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I등재
관찬 사료의 기사를 통해 본 조선후기 남한산성의 운영 = Management of Namhansanseong in late Joseon
저자
강석화 (경인교육대학교)
발행기관
경인교육대학교 기전문화연구소(THE INSTITUTE FOR KYEONGKI CULTURAL STUDIES Inchon National University of Education)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23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207-229(23쪽)
제공처
Namhansanseong is the place where king Injo moved the royal court and stood against the Qing army as it invaded in December 1636(Injo 14th) until when he surrendered in January of the next year. It was assumed that there would rise conflicts because Joseon vowed vengeance for the loss to Qing. Moreover, it was thought that Qing couldn't last long since they consisted of barbarians and that there was a high chance to occur a war again when they should try to return to their home. Whether it was triggered by Joseon or Qing, the concern that it was possible to occur another clash between the two didn't fade in late Joseon. This thought made Namhansanseong seem to be an important defense base of the capital area in case of emergencies.In late Joseon, Namhansanseong meant the memories of war that both royals and people underwent together, the devotion of whom gave their lives for their country and king and the worries of the king and his subjects. Therefore, the royal court was much interested in the maintenance and extension of Namhansanseong. They kept track of how to fix and maintain the place, military recruitment and arrangement for protection and the storage and management of rations. For Namhansanseong was supposed to be the main base for the potential war, the repair of walls and the development of the defense system were constantly performed. Also, the system of gathering and managing people from nearby towns including Gwangju and the residing monks in the fortress was regularly organized. Additionally, storing rations was another important role of Namhansanseong. Its system was emphasized to be the general law for construction and personnel management of Bukhansanseong and Suwon Hwaseong. After mid-18th century, as Qing's policies settled down and the probabilities of war decreased, the role of Namhansanseong changed. With the increasing interest of the operation of stored rations, Namhansanseong was counted as a supplement of the national finance instead of a military base. The rations in Namhansanseong were distributed to and collected from Gwangju and nearby regions as Hwangok. But, due to poor harvest and corruption, it was difficult to maintain the standard quantity. Nevertheless, the actual amount wasn't low, so that the court members personally used it as a spare resource when needed. In the end, such uses increased so much to fabricate its existence in 19th century.
During Sedojeongchi period, it was impossible to properly keep the rations in the fortress because of the three administrations' disorders. In the study, the contents of articles related to Namhansanseong from the official records in late Joseon are briefly categorized. Written in chronological order, it is possible to refer the records to understand how the status of Namhansanseong and its policy changed as time passed. The theme and the articles in the study are expected to be a basis for another full-scale research for the management of Namhansanseong and its status.
남한산성은 1636년(인조 14) 12월에 청군의 침공으로 전쟁이 시작되자 국왕 인조가 조정을 이끌고 입성하여 이듬해 1월까지 저항하다가 결국 항복한 곳이다. 전쟁에 패배한 조선은 청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였으며 재차 충돌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이적(夷狄)의 나라인 청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고 그들이 본거지로 돌아가려 할 때에도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하였다. 조선의 공격으로 시작하건, 청이 먼저 시작하건 청과 다시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는 조선후기 내내 사라지지 않았고, 남한산성은 유사시에 수도권의 중요한 보장처[畿輔]로서 인식되었다. 조선후기 남한산성은 군신이 함께 고난을 겪은 전쟁의 기억, 국가와 국왕을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의 충절, 역경을 이겨내기 위한 국왕의 근신 등을 상징하였다. 조정에서는 남한산성의 보수와 증축, 성 내외 방어시설 및 관사의 수리와 유지, 수비를 위한 병력 동원과 배치, 군향곡의 비축과 운영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남한산성은 또다른 전쟁에 대비한 중요한 군사 거점이었으므로 성벽의 보수와 방어 시설 보완 작업은 꾸준히 이루어졌고 광주 및 인근 읍 주민과 산성 주재 의승(義僧)의 동원과 관리 체계도 계속 정비되었다. 군향곡 비축 역시 남한산성의 중요한 기능이었다. 남한산성의 운영 방식은 북한산성 및 수원 화성 축조와 인력 관리의 전범(典範)으로 중시되었다. 18세기 중엽 이후 청의 정세가 안정되고 전쟁 가능성이 줄어들면서 남한산성의 의미는 바뀌었다. 비축된 군향곡의 운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남한산성은 군사 거점이라기보다는 국가 재정의 보완책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남한산성의 군량은 광주를 비롯한 주변 지역에 환곡으로 분배와 수납이 이루어졌으나 흉작과 포흠 때문에 기준 수량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명목상 수량은 적지 않았으므로 조정에서는 필요할 때면 언제라도 전용할 수 있는 재원으로 치부하여 관리하였고 19세기에는 그러한 전용액도 늘어나 허설화되었다. 세도정치기 삼정 문란이 심해지는 중에 산성 군향곡의 정상적인 유지 역시 불가능했던 것이다. 본 연구는 조선후기 관찬서에 수록된 남한산성 관련 기사의 내용을 주제별로 간략히 정리한 것이다. 편년체 관찬서의 특성상 시간적 흐름에 따라 남한산성의 위상과 경영 방식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 글에서 다룬 주제와 기사의 내용은 남한산성의 운영과 위상에 대한 보다 본격적인 연구의 기초가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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