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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혹논문 2 : 하세응종가소장(河世應宗家所藏) 『변무(辨誣)』의 내용(內容)과 그 의의(意義) -정인홍(鄭仁弘)의 이황비판(李滉批判)을 중심으로- = The contents and significance of Byeon-mu possessed by the head family of Ha Se-eung -focused on criticism of Jeong In-hong against Yi Hw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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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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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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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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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수록면
103-140(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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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州市水谷面士谷마을에 있는 河世應(1671-1727)의 종가에 소장된 『辨誣』라는 책자의 내용과 그 의의에 대해 논의를 한 결과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이 『변무』는 曺植의 학문이 儒學이 아니고 老莊이라는 李滉의 비판적 견해에 대해 鄭仁弘이 이를 세세히 分辨한 것과, 정인홍이 이 분변 과정에서 이황을 무함했다고 하는 이황 지지자들의 견해에 대하여 정인홍의 지지자들이 반박하는 여러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곧 정인홍은, 下學을 특히 강조하고 出處에 엄격하였던 조식을 이황이 노장으로 무함했다고 하며, 오히려 이황이 出處와 克己에 문제가 있으므로 문묘종사에 합당치 못하다고 비판하였다. 이에 대해 이황의 지지자들이 정인홍을 두고 선현을 무함하였다고 비판하자, 정인홍의 지지자들은 정인홍이 先師의 무함을 분변한 것에 불과하다며 이를 옹호한 것이다. 조식은 이황에 비해 현실에 대한 관심이 더욱 많았고, 그래서 더욱 현실비판적이었으며, 출사를 하지 않은 것도 출처를 엄격히 하는 것이 유자의 가장 분명한 자세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으므로 조식이 노장의 학문을 唱導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不全進不全退하며 理氣心性論을 전개하는 것이 正學인가``라는 정인홍의 주장을 무함이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당시로부터 변화되어 조선말기에까지 이르는 학술사의 흐름을 생각해 볼 때, 그의 주장은 앞으로 좀 더 깊이 고찰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조선조의 성립과 함께 억불숭유 정책이 펼쳐지는데, 유학은 삼국시대 이래불교, 선교와 함께 이미 우리나라에 깊이 뿌리박혀 있던 것으로, 고려 중엽이래 주자학이 받아들여지면서 佛敎와 仙敎를 모두 배척하고 朱子學만을 숭상하는 쪽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조식의 儒學은 佛敎와 老莊도 일정 부분 인정하면서 유학적 삶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학문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황은 程朱이래의 理氣論과 心性論을 합쳐 理氣互發說로 정리함으로써 주자학의 嫡子的신분을 확보하였다. 조식의 학문은 이기설과 같은 이론의 경우는 정주의 학설로 충분하다고 보고 그들의 학문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여 현실에서 고도의 정신 경계에 이르면서 이를 실천하는 것이 학자의 자세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四端과 七情이 어떻게 구분되는가에 대한 이해보다는 현실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황의 조식 비판은 이황의 노수신 비판 등과 관련되는 것으로 일종의 학문적 독재화의 과정이라 할 수 있고, 정인홍이 인조반정으로 처형되는 것은 정치와 맞물리면서 이러한 학문적 독재화가 정착되었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황 사후 조선이 망하기까지 일방적으로 朱熹만 尊信하는 학문이 이어졌고, 그 사이에 陽明學이나 實學, 北學등이 일부 학자 사이에서 반짝이기는 하였지만 정계나 학계의 주류가 되지는 못하였다. 만약 남명의 학문이 정계와 학계의 주류 가운데 하나로서 기능하였다면 조선이 그렇게 허무하게 일제에 의해 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아는 것을 실천하는 下學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고, 그 중요성의 이해를 통한 다양한 활동도 적극적으로 추진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생각하면, 下學에 대한 관심과 處身문제가 오늘의 현실에서도 매우 유의미하다고 할 것이다.
더보기A research has been made into the contents and their meanings ofa book which is entitled Byeon-mu and kept in the head family of HaSe-eung (1671-1727) located in Sa-gok village, Sugok-myeon, JinjuCity. Overall, the results of this research are summarized as follows. The book entitled Byeon-mu comprises detailed discussions wagedby Jeong In-hong about the critical contention of Yi Hwang that JoSik`s scholarship was derived from Confucianism but the concept ofChan-Tzu and many confutations raised by Yi Hwang supporters thatJeong In-hong backbites Yi Hwang in the process of the discussionsbeing conducted. Jeong In-hong contended that Yi Hwang backbitJo Sik, who emphasized specifically Learning the lower and strictlycities sources, on the basis of the thoughts of Chan-Tzu, and that YiHwang had some problems with citing sources and self-restraint andwas not eligible for enshrinement of confucian scholars at theConfucius`s Shrine. In response, Yi Hwang supporters also criticizedthat Jeong In-hong backbit an ancient great sage. In turn, JeongIn-hong supporters stood up for Jeong In-hong and said that he didno more than consider slanders waged against the ancient teacher. It is not true that Jo Sik advocated the scholarship of Chan-Tzusince he was more interested in the realities compared to Yi Hwangand more critical to the realities and because Confucian scholarsshould most strictly cite such sources as drawn from those figures thathad not gone into government service. They should not necessarilybackbite the contention raised by Jeong In-hong saying that it is nota right study to develop the doctrine of reason and energy whilemaking neither advance nor withdrawal, but his contention should bemore deeply considered against the developments of the history of artsand sciences occurring between that times in question and the earlypart of the Joseon Dynasty. Once the Joseon Dynasty was established, policies were in place tosuppress Buddhism and promote Confucianism, which had been deeplypracticed in Korea along with Buddhism and Taoism ever since theThree-Dynasty period. Then, orthodox Neo-Confucianism wasintroduced into Korea in the middle of the Goryeo Dynasty and beganto exclude both Buddhism and Taoism, so that people might respectorthodox Neo-Confucianism only. Confucianism supported by Jo Sikpartly recognized Confucianism and the doctrines of Chan-Tzu. Incontrast, Yi Hwang combined the doctrine of reason and energypromoted by Jeong Ju with the doctrine of mind and nature or thementality doctrine and created the doctrine on alternate occurrence ofreason and energy, so that he should be considered as a legitimatechild of orthodox Neo-Confucianism. Jo Sik considered that the doctrines of reason and energy could besufficiently represented by Jeong Ju`s theory and contended thatscholars should be well versed in the doctrines and attain the highestmentality level in the realities while practicing the doctrines. He alsoconsidered that what is more important is how to interpret and beadapted to the realities than how to discriminate the human capacityfor ethics and natural emotion. Yi Hwang `s criticism against Jo Sik is related to his criticism againstNo Su-shin and may be called a development of academic dictatorship, which was established in the process of the political revolt for KingInjo`s restoration, in which Jeong In-hong was executed. Reverencefor Ju Hui was one-sidedly practiced scholarship between the deathof Yi Hwang and the fall of the Joseon Dynasty, in which period thedoctrines of Wang Yang-ming and pragmatic Confucianism andnorthern Confucianism were temporarily propagated by some scholarswho were not active in the mainstream of academia. If the scholarship of Nam-myeong should occupy a part of themainstream of academia and politics, the Joseon Dynasty would nothave been subjected easily to the Japanese Imperialism. Even today, few people have interest in practical learning, understand theimportance of it and/or positively conduct various relevant activities. Considering this lack, what need be greatly promoted and developedtoday is people`s concern about and attitude towards learning thel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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