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I등재
『삼국유사』의 후고구려 인식 = Identification of the Later Goguryeo in Samguk-Yusa
저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16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89-135(47쪽)
KCI 피인용횟수
4
제공처
이 글은 13세기의 사서인 『삼국유사』가 후고구려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고찰한 것이다. 논의는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진행하였다. 먼저 왕력의 후고려궁예조 기록을 다른 사서와 비교하여, 이 조목의 작성에 어떠한 자료계통이 쓰였는지를 탐색하였다. 다음으로 천사옥대조(기이)와 황룡사구층탑조(탑상)의 신라 삼보 관련 이야기 가운데 ‘후고려왕’의 용례가 확인되는 바, 그실체를 밝히고 이 대목이 어느 시대에 해당하는지 점검하였다. 이러한 검토결과를 바탕으로 『삼국유사』 편찬자들의 후고구려 인식을 가늠하였다. 후고려궁예조의 검토를 통해 이 조목의 작성에 『삼국사기』가 전거로서 기여한 바가 적었음을 확인하였다. 특히, 궁예가 辛亥년(901)에 ‘고려’를 일컬었다고 기술한 점, 후고구려의 도읍 변천을 철원 → 송악 → 철원으로 설정한점, 궁예정권의 국호와 연호가 매우 불충분하게 작성된 점 등을 주목하였다. 이는 『삼국유사』 찬자들이 『삼국사기』에서 보이는 후고구려나 궁예에 대한 인식을 따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한다. 한편, 『삼국유사』 내에는‘고려’가 전ㆍ후의 관계로 설정되어 있다. 따라서 이를 토대로 천사옥대조와 황룡사구층탑조에서 보이는 ‘후고려왕’은 궁예로 보는 것이 옳음을 언급하였다. 불교적 기물인 삼보의 존재만으로 궁예가 침략 모의를 중단했다는 것은, 그러므로 지극히 신라 중심적인 관점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의 궁예 관련 기록들은 김부식의 이른바 ‘태조정통론’에 대한 배려가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런 점에서 왕력의 후고려궁예조 작성에 이 기록들이 선택되지 않았다는 것은 『삼국유사』 편수자들이 정통론과는 무관했음을 보여준다. 다만, 국호 태봉은 의도적으로 기록하지 않았다고 생각되는데, 이는 그들이 궁예의 태봉시기를 부정적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천사옥대조와 황룡사구층탑조에 삼보 관련 이야기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 특히 황룡사구층탑조의 작성자는 신라의 삼보를 중국의 구정에 견주었다. 구정의 설화에 의하면 초 장왕은 주를 침범하려 했다가 주에 구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서 본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는 후고려왕 궁예가 신라를 침략하려다가 신라에 삼보가 있다는 것을 듣고 그 모의를 중단했다고 하는 『삼국유사』의 삼보 관련 기사와 흡사하다. 물론 이 일화들은 구정이나 삼보의 호국적인 면모를 강조하는 것에 그 본의가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주와 신라를 정복하려 했던 장왕과 궁예의 야욕을 폭로하는 역할도 한다. 이를 통해 『삼국유사』서술자들이 후고구려와 궁예를 우호적으로 인식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주지하듯이 일연은 일생의 대부분을 경상도 지역에서 보냈다. 이는 『삼국유사』가 신라 중심의 기록을 수록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며, 전반적으로 신라에 편향적인 기술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탑상편이 신라의 불교사가 지극히 오랜 옛날부터 시작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작성되었다는점을 고려한다면, 결국 『삼국유사』 찬자들은 신라로부터 시작된 오래된 불교가 고려를 통해 계승되었음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삼국유사』가 편찬된 13세기의 고려 사회는 이민족의 침략으로 시련을 겪고 있었다. 당시 일연은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외압으로 인한 참상을 직접 목도했거니와, 그에 대해 『삼국유사』 곳곳에 기록하였다. 아마도 일연은 신라의 오랜 불교 전통이 몽고군의 침략으로 인해 끊기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지녔던 듯하다. 그런 점에서 『삼국유사』 찬자들은 신라의 영험함이 깃든 불교적 기물을 파괴하는 궁예와 신라의 오랜 불교 전통을 파괴하는 몽고를 동일시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삼국유사』 찬자들이 궁예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토대로서 작용하였을 것이다. 요컨대, 『삼국유사』 편찬자들은 후고구려를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하였다. 다만, 그것은 소위 ‘태조정통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신라의 역사적 위상에 대한 인식과 그들의 현실적인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더보기This essay studied how the historiography, Samguk-yusa of the 13th century perceived the Later Goguryeo. The discussion proceeded with three major stages. First, the study compared records of the Later Goguryeo in the article of ‘Hugoryeo-gungye’, Wangryok with those in other history books, and then explored what kind of materials had been used for the article. Next, as the use of the term ‘Hugoryeo Wang’ can be found in stories related to Silla’s Sambo in ‘Cheonsaokdae’ from Kiyi and ‘Hwangryongsa-gucheungtop’ from Topsang records, it was able to check which period of history was reflected in those chapters. Based on the result, it was possible to understand how the compilers of Samgukyusa perceived the Later Goguryeo. Through the review on the Article of ‘Hugoryeo-gungye’, it was proved that Samguk-sagi was little contributed to drawing up the article as a source, which means that the compilers of Samguk-yusa were not likely to follow the perception of the Later Goguryeo or Gung-ye shown in Samguk-sagi. Especially, the study paid attention to a few descriptions such as Gung-ye established ‘Goryeo’ in 901, the capital change of the Later Goguryeo was set from Cheol-won to Song-ak and Cheol-won again, and few descriptions of the name of Gung-ye reign and its era name. While, Samguk-yusa described ‘Goryeo’ as Former-Later Goryeo. Based on the reference, it would be right to see ‘Hugoryeowang’ shown in the Article of ‘Cheonsaokdae’ and ‘Hwangryongsa-gucheungtop’ as Gungye. Thus, the passage that Gung-ye suspended his invasion plot just because of the existence of Sambo which is Buddhistic objects implied an extremely Silla-centered view. The records related to Gung-ye in Samguk-sagi were mainly based on Kim Bu-sik’s consideration of, so called, ‘Taejo Legitimacy’. Thus, the reason that the records were not selected for the Article of ‘Hugoryeogungye’ in Wangryok means that the compilers of Samguk-yusa had nothing to do with the ‘Taejo Legitimacy’. But, it would be intentional not to record the country name, Taebong because they judged Taebong as the period of Gung-ye’s government negative. That can be understood through the fact they contained the story related to Sambo in the Article of ‘Cheonsaokdae’ and ‘Hwangryongsa-gucheungtop’. Especially, the compiler who drew up the Article of ‘Hwangryongsagucheungtop’ compared Silla’s Sambo(Three Treasure) to Chinese Gujeong. According to the tale of Gujeong, King Zhuang of Cho tried to invade Ju Dynasty, but returned back home to see that Ju Dynasty had Gujeong. The tale is quite similar to the story that Gung-ye, King of the Later Goguryeo tried to invade Silla, but finally gave it up to see there was Sambo in Silla as described in Samguk-yusa. Of course, the original purpose of these tales is to emphasize the patriotic aspect of Gujeong of Sambo, but on the other hand, it reveals King Zhuang and Gung-ye’s ambition to conquer Ju and Silla respectively. Through this, it can be demonstrated that the authors of Samguk-yusa did not see the Later Goguryeo and Gung-ye in an amicable way. As is known, Il-yeon spent most of his life in Gyeonsang-do region. This is the reason why Samguk-yusa has Silla-centered records, and generally Silla-biased descriptions were made. Especially, if the fact that Topsang chapter was written with the purpose of emphasizing the rich history of Buddhism in Silla is taken into consideration, it tells us that the authors of Samguk-yusa wanted to say Buddhism from Silla was succeeded by Goryeo. Goryeo in the 13th century when Samguk-yusa was drawn up was suffered from invasions from foreign dynasties. Il-yeon looked around a lot of districts and witnessed devastation caused by foreign invasions, and often left the fact in Samguk-yusa. Il-yeon might feel a strong hostility toward the fact that the long Buddhist tradition of Silla which he tried to emphasize was disconnected by the Mongolian army’s invasion. Thus, the compilers of Samguk-yusa were in with a shout of identifying Mongolia that tried invading Goryeo with the Later Goguryeo that tried invading Silla. That is, they perceived Gung-ye as a hostile force that tried destroying the miraculous Buddhist objects. In short, the authors of Samguk-yusa identified the Later Goguryeo as strongly negative. That was originated from their perception of historical status of Silla and their realistic situation, not from, so called, ‘Taejo legitimacy’.
더보기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
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0-01-01 | 평가 | 등재 1차 FAIL (등재유지) | KCI등재 |
200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6-06-10 | 학술지명변경 | 한글명 : 전남사학 -> 역사학연구 | KCI등재 |
2006-03-21 | 학회명변경 | 한글명 : 전남사학회 -> 호남사학회영문명 : Chonnam Historical Association -> Honam Historical Association | KCI등재 |
200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3-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2016 | 0.68 | 0.68 | 0.68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63 | 0.6 | 1.183 | 0.18 |
서지정보 내보내기(Export)
닫기소장기관 정보
닫기권호소장정보
닫기오류접수
닫기오류 접수 확인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확인
닫기이용약관
닫기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약관 (2017년 1월 1일 ~ 현재 적용)
학술연구정보서비스(이하 RISS)는 정보주체의 자유와 권리 보호를 위해 「개인정보 보호법」 및 관계 법령이 정한 바를 준수하여, 적법하게 개인정보를 처리하고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에 「개인정보 보호법」 제30조에 따라 정보주체에게 개인정보 처리에 관한 절차 및 기준을 안내하고, 이와 관련한 고충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개인정보 처리방침을 수립·공개합니다.
주요 개인정보 처리 표시(라벨링)
목 차
3년
또는 회원탈퇴시까지5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3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2년
이상(개인정보보호위원회 : 개인정보의 안전성 확보조치 기준)개인정보파일의 명칭 | 운영근거 / 처리목적 | 개인정보파일에 기록되는 개인정보의 항목 | 보유기간 | |
---|---|---|---|---|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자 가입정보 파일 | 한국교육학술정보원법 | 필수 | ID, 비밀번호, 성명, 생년월일, 신분(직업구분), 이메일, 소속분야, 웹진메일 수신동의 여부 | 3년 또는 탈퇴시 |
선택 | 소속기관명, 소속도서관명, 학과/부서명, 학번/직원번호, 휴대전화, 주소 |
구분 | 담당자 | 연락처 |
---|---|---|
KERI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정보보호본부 김태우 | - 이메일 : lsy@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439 - 팩스번호 : 053-714-0195 |
KERI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개인정보보호부 이상엽 | |
RIS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대학학술본부 장금연 | - 이메일 : giltizen@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149 - 팩스번호 : 053-714-0194 |
RIS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학술진흥부 길원진 |
자동로그아웃 안내
닫기인증오류 안내
닫기귀하께서는 휴면계정 전환 후 1년동안 회원정보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으신 관계로 개인정보가 삭제되었습니다.
(참조 : RISS 이용약관 및 개인정보처리방침)
신규회원으로 가입하여 이용 부탁 드리며, 추가 문의는 고객센터로 연락 바랍니다.
- 기존 아이디 재사용 불가
휴면계정 안내
RISS는 [표준개인정보 보호지침]에 따라 2년을 주기로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관하여 (재)동의를 받고 있으며,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휴면계정으로 전환됩니다.
(※ 휴면계정은 원문이용 및 복사/대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휴면계정으로 전환된 후 1년간 회원정보 수집·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RISS에서 자동탈퇴 및 개인정보가 삭제처리 됩니다.
고객센터 1599-3122
ARS번호+1번(회원가입 및 정보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