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I등재
임진왜란기 대마도의 조선 교섭 = The Japanese Invasion of Joseon in 1592 and Tsushima
저자
민덕기 (청주대학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13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97-135(39쪽)
KCI 피인용횟수
5
제공처
소장기관
임진왜란 이전의 대마도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정벌’ 의도에 대하여 처음엔 조선측의 貢物이나 인질 제출로 대체하여 그 의도를 희석시키려 하나 실패한다. 히데요시가 이어 조선국왕의 직접적인 來朝를 명령하게 되자, 入朝가 절대 불가능함을 익히 알고 있는 대마도로서는 통신사의 일본 파견으로 대신하려 조선과 교섭하게 되었고, 1590년 通信使가 渡日할 수 있게 된다.
통신사측에 히데요시가 제시한 것은 明을 정벌할 것이니 조선이 그 길잡이가 되라는 요구였지만, 대마도는 明에 조공하겠으니 길을 빌려달라는 것으로 그 요구를 바꿔치며 전쟁방지 공작을 벌인다. 이러한 대마도의 공작은 대마도 자신을 위해서였다. 조선과의 무역적 독점관계를 지키기 위해서였고, 일본의 大軍이 대마도를 거쳐 조선으로 향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일본군으로 징발되는 수난을 겪지 않기 위해서였다. 왜란에 징발된 대마도 병사는 5,000명이나 되었다. 당시 대마도의 인구가 50,000명이라 해도 이는 엄청난 부담이었을 것이다.
임진왜란기 대마도주 종의지(宗義智)와 그의 외교고문격인 겐소나 야나가와 시게노부는 모두 제1군의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휘하에서 그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대마도측의 독자적인 조선 교섭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대마도가 전혀 교섭 표면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1593년 5월 겐소는 일본 나고야(名護屋)에서 ‘明사절’에게, 히데요시가 明에 ‘假道陳情’하려 한 것을 조선이 방해하여 전쟁이 발생했다고 그 책임을 조선에 전가하고 있다. 또한 정유재란 직전 시게노부는 조선이 인질이나 貢物을 보내와 히데요시의 체면을 세워주면 再侵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선에 교섭하고 있다. 이로 보아 대마도의 조선교섭이 히데요시의 전쟁 수행에 결코 근본적인 변화를 주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1598년 8월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일본군이 철수하였다. 이어 시작된 강화교섭 또한 왜란 이전처럼 대마도가 그 전면에 나서게 된다. 주목되는 것은 대마도의 교섭이 대마도 私的인 조선과의 무역관계 재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왜란 종식을 위한 講和교섭이었다는 점이다. 특히 1600년 세키가하라의 전투 이후부터의 교섭은, 일본 政局을 장악한 이에야스의 의도를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야스가 대마도를 통해 조선에 요청한 것은 ‘통신사’의 파견이었다.
계속되는 대마도의 ‘통신사’ 파견 요구에 조선은 왜란 전처럼 조건부 수용의 자세를 나타내게 된다. 그 조건부란 이에야스가 먼저 서한으로 강화를 요청하라는 것이고(‘先爲致書’), 왜란 때 조선왕릉을 훼손한 일본군을 압송해 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마도의 주선과 공작으로 두 조건이 이행되었다는 명분을 가지게 된 조선은 1607년 講和의 의미를 가진 사절을 파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명칭은 ‘통신사’를 피해 이에야스의 서한에 회답하고 왜란에 잡혀간 조선인을 송환한다는 의미의 ‘회답겸쇄환사’라 이름하였다.
‘회답겸쇄환사’가 일본을 다녀온 다음해인 1608년 1월 이후, 대마도는 겐소 등을 ‘일본국왕사’ 명의로 조선에 파견하여 임진왜란으로 중단된 약조관계를 성립시키기 위한 교섭을 행하게 한다. 교섭의 결과 1609년 조선측은 이른바 12개조의 己酉약조를 결정하고 대마도에 이를 통고한다. 그런데 이 기유약조는 이전의 약조보다 축소 ...
Prior to the Japanese invasion of Joseon in 1592, Tsushima attempted to dilute Toyotomi Hideyoshi’s intention to conquer Joseon through that country’s submission of tribute or hostages, but failed. When Hideyoshi subsequently ordered the King of Joseon to visit Japan, Tsushima,knowing that this was impossible, decided to negotiate with Joseon in order to substitute the dispatch of diplomatic missions to Japan for direct assistance, and a diplomatic mission from Joseon went to Japan in 1590.
Hideyoshi had actually demanded Joseon through the diplomatic mission to guide the army along the way to conquering Ming China, but Tsushima replaced that demand with a request to borrow a path to Ming China in order to submit tribute to China, attempting to sabotage the war. This effort by Tsushima was for Tsushima itself. Tsushima intended to secure its monopolistic trade relationship with Joseon and to prevent the Japanese forces from advancing into Joseon through Tsushima. At the same time, Tsushima intended to prevent any suffering from being drafted into the Japanese forces, though almost 5,000 soldiers from Tsushima were drafted. Even if we assume that the total population of Tsushima was 50,000, this would have been an enormous burden for Tsushima.
The Governor of Tsushima Sō Yoshitoshi and his diplomatic advisors Keitetsu Genso and Yanagawa Shigenobu at the time of the Japanese invasion in 1592 were under the command of the general of the first army Konishi Yukinaga. Therefore, it would have been impossible for Tsushima to negotiate with Joseon independently. However, Tsushima did appear in the center of negotiations. In the fifth lunar month of 1593, Genso told the envoy of Ming China in Nagoya, Japan, that the war occurred because Joseon prevented Hideyoshi from submitting tribute to Ming China and attempted to shift responsibility to Joseon.
Further, just prior to the second invasion of Joseon in 1597, Shigenobu negotiated with Joseon, persuading Joseon that it could prevent a second invasion if the government would send hostages or tribute to Japan,keeping face for Hideyoshi. According to this, Tsushima’s negotiations with Joseon could not make a fundamental change in Hideyoshi’s conduct of war.
The Japanese forces withdrew in the eighth lunar month of 1598 due to the death of Hideyoshi. Tsushima also took the leading role in the following peace negotiations that began, just as prior to the 1592invasion. It is notable that Tsushima negotiated the peace treaty to end the Japanese invasion, not to resume its private trade relationship with Joseon. In particular, the negotiations after the Battle of Sekigahara in 1600 were just a reflection of the intention of Tokugawa Ieyasu, who dominated the political situation in Japan. Through Tsushima Ieyasu requested of Joseon the dispatch of a “diplomatic mission.”Joseon took the position of conditional acceptance of the continuous requests of Tsushima to dispatch a “diplomatic mission,” just as prior to the invasion in 1592. The conditions included a request put to Ieyasu for peace in writing and for sending under escort the Japanese troops who damaged the royal tombs of Joseon during the war. After these two conditions were met with the arrangement and maneuvering of Tsushima, Joseon was able to dispatch an envoy under the meaning of peace to Japan in 1607. However, the title borne by the embassy was not “diplomatic mission” but “Response and Repatriation Mission.” That is, this mission was a response to Ieyasu’s text and to the repatriation of Koreans who were taken to Japan during the invasion.
After the first lunar month of 1608, or one year after the “Response and Repatriation Mission” went to Japan, Tsushima dispatched Genso and others to Joseon as the diplomatic envoy of the King of Japan and negotiated with Joseon for establishing an agreement that was suspended due to the invasion in 1592. As a result of negotiations,Joseon accepted and not...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
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9-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7-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2016 | 1.18 | 1.18 | 1.19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1.06 | 0.98 | 2.155 | 0.1 |
서지정보 내보내기(Export)
닫기소장기관 정보
닫기권호소장정보
닫기오류접수
닫기오류 접수 확인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확인
닫기이용약관
닫기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약관 (2017년 1월 1일 ~ 현재 적용)
학술연구정보서비스(이하 RISS)는 정보주체의 자유와 권리 보호를 위해 「개인정보 보호법」 및 관계 법령이 정한 바를 준수하여, 적법하게 개인정보를 처리하고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에 「개인정보 보호법」 제30조에 따라 정보주체에게 개인정보 처리에 관한 절차 및 기준을 안내하고, 이와 관련한 고충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개인정보 처리방침을 수립·공개합니다.
주요 개인정보 처리 표시(라벨링)
목 차
3년
또는 회원탈퇴시까지5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3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2년
이상(개인정보보호위원회 : 개인정보의 안전성 확보조치 기준)개인정보파일의 명칭 | 운영근거 / 처리목적 | 개인정보파일에 기록되는 개인정보의 항목 | 보유기간 | |
---|---|---|---|---|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자 가입정보 파일 | 한국교육학술정보원법 | 필수 | ID, 비밀번호, 성명, 생년월일, 신분(직업구분), 이메일, 소속분야, 웹진메일 수신동의 여부 | 3년 또는 탈퇴시 |
선택 | 소속기관명, 소속도서관명, 학과/부서명, 학번/직원번호, 휴대전화, 주소 |
구분 | 담당자 | 연락처 |
---|---|---|
KERI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정보보호본부 김태우 | - 이메일 : lsy@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439 - 팩스번호 : 053-714-0195 |
KERI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개인정보보호부 이상엽 | |
RIS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대학학술본부 장금연 | - 이메일 : giltizen@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149 - 팩스번호 : 053-714-0194 |
RIS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학술진흥부 길원진 |
자동로그아웃 안내
닫기인증오류 안내
닫기귀하께서는 휴면계정 전환 후 1년동안 회원정보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으신 관계로 개인정보가 삭제되었습니다.
(참조 : RISS 이용약관 및 개인정보처리방침)
신규회원으로 가입하여 이용 부탁 드리며, 추가 문의는 고객센터로 연락 바랍니다.
- 기존 아이디 재사용 불가
휴면계정 안내
RISS는 [표준개인정보 보호지침]에 따라 2년을 주기로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관하여 (재)동의를 받고 있으며,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휴면계정으로 전환됩니다.
(※ 휴면계정은 원문이용 및 복사/대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휴면계정으로 전환된 후 1년간 회원정보 수집·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RISS에서 자동탈퇴 및 개인정보가 삭제처리 됩니다.
고객센터 1599-3122
ARS번호+1번(회원가입 및 정보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