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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朝鮮時代) 묘도문자(墓道文字)의 역사적(歷史的) 특성(特性) = 朝鮮時代における墓道文字の歷史的特性につい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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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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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2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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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국왕, 양반 사대부(妻를 포함), 중인, 승려가 故人(墓主)인 경우에, 그 신하, 자제, 지인, 문인으로서 문장에 능한 사람이 墓道文字를 작성했다. 生祠를 설립하고 거기에 비석을 세운 예가 없으므로 墓碑와 墓誌는 대개 한 사람의 일생을 개괄하고 삶을 평가하는 내용을 담았다. 게다가 사대부 지식인들은 자기 스스로 碑誌를 작성함으로써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하기까지 했다.
조선시대는 양반 사대부가 정치문화의 중심에 있었던 시대였다. 이러한 사실은 묘도문자의 제작에서도 반영되었다.
① 조선시대에는 여성 묘주의 묘비가 제작되지 않은 듯하다. 여성은 사망 후에 남편의 묘에 祔葬되는 것이 항례였으므로 별도로 묘비를 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여성의 경우 墓誌는 광중에 묻었다. 여성을 위해 墓誌를 작성하는 관습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朱熹의 경우도 「夫人呂氏墓誌銘」 등 여성 묘주를 위한 묘지명을 많이 남겼으므로, 그것이 많이 참고로 되었을 듯하다.
② 조선시대에는 17세기에 들어오면서 아동에 대한 관심이 종래보다 깊어지면서 早沒한 자식을 위한 壙誌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李植의 「亡兒老農壙誌銘竝序」는 그 선구를 이룬다.
③ 승려들을 위한 비문은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발달했다. 이를테면 조선후기의 승려 蓮潭有一의 「自譜行業」을 보면, 당시의 승려들은 先師의 비석을 작성하는 일을 매우 중요한 과업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④ 하급의 武班이나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殘班은 간단한 형태로라도 誌石을 제작했으리라 생각된다. 중인 계층도 묘도문자에 관심을 기울였으나, 사대부 양반에게 미치지는 못했다 서얼 계층의 경우는 자기 계층인의 묘도문자에 그리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듯하다. 또한 상인이나 공인의 경우는 아직까지 묘도문자가 발견된 예가 없다. 상인과 공인은 직분상의 자각이나 계층으로서의 자각이 상대적으로 낮았던 듯하다
조선시대의 사대부 지식층과 중간계층이 묘도문자에 관심을 기울인 이유는 묘도문자에서 다음과 같은 기능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① 묘도문자는 곧 立言者의 기록을 통해 墓主의 이름을 不朽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묘도문자는 諛墓로 전락하지 않는 것을 이상으로 생각했다. 많은 지식인들이 묘도문자에서 溢美를 배격하기 위해 묘도문자의 형식과 수사에 관한 논문을 남겼다.
② 묘도문자는 망자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제시한다는 의미를 지녔다. 조선중기의 학자 李滉이 碑誌를 行狀과 마찬가지로 公器 혹은 公道로 간주한 것은 그 같은 관념을 대표한다. 특히 한 인물에 대한 공적 평가가 달라지면 새로운 묘도문자를 작성했으며, 간혹 망자에 대한 평가에 불만을 품은 후손들이 묘도문자의 改撰을 청하기도 했다.
③ 묘도문자는 墓域의 標識와 占有, 家系의 追認 등 실질적인 기능을 지녔다. 李圭景은 『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후세에 묘를 잃어버렸을 때 墓誌가 발견되면 先塋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언급한바 있다. 이러한 일은 현대에도 자주 일어나고 있다.
조선시대의 사대부 지식인들은 삶과 죽음의 사실을 기록한 묘도문자를 풍부하게 작성하여, 그 실물이나 문헌자료가 매우 풍부하게 남아있다. 그런데 그 묘도문자는 양반 사대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에, 소외 계층의 그것은 그리 발달하지 않았다고 推斷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조선시대의 유물로서 日本의 板碑같은 예는 아직 보고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환시도 碑碣을 만들었다면, 비갈과 같은 묘도문자는 실은 하층의 신분이나 소외된 계층에서도 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工商人의 비갈은 제작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전하지 않는 것 일수 있다는 가설을 세워볼 수도 있을 듯하다. 앞으로의 과제로 남긴다.
朝鮮代には國王、兩班士大夫(妻を含む)、中人、僧侶が故人(墓主)である場合、その臣下、子弟、知人、門人のうち文章に長けた者が墓道文字を作成した。生祠を立て、そこに碑を建てた例がないため、墓碑と墓誌には基本的に一人の一生を槪括し、その生を評価する内容が記された。—方士大夫知識人らは自ら碑誌を作成し、生と死に對する省察まで行なった。
朝鮮時代は兩班士大夫が政治文化の中心に存在した時代である。この事實は墓道文字の製作にも反映された。
① 朝鮮時代には女性墓主の墓碑が製作されなかったようであ。女性の場合、死後は夫の墓に祔葬されるのが通例だったため別途、墓碑を建てることはなかったしかし、その墓誌は擴中に埋められ、女性の爲に墓誌を作る慣習は朝鮮時代にも受け継がれた。朱熹は、「夫人呂氏墓誌銘」など女性墓主のための墓誌銘を相省殘したので、これらがよく參照されたらしい。
② 朝鮮時代には17世紀に入って以降兒童に對する關心が以前より深まり、夭折した子息のための壙誌が作られだした。李植の「亡兒老農壙誌銘竝序」はその先驅をなす。
③ 僧侶のための碑文は高麗時代に續き朝鮮時代にも發违した。朝鮮後期の僧侶である蓮潭有一の「自譜行業」を見ると、当時の僧侶らは先師の碑石の製作を非常に重要な課業としていたことが分かる。
④ 下級の武班や官途に就けなかった殘班は、簡單な形態ではあったが誌石を製作したと考えられる。中人階層も墓道文字に關心を持っていたが士大夫兩班には及ばなかった。庶擊階層の場合は同階層の人問の墓道文字に對して、さほど關心を持っていなかったようである。また商人や工人の場合、これまで墓道文字が發見された例はない。商人と工人は職分上の自覺や階層としての自覺が相對的に低かったらしい。
朝鮮時代の士大夫知識層と中間階層が墓道文字に關心を持っていた理由は墓道文字において次のような機能を動見したからである。
① 墓道文字は、立言者の記録を通じて墓主の名を不朽のものにできると考えられていた。墓道文字は諛墓[墓誌銘を通じた死者への過度な称讚]に轉落しないことを理想とし、多くの知識人らが墓道文字において溢美[過度な称讚]を排撃するため、墓道文字の形式と修辭に關する論文を殘した。
② 墓道文字は、亡者に對する公正な評価を提示する意味を持つ朝鮮中期の學者である李深が、碑誌を行狀と同じく公器、また公道と見なしたことはその觀念を代表する。特に或る人物に對する公的評価が変わると新しい墓道文字が作成され、ときに亡者に對する評価に不満を抱いた子孫らによって墓道文字の改撰が要請されることもあった。
③ 墓道文字は墓域の標識と占有家系の追認など實質的な機能を持っ。 李圭景は『五洲衍文長箋散稿」において、後世、祖先の墓を忘れた時に墓誌が發見されれば先塋を搜すことができると言及したことがある。これは現代においても頻繁なことである。
朝鮮時代の士大夫知識人らは生と死の事實を記錄した墓道文字を盛んに作成し、その實物や文獻資料が非常に多く殘っている。一方で、墓道文字は兩班士大夫を中心に成り立ったので、疏外階層のそれはあまり發達しなかったと推斷することもできる。例えは朝鮮時代の遺物のうち、日本の板碑のような例はまだ報告されていない。しかし、もし宦侍も碑碣を作ったとすれば碑碣のような墓道文字が、實際には下層の身分や疏外階層でも製作された可能性がある。また工商人の碑碣は作られなかったのではなく、伝わらなかったのかも知れないという仮說を立てることもできよう今後の課題とした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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