高僧傳) as the only extant recording about the composition of the Vajrasamadhi sutra, the lack of distinction between the thoughts of the Vajrasamadhi sutra and Wonhyo’s commentary on it as if they are one and the same, and whether the Vajarasamadhi sutra within the K’ai‐yuan shih‐chiao‐lu(開元釋敎錄) was transmitted from Silla to China after the composition of Wonhyo’s commentary on it, all of which have been overlooked until recently.
This paper purports to raise the following propositions based upon the existing achievements and the above observation.
Firstly, the Vajrasamadhi sutra does not belong to the direct line of the Tung‐shan fa‐men(東山法門) since it does not propose the theory of er‐ru si‐xing(二入四行), which is related to the Tung‐shan fa‐men, as the ultimate.
Secondly, in this work, we can look up most of the thoughts having been circulated in China, especially in Chang’an, during the middle period of the 7th century.
Thirdly, while Wonyo’s commentary interprets its teaching as belonging to the Period of the Adopted Dharma, this work intends clearly to belong to the Period of the Last Dharma.
Fourthly, the Ksitigarbha Bodhisattva, as the Bodhisattva with the teaching for the Period of the Last Dharma and the mission of maturing sentient beings in the evil world of five corruptions[五濁惡世], is set in this work as the questioner in its chapter on Dharani, as the possessor of the Dharani of it in the dimension of its textual significance, and as the protector of its practioners.
Fifthly, in this work, we find some thoughts belonging to the Hua‐yen school that circulated at the Mt. Zhong nan(終南山) during the period from 650~670, in addition to some phrases that are very similar to the Five Skillful Means of Mahayana[大乘五方便] belonging to the Northern Ch’an school.
Sixthly, as Kosei Ishi and Dongshin Nam point out, the ideal figure in this work is neither monk nor layman, respecting every existent being and receiving respect even from monks.
Seventhly, in this work, we find some terms peculiar to the school of San‐chieh‐chiao[三階敎, the teaching of the third tier], such as rulaizangfu[如來藏佛] and xingxiangfu[形像佛], and the
본 논문은 『금강삼매경』의 성립에 관한 기존의 연구 성과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기존의 논의에서 간과되었던 문제점을 중심으로『금강삼매경』의 성립과 유통에 관한 논자의 견해를 개진하였다.
1955년 미즈노 고겐(水野弘元)이 위찬설을 제기한 이후,『금강삼매경』의 성립에 관한 논의는 대부분 二入四行說을 매개로 중국초기 선종사와 결부되어 논의되었으며,신라찬술설 역시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그 후 김상현이 1992년 신라찬술설에 의문을 제기하였고,남동신은 1995년의 논문과 1998년의 논문에서 『금강삼매경』의 성립문제를 중국초기선종사의 문제가 아닌 新․舊譯佛敎및 空有의 대립이라는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할 것을 제안하였으며,이시이 코우세이(石井公成)은 1998년의 논문에서 ‘居士不敬沙門論’에 가까운 논의를 전개하는 『금강삼매경』사상의 연원으로 傅大士등을 상정하면서 동산법문 직계의 위경은 아니라고 주장하였으며,신규탁은 오히려 화엄 계통의 수행강요서일 가능성을 제기한다.하지만 견해를 제시한 학자들 대부분은 東山法門과 관련된 중국 혹은 신라 찬술설,혹은 원효 주변의 인물을 찬술자로 비정하고 있으며,뚜렷하게 견해를 제시하지 않고 유보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우선 논자는 기존 논의의 문제점으로,『금강삼매경』의 성립에 관
한 유일한 記事인 『송고승전』「석원효전」의 신뢰성 문제,『금강삼매경』이 원효의 『금강삼매경』과 동일시되어 이해되면서 『금강삼매경』과 『금강삼매경』의 사상이 분리되어 논의되지 않는 것의 문제점,『개원석교록』에 편입된 『금강삼매경』이 원효가 주석한 이후에 신라에서 중국으로 전해진 것인가 하는 점이 간과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선행의 연구 성과와 이러한 문제의식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추론하였다.
첫째,『금강삼매경』이 동산법문과 관계가 있는 이입사행설을 구경의 경지로 설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동산법문 직계의 경전은 아니다.
둘째,『금강삼매경』은 7세기 중반 무렵까지 중국불교 특히 長安지역에서 유통되었던 사상의 대부분을 망라하고 있다.
셋째,『금강삼매경』은 말법시대의 가르침을 의도하고 있는데,원효의 주석은 상법시대의 가르침으로 해석하고 있다.따라서 『금강삼매경』은 말법의식을 강렬하게 드러내도 있다.
넷째,五濁惡世에서 중생을 성숙시킨 것을 사명으로 하는 보살이자 末法之敎의 보살인 ‘지장보살’이 「摠持品」의 청법자,이 경의 文義陀羅尼를 얻은 자이자 『금강삼매경』의 修習者를 옹호하는 중요한 位格으로 설정되고 있다.
다섯째,650~670년 사이에 종남산에서 접할 수 있었던 화엄적 사유와,北宗의 잔간인 『大乘五方便』과 대단히 유사한 문구가 『금강삼매경』에 사용되고 있다.
여섯째,이시이 코우세이와 남동신의 지적처럼,『금강삼매경』의 편찬자는 非僧非俗이면서 일체를 예경하고 沙門에게서도 예경을 받는 이상적인 인물상을 제시하고 있다.
일곱째,‘如來藏佛’‘形像佛’등 삼계교 특유의 용어군이 사용되고 있고,三階敎의 普敬사상이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정리에 의거하여 논자는 7세기 중반 직후,중국불교에 유통되었던 다양한 불교사상군을 종합적으로 수용하면서도,非僧非俗이면서 일체를 예경하고 沙門에게서도 예경을 받는 이상적인 인물상을 강조하고,강렬한 말법의식을 드러내면서 지장보살 신앙을 강조하였던 삼계교를 『금강삼매경』을 편찬한 집단으로 주목하게 되었다.
7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삼계교는 종남산과 장안 일대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특정 경전을 소의경전으로 세우지 않아서 정토교로부터 비판을 받았기 때문에,“구족계를 버린 후에 친히 勞役하였고, 悲田과 敬田에 공양하며,승속을 가리지 않고 예배하였다”는 開祖信行(540-594)을 말법시대에 부처님을 대신하여 法을 설한 一乘菩薩로 신앙하려는 의식이 삼계교 내부에 팽배해 있었다.『금강삼매경』에 수용된 초기 선종사상과 화엄사상 등은 당시 장안과 종남산 일대에서
접할 수 있는 것이었다는 점 역시 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삼계교라면 쉽게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특히 이입 사행설이 처음 수록된 『속고승전』역시 종남산 정업사에서 찬술되었다는 점에서 『금강삼매경』의 찬술집단이 좀더 쉽게 접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더욱이 695․699․721․725년의 네 차례에 걸쳐 내려진 삼계교에 대한 禁令은 왜 『금강삼매경』이 중국에서보다 신라에서 먼저 유통되어야 했는지에 대한 정황에 대한 설명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점에 의거하여 논자는,『금강삼매경』이 7세기 중반 직후 종남산과 장안을 무대로 활동하였던 삼계교 집단이 자신들의 사상과 신앙에 대한 정당성을 획득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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