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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30년대 북경지역 한인들의 사회주의 혁명운동 = Socialist revolution movements of Korean people in Beijing in 1920~ 3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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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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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330(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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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the early 1920s, the forces of the Shanghai Faction of Korean Communist Party and the Irkutsk Faction of Korean Communist Party have organized themselves in Beijing and have competitively expanded their influences to take the initiative.
Park Yong-man and Shin Chae-ho, who are dissatisfied with the composition and route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in Shanghai, gathered in Beijing to unify the independence army of the Maritime province in Russia and Manchuria, and to promote the armed struggle.
In the process of implementing the plan, they established a solidarity relationship with Lee Dong-Hwui's Korea Communist Party and Mun Chnag-Beom's Korean National Soviet.
Between 1922 and 1923, communist revolutionaries such as Jang Geun-Sang worked with the Korean students in Beijing to develop revolutionary movements. While studying communist ideology, they organized "Chang Il dang", formed a secret society, "Revolutionary Society", and published "Revolution" to promote communist revolutionary ideas and strategies.
Between 1925 and 1926, Korean communists joined the Chinese Communist Party. They were confirmed to have played an active role in the Beijing Special Branch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and the Beijing Committee of the Communist Youth League of China.
In December 1928, after the so-called "December Theses" in which the Comintern ordered the dissolution of the Joseon Communist Party, Korean communists had no choice but to enter the Chinese Communist Party.
The revolutionary movements and relations between Jang Gi-Rak and Han Wi-Geon are good examples of the Korean communists' ordeals in the Chinese Communist Party.
Especially, the conflicts of the revolutionary lines between these two people would not have existed only in the two people. Jang Ji-Rak, who had been a long-time supporter of the Chinese Revolution, felt doubts about the Chinese Revolution through a series of ordeals, and finally joined the Korean national revolution movement again.
On the other hand, Han Sang-Joon and Kim Seung-Ho firmly believed the inseparable relation between Korean national liberation movement and Chinese Revolution participation and put their theory into practice.
These Koreans are the representative figures who dedicated themselves to Chinese Revolution before the independence of their country.
1920년 초부터 상해파 고려공산당세력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세력이 북경에 조직을 두어 주도권을 둘러싸고 경쟁적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구성 및 노선에 불만을 가진 박용만, 신채호를 비롯한 무장투쟁론자들은 북경에 집결하여 연해주, 만주 일대의 독립군을 통합하고 무장투쟁을 전개할 계획을 추진해 나갔다. 그리고 계획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이동휘 고려공산당세력 및 문창범 대한국민의회의 사회주의세력과 연대관계를 맺었다.
1922~1923년 사이에 장건상 등 공산주의 혁명가들은 북경의 한인 유학생들과같이 혁명운동을 전개해나갔다. 이들은 공산주의사상을 연구하면서 창일당을 조직하고 비밀결사인 혁명사를 결성하고 ≪혁명≫을 간행하여 공산주의적 혁명사상과방략을 선전했다.
1925~1926년 사이에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한인 공산주의자가 늘어났다. 이들은 중국 공산당 북경특별지부 및 중국공산주의청년단 북경지방위원회 소속 각 지부에서 활약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1928년 12월 코민테른이 조선 공산동 조직 해산을 지시한 이른바 ‘12월 테제’가내려진 이후에 재중 한인 공산주의자는 중국 공산당에 들어가서 활동할 수밖에없게 되었다. 장지락과 한위건의 혁명운동 및 관계는 중국 공산당 내에 활동했던한인 공산주의자들이 겪었던 시련을 잘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두사람 사이에 빚어진 혁명 노선의 갈등은 비단 이 두 사람한테만 존재했던 것이아니었을 것이다. 일찍부터 장기간 중국 혁명에 투신했던 장지락은 일련의 시련을겪은 끝에 중국 혁명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되고 다시 한국 민족혁명운동에 합류하였다.
반만에 한위건과 김성호는 한국 민족해방운동과 중국혁명 참여의 불가분 관계를 굳건히 믿고 이론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실천으로 옮겼다. 이들은 한인으로서끝까지 중국혁명에 투신하다가 조국해방을 보기 전에 희생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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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9-05-02 | 학회명변경 | 영문명 : A Laboratory of Korean Studies -> Institute of Korean Studies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12-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11-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2차) | KCI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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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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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3 | 0.3 | 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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