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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신탁통치 문제의 로컬리티 -해방직후 재일조선인 사회를 중심으로- = Locality of the Issue with Trusteeship of Korean Peninsula -In Case of Korean Society in Japan soon after the War-end-
저자
최영호 (영산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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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명
권호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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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343-380(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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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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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paper investigates in the primary materials how the Korean society in Japan produced responses to an issue of trusteeship after news reports about Three Foreign Ministers Conference at Moscow. It especially illuminates formation process of rightists’ youth organization, concentration of their powers and their activities using this issue as an exculpation for their opposition to the left.
Korean minorities in Japan soon after the war-end had strong identities of nationality in every part of life such as repatriation to Korea, education of Korean language and history, and social activities. So I want to use the word ‘locality’ in this article as a concept explaining their characteristics at that time. Of course they also showed identification of locality on the issue to link with trend of people in Seoul like as a process of national integration.
There were some similarities in Korean groups between Tokyo and Seoul in relation to the issue. Nationalistic passions of all Korean people provoked by news of trusteeship intoxicated their reasonal senses. This issue gave rightist’s groups a momentum to increase their organizational capacity. For example, ‘Kunchung’(Youth League to Expedite the Foundation of Korea) and ‘Kundong’(League for the Establishment of New Korea) made a meteoric rise in the Korean society in Japan like a group of provisional government in Korea.
On the other hand, there were some differences depending on the conditions between Tokyo and Seoul. With reference to the time of confrontations getting intensified between the left and the right, central movements appeared in the beginning of January 1946 soon after the end of Moscow conference. However, Tokyo’s controversial struggles appeared at the latter half of February 1946 with the upcoming general meeting of 'Choryun'(Korean Association in Japan), and the violences were developed at the first half of March 1946 soon after the general meeting of ‘Kunchung’. And with reference to standing up of the left, the progressive organizations in Seoul shriveled and turned to underground one without protection of military government, but the left in Japan like Choryun contrastively kept alive and well leading movement for rights and interests of the members in spite of the political issue.
이 글은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 삼상회의에 관한 보도 이후에 재일조선인 사회가 한반도 신탁통치문제에 관하여 어떠한 움직임을 보였는지, 가능한 일차적 자료를 활용하여 밝히고 있다. 특히 우파 청년단체의 설립 과정과 우파 세력의 결집 과정, 그리고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싼 좌우 단체의 주장과 대립 상황을 규명하고 있다.
해방직후 본국지향적인 성격이 강했던 재일조선인 사회는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서도 한반도 정치적 중심인 서울의 움직임에 연동하여 로컬리티 성향을 보였다. 전형적인 국민국가의 국민통합 과정에서 나타나는 지방의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특히 반탁운동이 해방된 조국의 즉시 독립을 갈망하던 조선인 대중들의 민족주의적 감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한반도 중앙의 움직임과 일치했다. 또한 해방직후 서울에서 반탁운동을 계기로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던 우파세력이 조직력을 확대된 것과, 재일조선인 사회에 있어서도 반탁운동을 계기로 ‘건청’과 ‘건동’과 같은 우파세력들이 부상한 것은 거의 흡사한 움직임이었다.
이처럼 한편으로 재일조선인 사회는 한반도 중앙의 움직임에 대체로 연동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주어진 환경과 조건에 따라 시기적으로나 전개양상에서 중앙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였다. 서울에서는 삼상회의가 끝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에 1월 초부터 좌우 대립이 격화되었던 것이 비하면 재일조선인 사회에서는 1946년 2월 ‘조련’의 전체대회를 앞두고 좌우 단체간 논쟁이 시작되었으며, 그 해 3월 ‘건청’의 전국대회 직후부터는 단체간 폭력사태로 발전했다. 또한 서울의 좌파세력이 미군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가운데 반탁세력에 밀려 점차 지하세력으로 전락해 갔던 것에 비해, ‘조련’을 비롯한 재일조선인 사회의 좌파세력은 우파세력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구성원의 권익옹호와 생활보호를 위한 투쟁을 주도하며 강인한 조직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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