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普照体澄과 明州 大梅法常의 法嗣 迦智 = Bojo Chan Master Chejing and Silla Monk Gaji at Damei Mounatin
저자
조영록 (동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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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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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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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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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245(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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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道義禪師가 唐 西堂智藏으로부터 처음으로 南宗禪法을 얻어 왔으나 남방의 불교계에서는 이를 마설이라 하여 배척하였다. 이에 북방 설악산으로 옮겨 廉居에게 法을 傳하고, 염거는 다시 体澄에게 전하여 그를 宗祖로 하는 迦智山門이 비로소 열리게 된 것이다.
体澄은 도의의 心要를 얻은 뒤 다시 入唐하여 여러 지역으로 求法行脚을 펼친 뒤 귀국 후 迦智山門을 개창하였다.「迦智山寶林寺普照禪師碑文」에 의하면, 체징의 속성은 金氏이며, 804년 熊津 출생으로 어려서 불경을 읽었으며, 827년에 具足戒를 받은 후 설악산 億聖寺에서 道義의 제자 廉居에게 그 法을 傳受하였다. 837년에는 同學 眞育 虛會와 함께 入唐하여 여러 지역으로 巡歷하며 많은 善知識을 배알하였으나 “우리 祖師(道義)의 가르침에 더 보탤 것이 없으니 수고롭게 더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 하고 840년에 귀국하였다.
체징의 입당구법은 그의 나이 연부역강한 중반이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불교교류는 張保皐船團의 해양활동이 왕성할 때 그에 힘입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崛山祖師 梵日은 그 1년 전(836)에 입당하여 6년 동안 鹽官 齊安의 문하로 들어가 수행 중이었으며, 慧目山 玄昱은 같은 해 그리고 桐里山 慧徹은 2년 뒤에 구법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그 무렵 일본 天台宗僧 圓仁이나 普陀山 開山에 공이 있는 慧萼 등이 역시 登州나 揚州 혹은 明州港을 드나들며 구법행각에 분주하였다.
체징의 비문을 비롯한 여러 문헌에는 그의 在唐求法과 관계하여 어떠한 구체적 언급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전등록』 10, ‘明州 大梅山 法常禪師 法嗣, 新羅國 迦(伽)智禪師傳’의 제목 아래 간략한 두어 마디의 문답이 있지만 여기서도 그를 체징과 관계 지어 볼만한 내용은 없다. 혹시 저들 兩師가 동일인일 가능성은 없을까? 만일 동일인으로 본다면 그에 합당한 몇 가지 조건을 따져보아야 한다. 첫째로 체징의 구법과 大梅法常의 傳法이 동일한 시기에 이루어지고 있었는가? 둘째 대매 법상선사와 가지산 선문의 법맥이 일치하는가? 셋째 명주 大梅山이 해외 구법승들이 접근하기 용이한 지역이었는가? 하는 문제 등이다.
첫째 시기상의 문제다.『송고승전』 권11, 「明州大梅法常傳」에 따르면, 법상이 796년 天台山에서 明州 大梅山으로 옮겨 隱居修行하다가 836년, 그의 나이 85세에 비로소 禪院을 세우고 본격적 傳法活動에 임하여 6, 7백 명의 僧徒들로 성황이었으나 839년에 향년 88세로 示寂하였다. 법상의 傳法 3년 사이에 体澄이 입당하였으므로 그 문하로 들어갈 수 있는 기간에 해당된다.
둘째 법계상의 문제다.『전등록』 권7, 「대매산법상선사전」에 따르면, 법상은 “大寂(馬祖) 의 ‘마음이 부처’라는 한마디에 大悟하였다”고 한다. 체징이 본국에서 염거를 통하여 배운 道義祖師의 가르침 역시 馬祖-西堂으로 전한 馬祖의 嫡統이다. 兩浙地方에서 각각 이름을 얻은 大梅法常과 鹽官齊安이 모두 마조의 直傳弟子였으니 같은 법통이다.
셋째 구법 지역상의 문제다. 明州는 중국 동남의 대표적인 항구도시로 외국인들이 쉽게 드나들었다. 특히 한국과 일본의 승려와 상인들이 드나들기 용이한 海港으로서 중국에서 가장 오랜 동안 양국의 구법승들의 출입이 가장 잦았던 곳이다.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해보면 체징은 入唐하자 중국 江南의 여러 叢林을 巡歷하기에 앞서 아마도 明州 大梅山 법상의 문하를 찾았을 개연 ...
A Silia monk, Do'ui 道義, went to Tang China and attained Southern Chan teaching in the first time in history of Korea from Xitang Zhizang 西堂智藏. But the Southern Chan teaching was considered to be the devil’s, and excluded from the Buddhist society at the time. Because of this refusal, Do'ui languished the northern mountains. From there, he had conveyed the Southern teaching to Yeomgeo 廉居, and then Yeomge conveyed it to Chejing 體澄. After Chejing had studied in Shilla, he entered Tang again, traveled various regions preaching the Buddhism, then he returned Silla and opened new Chan[Seon] school, Gajisanmun 迦智山門. According to his stele, he was born in the Kim family, at 804, in Ungjin 熊津. When he was young, he read the buddhist books. At 827, he had become the proper monk. After then, he was taught by Yeomgeo in the northern mountains. In the year of 837, he entered Tang with his fellows. He traveled various regions and met a lot of Chan masters to study the teaching. But he thought that there is nothing to add to what he had learned in Silla, he came back to Silla in 840.
The literatures including Chejing's stele, there is no specific descriptions of his “trying to have a Buddhism’s law” while he was traveling around the regions of Tang. But there are some mentions about someone named Silla Master Gaji as a disciple of Damei Fachang 大梅法常, who might be Chejing in the volume 10 of Zhandenglu 傳燈錄. Isn’t there that the possibility of the two Chan masters are same person ? If one wants to accept the possibility, one should consider the conditions which the possibility makes happen. First, it should be the time of the searching of the law of Chejing and the time of his Chinese teacher, Damei Fachang, are in same position of timeline. Second, are the thought of Fachang and that of Gajisanmun identical? Third, was it easy to access to Damei mountain 大梅山 in the Mingzhou 明州 for the foreign Monks?The answers of the problems mentioned above bring the subsequent questions. First subsequent question is the timeline. According to the biography of Damei Fachang in the Sung gaosengchan 宋高僧傳, Fachang was moving to Damei mountain in 796, where he was hiding from the world and studied. In 836, when he was the age of 85, Fachang was finally able to built his own temple and teach monks, but he passed away just three years after shortly. In this short three years, Chejing entered Tang and could be studied under the presence of Fachang. Second subsequent question is the problem of Chan lineage. According to Zhandenglu 傳燈錄, Fachang succeeded the teaching of Mazu Daoyi 馬祖道一. The teaching of Do'ui, which Chejinf learned was also the same line of Mazu Daoyi. The Third subsequent question is the problem of regions of “searching the law”. Mingzhou 明州, whicih was main port city of east-southern china, was the port which could be easy access for foreigners, especially to the monks and traders of Korea and Japan.
All the answers combined and considered, the possibility of Chejing could be a student of Fachang is probable. The year before the arrival of Chejing, Fachang built his own temple and have the fame around the areas. It could be possible that Chejing heard the fame and then became a student of Fachang. After the return from Tang, he gave the teachings in his homeland. Then the king asked him to move to a temple in Gajisan, in the spring of 860, to be the abbot of it. And he was given the title of Bojo Chan Master after his death by the Government. As the time passed, the news of his achievement spread to the Chinese Buddhism, it could be possible to say that he was recorded as ‘Silla master Gaji as a disciple of Damei Fachang’.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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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7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1-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4-12-17 | 학회명변경 | 한글명 : 동국사학회 -> 동국역사문화연구소영문명 : Dongguk Historical Society -> Dongguk history & culture institute | KCI등재 |
2011-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10-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8-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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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36 | 0.36 | 0.36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38 | 0.4 | 0.758 | 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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