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朝後期實學派와 平和主義 = A Positive School of The Latter Period of The Yi Dynasty and Peaceful Thoughts
저자
李乙浩 (光州博物館)
발행기관
경북대학교 평화문제연구소(PEACE RESEARCH INSTITUTE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1978
작성언어
Korean
KDC
349.904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25-37(13쪽)
제공처
소장기관
이조후기실학파들 중에서도 특히 북학파라 불리우던 일련의 학자들은 그들의 대청관계에 있어서 숭명배청을 주장하던 보수세력과는 정반대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조선조 오백년을 통하여 그들의 대외정책은 한말의 개화기를 제외하고는 일본과 중국과의 관계로 집약되며 중국은 명 청이라는 두 왕조와의 관계에서 구현된다. 조선조는 그러한 국제적 환경에 처하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양대국난을 치루었던 것이다.
잠시 일본과의 관계는 뒤로 미루고 중국과의 관계를 살펴본다면 저 멀리 이왕조건국 초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태조원년은 영태조홍무24년이니 그간에 명나라는 고려와의 사이에 일진일퇴하는 외교적 난제를 안고 있었으나 이성계 위화도회군(홍무 21년)이래 외교정책을 일신하여 명나라의홍무년호를 다시 사용하는 한편 명나라의 의복을 입고 원나라의 고복을 금하는 등 선린평화정책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이씨왕조의 명과 나라에 대한 선린우호관계는 그의 형식은 여하간에 국시로서 확립되자 이에 숭명화로 발전했던 것이다. 포은 정몽주도 이에 동조했다는 점에서는 숭명모화론자다.
이는 중화사상에 근거한 화이관계의 이데오로기에 의하여 화이관계의 이데오로기에 의하여 양국의 선린평화는 겨우 그의 명맥을 유지한 것이니 이성계가 정명파병을 반대한 이유로서 열거한 사개항복중 이서역대의 불가함을 그 이유의 하나로 삼은 것은 이미 그의 심중에는 「이소사대」의 뜻이 굳어져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자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사명」을 의미한다.
이소사대의 관계는 존대와 외복의 관계로서 그들의 화이론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위장된 선린평화인 것이다.
한민족에게는 삼국시대 이래 고구려에 의하여 대중국적 주체의식이 정립되었고 그들의 강성 또한 광활한 지역을 점유하였다.
그러나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은 강계의 남하를 초래하였고 그로 인한 한민족의 북에 대한 향수는 가실길이 없다.
고려 자체가 이미 고구려의 계승으로 자부하였고 원구를 맞아 설욕의 의지는 더욱 굳어질 따름이었다. 고려말기의 그 어려운 처지에서도 위왕과 최영에 의하여 조민수와 이성계로 하여금 각각 좌우군사통사로 삼게 하여 요동정벌의 대거를 모사한 것도 면면히 흘러나오는 한민족 중원도모 및 고구려강토에 대한 북진의욕의 발로인 것이다.
그러한 혁맥이 이왕조의 이소사대론에 의하여 단절되고 게다가 존숭과주의 학풍은 더욱 더 이러한 풍조에 가세하여 일로 자아상실을 가속화시키었다.
1936년 인조 14년 병자년은 한 중양국의 역사상 가장 중대한 의미를 가지는 해가 되었다.
만주를 근거로 하여 건국한 여진족후금의 세력이 확대되어 드디어 병자 4월에 칭제하고 국호를 청이라고 고치었으니 이로부터 중원의 대세도 기울게 되지 청과 우리나라와의 외교관계는 더욱 미묘하게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 있어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사실은 명 청 중 택-을 요하는 상황과 아울러 명의 은조일국초보다도 임진왜란 때 내원했던 명군에 대한 의리-에 대한 문제의 처리인 것이다. 광해문 8년 (1616)에 후금이 자립하고 명의 변경을 침략하기 시작하자 명은 우리나라에 원병을 청하였다. 처음에는 쉽사리 응하지 않다가 임란의 은조때문에 동10년 (1618)에 일만삼천의 원병을 보냈으나 결과는 명군과 더불어 대패이었다.
이에 광해군의 외교정책은 화전양양의 결단이 요청되는 상황하에서 명을 저버리지도 않고 후금의 노여움도 사지않는 정책의 수행을 위하여 고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조반정 후 후금은 심양(봉천)에 천도하고 명의 요서지방을 침공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청태조는 전상으로 죽자 태종이 그 뒤를 이었다. 이에 정세는 또다시 일변하여 태종은 먼저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려고 왕자아민에게 병삼만을 주어 장현침입하게 하니 이들은 안주 평양을 거쳐 평산에 육박하였다. 인조 이하 조신들은 세불리하므로 란을 강화도로 피한 후 최명길등 주화론자들에 의하여 화의가 성립되지 대체로 그들과는 「형제의 맹약을 맺고 철병 후 서로 침략하지 않을 것과 세공및 국경호시(무역)을 허한다」는 조건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해는 인조 5년 정범이므로 정묘호란이라 이르지만 후금을 계속하여 우리나라를 괴롭히다가 다시금 병자호란을 일으키고 만다. 그것은 병자(인조14년 1636) 12월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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