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참전 중국지원군 포로 연구 : 송환 과정과 송환 이후의 삶을 중심으로
저자
발행사항
서울 : 중앙대학교 대학원, 2016
학위논문사항
학위논문(석사)-- 중앙대학교 대학원 : 역사학과 동양사전공 2016. 8
발행연도
2016
작성언어
한국어
발행국(도시)
서울
기타서명
(The) study of prisoner` repatriation of the Chinese people`s volunteer army participating in the Korean war
형태사항
iii, 52장 : 삽화 ; 26 cm
일반주기명
지도교수: 손준식
참고문헌수록
DOI식별코드
소장기관
The thesis presents living from prisoners of war camp who were the Chinese People’s Volunteer Army and served in the Korean War, and examines their repatriation process and the path of life after repatriation. This study explains the political issues which lied behind what to do with prisoners by using research all over the world and the latest published data or official document, and prisoners' suffering from that.
China participated in the Korean War under the name of "reinforcements" after a political judgment, since then this word "reinforcements" became the cause of diverse problems during prisoner's repatriation.
Meanwhile, when the number of a prisoner of reinforcements has risen significantly, a group which acted as a important political variable was the Kuomintang of Taiwan. The Kuomintang got involved in conciliation about communist prisoners in a camp and physical repression as a way of promoting an amicable relationship with the United states. When prisoner's rule of "volunteer repatriation" was established the Kuomintang which was a lack of infrastructure within Taiwan pressured prisoners to choose Taiwan for reinforcing a military strength and supplementing construction manpower by all means available. As a result, about 16,000 prisoners of China was taken to Taiwan as "volunteer repatriation" while prisoners who chose China were just about 6,000. This may be regarded it had already been decided from that moment the whole repatriation rule was broken.
Unlike the West, the East had a strong recognition that a prisoner is regarded as a disgraceful position. A prisoner was never welcomed after being a prisoner. They could not have been properly treated properly anywhere in Taiwan and China. Most of prisoners of reinforcements who were repatriated in China were eliminated from the party register and investigated. prisoners who were repatriated in Taiwan faced the harsh reality even more. They had to live a life as others thoroughly with the unsubstantial name “the anti-communist heroes(反共義士)” in an unfamiliar environment. Some people were incorporated in the army Others had to live as a construction worker for a lifetime. Most of prisoners who were repatriated were deprived of the right to cultivate their fortune. These life of prisoners was an inevitable consequence of the situation during the period of tension, they can practically be regarded as a scapegoat under a policy of the nation.
It is not easy to derive a clear discussion about the matter of a prisoner because materials which each country provided are insufficient. However, this paper aggregated research results, utilized materials from Taiwan and China and complemented insufficient part of existing research by using new released materials and official documents. I expect that the gap of research can be filled and furthermore the life of a prisoner can be reappraised through this study.
본 논문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지원군 포로들의 수용소 생활을 서술하고, 그들의 송환과정과 송환 이후 삶을 궤적을 짚어보았다. 본 연구는 각국의 관련 연구와 최근 공개된 자료 및 공문서를 활용하여 당시 포로 처리문제 이면에 깔린 정치적 문제들과 그로 인해 포로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서술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중국은 지도층의 정치적 판단 아래 “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참전했는데 “지원”이라는 말은 이후 포로 송환 당시 벌어진 각종 문제의 빌미가 되었다.
한편 지원군 포로 수가 대량으로 증가하자 중요한 정치적 변수로 작용했던 집단은 대만의 국민당 정권이었다. 국민당은 미국과의 우호적 상황을 조성하기 위한 일환으로 수용소 내 공산포로들에 대한 회유와 물리적 억압에 적극 관여하였다. “자원송환”의 포로송환 원칙이 정해지자 아직 대만 내 기반이 부족했던 국민당은 군사력 강화 및 건설 인력의 충원 등을 노리고 각종 수단을 동원해 포로들이 대만을 선택하도록 압박하였다. 그 결과 16,000여 명의 중국포로가 대만으로 “자원송환”되었다. 반면 중국 대륙을 선택한 포로는 겨우 6,000여 명 정도였는데 이런 결과는 포로에 대한 전체송환 원칙이 깨졌을 때부터 이미 결정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서방과는 달리 동아시아에서는 포로는 그 자체로 수치스러운 신분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포로는 포로가 된 순간부터 환영 받지 못할 운명이었다. 그들은 대만으로 가든 중국대륙으로 가든 합당한 대우를 받을 수 없었다. 대륙으로 송환된 지원군 포로 대다수는 당적을 제거당하고 조사를 받게 되었다. 대만에 송환된 포로들은 더욱 가혹한 현실에 직면하였다. 그들은 생소한 환경에서 허울뿐인 “반공의사”의 이름을 가진 채 철저한 타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다. 어떤 이들은 군대로 편입되었고 또 어떤 이들은 평생을 건축현장의 노동자로 지내야 했다. 송환된 대부분의 포로들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권한을 박탈당하였다. 포로들의 이러한 삶은 냉전시기의 정세가 빚어낸 필연적인 결과였고, 그들은 사실상 국가라는 집단의 정책 아래 희생된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포로 문제에 관해서는 아직 각국의 자료 공개가 부족하므로 현재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논의를 이끌어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본 논문은 현재 각국의 연구성과를 종합하고 대만 및 중국의 자료를 활용하는 한편 새로 공개된 자료와 공문서로 기존 연구의 미비한 부분을 일정부분 보강하였다. 본 논문을 통해 관련 연구의 공백을 다소나마 보충하고 나아가 지원군 포로들이 겪었던 삶의 질곡과 역사의 굴곡을 다시 평가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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