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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대한민국임시정부 통치구상 = Syngman Rhee’s Governance Management Policy on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저자
오영섭 (연세대학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09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69-105(37쪽)
KCI 피인용횟수
9
제공처
1919년 9월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에 선출되어 한국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상해로 가지 않고 미국에 계속 머물며 구미 열강과 국제회의를 상대로 하는 외교독립운동을 벌였다. 그는 임정 요인들의 거듭된 요청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계속 머물렀다. 따라서 그는 미국에서 상해의 임정을 통치하기 위한 방안을 구상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한국의 최후 독립은 무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다만 무략만으로는 독립이 불가능하므로 무력과 외교를 병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외교와 무력의 양대 방면에서 착실히 준비를 하여 독립을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에게 무력은 독립전쟁을 수행할 한국인의 무장투쟁을 위해서 필요하며, 외교는 독립전쟁에 필요한 국제사회의 승인이나 원조를 받기 위해 필요하였다. 따라서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은 단순히 외교지상주의적 독립론이 아니라 외교와 무력을 병행하여 고려하는 현실주의적 독립론이었다.
이승만은 미국과 중국 간의 거리 차이를 감안하여 역할분담론을 제기했다. 이것은 상해일은 국무총리와 각원이 상의ㆍ처리하고 미주일은 자신이 전담하여 처리하되, 중대사만 서로 상의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이승만은 미국에서 전보와 서한을 통해 원동의 임정을 원격 통치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대통령 재임기간 내내 이승만을 괴롭히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다시 말해 이승만은 반대파로부터 대통령이 임지에 오지 않고 타국에서 임정의 난맥상을 방치한다는 비난을 받았던 것이다.
이승만은 임정의 효율적 통치를 위해 임정내 우호세력을 활용하는 방책을 구사했다. 그는 경술국치 전부터 자신과 인연을 맺은 기호파를 주목하고 이들을 단일세력으로 모으고자 통신원 제도를 도입했다. 그는 일부 인사들을 통신원에 임명하여 임정 현황을 수시로 보고하게 하였다. 또 그들에게 자주 서한을 보내 친이승만 성향의 인사들을 포섭하게 하였다. 아울러 상해 부임 후에는 친위단체 협성회를 조직하여 자신과 기호파 내각의 임정유지정책을 지지하게 하였다. 이로써 이승만은 비교적 소수파인 기호파 세력을 통해 임정을 원격 통치할 수 있었다.
이승만은 상해 임정이 有形無跡한 정부가 되기를 원했다. 그는 임정이 형체는 있으나 자취가 없는 정부기관으로서 원동과 미주, 국내와 국외를 연결시켜 주는 구심점이 돼야 한다고 보았다. 이때 임정이 외형적으로 정부형태를 갖추려 하기보다는 조직ㆍ인원을 최소화하여 내실을 기해야 하며, 국내외 민족운동을 지휘ㆍ통제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연결ㆍ조정하는 역할을 맡으면서 독립을 대비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국내의 시위투쟁과 항일활동, 만주와 노령의 군사활동, 미주의 외교활동을 각각 그 장점대로 추진해 나가면서 최후의 독립전쟁에 대비할 힘을 비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외국차관을 통해 임정의 항구적 운영자금을 마련함으로써 자신의 對임정 장악력을 강화하려 하였다. 그가 상해 부임 후에 기호파 내각의 각원들과 상의하다가 결정하지 못한 차관도입 기획안에는 이 점이 잘 나타나 있다. 즉, 이승만은 미국에서 200만불의 차관을 들여오되, 차관교섭을 자신이 전담하고, 또 차관한 자금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려 하였다. 또 이런 차관장악 문제와 별도로 임시의정원을 일시 정지시키고, 정무위원회를 설치하여...
In September 1919, Syngman Rhee rose as a top leader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by being elected the temporary President of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which had been established in French Concession of Shanghai in China. Later, he didn’t move to Shanghai and while he was staying in the United States, he strived for diplomatic independence movement which had been promoted before the launch of Provisional government against the western powers and the international conference. Therefore, he had to continue to abide in U.S. rather than leave for Shanghai even though key figures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repeated requests and criticism on him. Consequently, he came to formulate a plan in his own way to rule provisional government of Far East in U.S.
As the head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Syngman Rhee considered that the final independence of Korea would be possible only through military power. He only insisted that military power must go side by side with diplomacy because independence can’t be achieved only with forces. In other words, he came to conclusion that waiting for the chance of independence would be a shortcut to independence as preparing closely in each way of both military power and diplomacy. Accordingly, he thought military forces are in need of the armed struggle for Korean to carry out the war of independence and diplomacy is needed for approval and assistance of the international community which is necessary for war of independence. In this sense, it draws an attention that Syngman Rhee’s Diplomatic independence theory was not merely diplomatic-primary independence movement theory but realistic independence theory which was considered a combination of diplomacy and force.
Syngman Rhee suggested ‘who does what theory’ to overcome the distance between U.S. and China. The ‘who does what theory’ meant that prime minister and other members took counsel and proceeded affairs in Shanghai, he took whole charge of the diplomatic operations in U.S. and both conducted only serious matters in discussion. By doing like this, Syngman Rhee ruled remote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Far East by corresponding telegraphs and letters in U.S. However, the ‘who does what theory’ which he had designed in consideration of his real situation became a main reason that it was interfering Syngman Rhee throughout his tenure. In other words, Syngman Rhee was taking criticism from the opponent that the president didn’t proceed to his post and leave difficulties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unsettled as staying in other country. Owing to this, the problem of the absence in Shanghai could not help being dealt with a primary concern in an impeachment resolution of Syngman Rhee.
Syngman Rhee made the best use of well-wishers in the provisional government to rule effectively the provisional government. The well-wishers were Giho Party who he made relations from Independence Club to Japanese annexation. He introduced a correspondent system to gather them into a single political force. He appointed some members of provisional government as correspondents and made them report all the matters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in detail. Besides he often sent letters to the correspondents to make the provisional government members who were favored to him gather as a political force. Moreover, he had organized Cooperation Achievement Association, Hyeopseonghoe, after proceeding to his post in Shanghai and made them actively support for the policy of provisional government maintenance of Giho Party and him. From this, Syngman Rhee made it possible to govern remote the provisional government by Giho Party who were relatively small in the provisional government.
Syngman Rhee wanted Shanghai Provisional Government to be like that there is the appearance without evidence. Specifically, he considered that the provisional government was to play a pivotal role in connecting between Far East and the United State...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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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81 | 0.81 | 0.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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