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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양악작곡가들이 상상한 국민음악: ‘국민’과 ‘민족’ 사이에서 = National Music Imagined by Western Music Composers of the 1950s: Between ‘Nation’ and ‘Ethnic’
저자
김은영 (중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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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작성언어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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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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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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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114(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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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50년대의 음악계에 대한 고찰이다. 해방 후 일제잔재의 청산과 민족국가 수립을 염원하며 제기된 민족음악론은 분단과 전쟁을 겪으면서 냉전의 논리로 변화하고 있었다. 분단 후 남한에서는 1948년 정부수립을 기점으로 국민가요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국민가요의 내용은 국민국가의 건설과정에서 국민에게 요구되는 애국심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1949년 공보처는 박태현, 윤용하, 이흥렬 등 우익 입장의 작곡가들이 쓴 국민가요를 당선시키고 학교 및 군대에 보급시킨다. 그러나 이 시기에 주창된 국민음악은 일제강점기 국민개창운동을 재활용한 것이다.
전쟁은 과거 제국에 봉사하던 음악가들이 남한의 악단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게 된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전시체제하 만주에서 제국의 후생음악에 봉사하던 이흥렬, 박태현, 김동진 등은 한국전쟁 중에는 종군 문화반원으로 활약하며 호전적인 이승만 정권의 충실한 문화선전대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편, 피난지 부산에서는 ‘전시작곡가협회’가 결성되어 전시(戰時)동요작곡과 가극 등을 창작하였는데 이들의 주요 목표는 군당국과 긴밀히 결합하여 전선에서 일어난 일을 음악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전시작곡가협회 작곡가들은 1950년대 중반부터는 국민개창운동추진회에서 활동하며 재즈와 왜색 유행가 대신 국민가요 창작과 보급에 앞장선다. 국민가요 작곡가들은 멸공과 북진을 강조했던 정권의 정책에 충실히 따름으로써 남한 악단의 중심적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1950년대 주요작곡가들에 의한 국민가요 창작은 이후 남한의 악단에서 전개될 이분법적 분단음악사의 시작이 된다.
특히, 우익진영 음악가들은 이승만 정권의 반공주의와 북진통일,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적 정체성을 갖는 경우가 많아 정권의 구미에 맞았다. 이들에 의해 창작된 국민음악은 호전적 성격의 노래가 많았는데 이와 같은 편중된 정치성이 순수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고 있었다.
그러나 국민개창운동에 참여한 음악가들이 이와 같은 이분법에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나운영, 윤이상의 이후의 삶은 1950년대 그들의 활동이 시대적 상황 속에서 굴절되어 나타난 시대적 산물이었음을 확인하게 한다.
민족음악을 위한 열망은 1980년대의 민족음악론으로 다시 제기되었고 이와 같은 역사를 통해 ‘민족’과 ‘음악’을 연결하고 융합하려고 노력하면서 당대의 시대정신에 민감했던 선배 음악가들의 고뇌와 실천이 과거의 역사로만 남지 않게 하는 것은 변화된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음악인에게 주어진 과제이자 새로운 ‘시대정신’이라 할 수 있다.
This paper will be an attempt to examine the music scene of the 1950s in Korea, the era of anti-Communism and the Cold War. A discourse on national music that was raised during the period of liberation led to the music history of the Cold War in the course of division and the Korean war. The attempt to attain national Integration by achieving the national state was taking place since the establishment of the government in 1948, when ‘Kukmingayo(songs for the nation)’ were created and disseminated. These songs called ‘Kukmingayo’ or ‘Aegukgayo(songs for patriotism)’ were produced by recycling the ‘National singing campaign’ and national music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Furthermore, a song of the national memorial day was made by the government and music was attempted to emphasize nation than ethnic over the people, such as anti-communism and patriotism.
The Korean war, meanwhile, was a golden opportunity for musicians who served the Japanese empire to settle down reliably in the South Korean music scene. Lee Heung-ryul, Park Tae-hyun and Kim Dong-jin began to play a more active role in cultural propaganda for the North Korean regime.
On the other hand, in Busan, the ‘Wartime Song Writers Association’ was formed to create wartime children’s song and lyric plays. Besides, they were combined closely with the military authorities to produce music. their goal has been embodied in the formation of the ‘Military Composers Association.’ Composers of the ‘Wartime Song Writers Association’ have been active in the national singing campaign since the mid-1950s. Also, they have been taken the lead in distributing national songs that could achieve national unity instead of jazz and Japanese-style songs. However, such activities were the beginning of a dichotomous divided Korean music history based on the premise of anti-communism and division. These activities were led by right-wing composers who faithfully followed the positions of the then regime.
In particular, the combination of anti-communism, northern unification and pro-Americanism under Rhee's government was reflected in the creation of musicians. Christian musicians, especially those who defect from North Korea, were perfectly matched by the regime and were hiding their militant and divided music history under the slogan of purism.
Nevertheless, not all musicians who participated in this dichotomy agreed. The later lives of Na Un-young and Yun I-sang, who have acted in the ‘Wartime Song Writers Association’ and the national singing campaign, could indicate the fact that their activities in the 1950s were reflected in refraction in the context of the times.
Desires for national music was re-collected into the national music theory of the 1980s, and through this history, it would be a task given to all musicians living in this changed era. Moreover, it could be a new age spirit to ensure that the suffering and practice of senior musicians who were critical to the zeitgeist of the times did not remain the only history of the p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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