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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회담과 한중관계 - ‘國際共管論’에 대한 충칭임시정부와 중국국민정부의 대응 - = The Cairo Conference and the Sino-Korean Relationship -The Response of Chongqing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and Chinese Nationalist Government to the Issues of International Trustee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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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한 (신라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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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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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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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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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9-378(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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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後 한국의 독립과정에서 커다란 장애가 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 곧 ‘국제공관’ 주장은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부터 시작된 미국 국무부의 戰後 새로운 국제질서 모색과정에서부터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1942년 2월에 작성된 국무부 극동과 소속 외교관인 랭던(William R. Landon)의 한국문제 보고서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당시 국무부의 식민지 한국에 대한 이해는 매우 부정적인 것이어서 한국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국무부에서는 전후 한국에 대해서는 일정 기간 동안의 국제공동관리(국제공관)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 또한 1942년 6월 이전 단계부터 이러한 국무부의 견해와 필리핀에서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공관을 전후 한국에 대한 기본 정책으로 구상하고 있었다. 미국의 이러한 입장이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42년 6월 이후의 일이었고 그것을 중국 측에 공식 통보한 것은 1943년 3월말 영국 측과의 협의를 거친 직후 중국 외교부장 숭즈원(宋子文)을 통해서였다.
전후 한국에 대한 국제공관이라는 미국의 입장이 충칭의 한국임시정부에 알려진 것은 1942년 4월경부터이지만 결정적으로는 1943년 4월말 시카고선(Chicago Sun) 지의 관련기사가 충칭의 각 일간지에 전재 보도된 이후부터 임시정부의 대응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4월말 임시정부 측에서는 긴급 국무회의를 소집하고 국제공관론의 심각성을 집중 논의하면서 그 대응책으로 중국정부에 대한 국제공관 반대 촉구와 함께 중국 언론에의 기고와 강연회, 좌담회 개최 등 적극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5월초 임시정부 요인들의 외교부 방문, 7월말 장제스(蔣介石)와의 면담을 통하여 국제공관론의 사실 여부 확인과 함께 중국정부로 하여금 국제공관 반대에 나서도록 촉구하는 활동이 전개되었다. 한인 지도자들과의 면담에서 장제스는 한인들의 노력과 함께 한인 내부의 통일을 강조하면서 그럴 때에야 중국의 한국 독립 지지도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大公報』를 비롯한 중국 언론에 대한 국제공관 비판 문장 기고와 1942년 10월 중한 간의 교류와 이해 증진을 목표로 만들어진 중한문화협회를 통한 강연회, 좌담회의 개최, 그리고 충칭에 살고 있던 한인들의 대규모 반대집회인 자유한인대회(自由韓人大會)의 개최 등은 1943년 5월 이후 이루어진 임시정부 중심의 다양한 국제공관 반대운동들이다. 이들 반대 운동을 통하여 임시정부 측에서는 국제공관론이 근거로 삼고 있는, 한국인들이 자치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한인들 은 통합되지 못하고 내부의 분열이 심각하다는 점은 사실이 아니며 한국의 독립이야말로 동아시아를 비롯한 세계의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데에도 필수적이라는 점을 적극 주장하였다.
장제스와 국민정부 측에서는 카이로회담 개최일정이 정해진 1943년 7월 이후 카이로회담의 의제와 중국 측의 입장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한국 독립 문제를 중요한 의제의 하나로 삼고 있었다. 즉 장제스의 요청으로 의제와 관련된 보고서를 준비한 두 기관, 즉 군사위원회 참사실과 최고국방회의 비서청의 보고서 속에서는 모두 한국 독립을 주요 의제로 삼을 것을 제안하고 있었던 것이다. 회의 참가를 위하여 중국을 떠나기 직전 장제스는 이들 두 보고서를 기반으로 하여 최종적인 의제를...
The policy of the international trusteeship or the international guardianship of Korea had become visible in a process where the United States Department of State researched on the postwar international order, which was already carried out just after the outbreak of the Pacific War. As the report submitted in February 1942, by William R. Landon, the diplomat of the Division of Far Eastern Affairs of the Department of State, the view of the Department of State on Korea was very negative at that time, and such view on Korea understands that Korea had no capacity of the independence in economy or in politics. As a result, the Department of State concluded that Korea requires an international trusteeship for a certain period of time. Roosevelt,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even before June 1942, accepted such view of the international trusteeship as a basic policy on postwar Korea, based on opinions of the State Department and his own experiences in Philippine. Such policy of the United States has been publicly announced since June 1942, and was formally notified to China in late March 1943 through Song Zi-wen, the head of the Department of Diplomatic Affairs, after the United States got consent of the United Kingdom.
The policy of the international trusteeship of the United States has been known to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since April 1942, but the responses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became apparent since late April of 1943 when the related articles of Chicago Sun reproduced in daily newspapers of Chongqing. In late April, the Provisional Government gathered an urgent cabinet meeting, discussed significance of the trusteeship policy, and decided to urge Chinese government to oppose the trusteeship and to carry out public campaigns such as contributing articles in Chinese media and hosting speeches and discussions. As a result, staffs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visited Chinese Department of Diplomatic Affairs in early May, and they also met with Chiang Kai-shek in late July confirming whether the trusteeship policy was true, while urging Chinese government to oppose the trusteeship. In the meeting with staffs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Chiang Kai-shek emphasized that Koreans should effort together and become unified internally, and stated that, only then Chinese support for Korean independence can be persuasive.
Since May 1943 various anti-trusteeship movements had been carried out; i.e. contributing articles in Chinese media such as Dagongbao, speeches and discussion meetings held by the China-Korea Culture Association which was established for a mutual understanding and exchange between China and Korea, and the General Meeting of the Liberty Koreans which opposed trusteeship in large scale by Koreans in Chongqing. In such anti-trusteeship movements, the Provisional Government criticized views that Koreans lack the self-governing capacity and failed to integrate internally, and strongly argued that Korean independence is essential in structuring the world peace as well as the peace in the East Asia.
Chiang Kai-shek and the Nationalist Government, after their decision on attending the Cairo Conference in July 1943, recognized Korean independence as the important agenda in a process arranging Chinese agenda to propose in the conference. The reports of two organizations, the Counselors’ Office of the Military Commission and the Secretary Office of the Supreme Council of the National Defense, both of which prepared agenda by command of Chiang Kai-shek, suggested that China should propose Korean independence as a primary agenda in the conference. Chiang Kai-shek, too, finally prepared agenda, just before his departure for Cairo, and here Korean independence was one of the seven primary agenda.
During the Cairo Conference started on 23rd November 1943 during four days, the Korean independence was discussed in the night of 23rd when Chiang Kai-shek and Roosevelt gathered for a dinner meeting. At the mee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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