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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온양 행궁의 건립과 변천 과정 = Buildings and Transition Process of OnYangHengGung(溫陽行宮) in Josu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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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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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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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7.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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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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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138(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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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아산 지역 온천 문화의 역사적 의미를 규명하기 위해 조선 말기까지 온양에만 유일하게 남아있던 온양 행궁의 건립과 그 변천 과정을 고찰한 것이다. 온천욕을 통해 질병을 치료하는 온천요법은 고대부터 동양 의학에서 선호하는 질병 치료법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온천욕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유한 역사도 삼국시대부터 존재하였다. 후대로 내려와 조선시대에는 국왕과 왕실뿐 아니라 양반사대부,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질병 치료를 온천을 찾아 목욕을 하는 것이 빈번하였다. 온양은 조선 초기부터 조선 말기까지 국왕을 비롯한 최고 권력자들이 가장 선호하던 온천지로서 세종 이후에는 왕실 가족들이 湯治를 목적으로 자주 찾던 최고의 왕실 온천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독특한 아산 지역의 온천 문화를 낳은 바탕이 되었다. 온천을 이용한 질병 치유는 그 특성상 국왕이 온천지에 머무는 시간이 길다. 이 기간에도 국왕이 정무를 정지할 수 없으므로 각 부서별로 정부 기구가 일시에 지방으로 옮겨왔다. 이 때문에 국왕과 관리들이 온천욕과 정무 활동, 숙식을 할수 있는 임시 거처로서 행궁을 건축하였다. 온천에 세워진 행궁을 ``溫宮``이라고 한다. 조선왕조 전시기를 걸쳐 국왕이 계속 방문하고 일관되게 잘 유지된 곳은 온양 행궁이 유일하다. 溫宮은 국왕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寢殿과 국왕과 관료들이 국정을 운영하는 政殿, 탕치를 위한 목욕 공간인 湯室이 기본 축을 형성하였다. 이 중에 탕실은 다른 행궁과 달리 온천목욕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온궁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시설이다. 온양 행궁의 건립은 조선 초 세종대부터였다. 세종은 자신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천행을 결심하고 나서 손수 직접 도면을 보면서 건축을 감독하였다. 세종은 민폐에 대한 우려로 인해 작고 소박한 행궁을 건립하였다. 행궁의 구조도 국왕뿐 아니라 병든 사대부와 일반 백성도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목욕 시설을 개조하였다. 그런데 세종은 왕실의 온천행은 간헐적이어서 비워두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왕실이 사용하는 일정 공간을 제하면 나머지 공간은 일반 백성들이 이용 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그러나 온궁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다시 일본군이 재침한 정유재란 때 서울을 향해 북상하던 일본군이 온양 지역을 급습하자 불타고 폐허가 되었다. 이후 180여년간 온궁은 방치되었고 국왕들의 온행도 중단되었다. 온궁이 다시 복구되는 것은 조선후기 현종대이다. 질병 치료를 위해 국왕의 온천행이 재기되자 온양 행궁도 복구되어 어실 6칸, 온천 방 6칸을 비롯한 약 1백여 칸 규모로 신축되었다. 이후 숙종, 영조, 장헌세자까지 국왕과 왕세자의 온양 온천행은 활발하게 이루어져 아산 지역에 독특한 온천 문화를 형성하였다. 장헌 세자의 온행 이후 국왕과 왕실 가족의 온행은 다시 중단되었다. 하지만 정조가 부친인 장헌세자의 추억의 장소인 온궁에 영괴대를 설치하고 영괴대비를 세우는 등 각별한 관심을 두어 관리하였다. 이후 온궁은 많이 퇴락하였지만 19세기 전반기까지는 외형이 완전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고종 때 이르러 정무를 보던 정전이 없어지고 새로운 건물인 함락당과 혜파정이 신축되었다. 이것은 대원군이 사용하던 온천 별장이었다. 그러나 1904년부터 일인들에 의해 온궁이 침탈되면서 일인들의 손에 넘어가고 온궁터에 신정관이 지어지면서 온궁은 자취를 감추고 역사속으로 사라져 갔다. 온궁은 조선시대 온천 문화를 보여주는 상징이며 온양온천이 왕실 온천이었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온궁의 역사를 통해 한국 온천 문화의 역사적 실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더보기OnYang(溫陽) was a hot spring spot that men of the highest powers such as kings preferred most from the early to the late period of the Josun Dynasty. Especially since King Sejong(世宗) sovereignty, it became the supreme hot spring spot for royal families to visit on the purpose of curing suffered body. This background accounts for origin and historic hot spring cultures Asan(牙山) area. Disease treatment by the means of hot spring bath can only takes effect when it is regularly taken, but not when it`s only one time event. Usually, kings of Josun dynasty stayed in OnYang(溫陽) at least for eight days, and no more than for 57 days. For this reason, HengGung(行宮), king′s temporary palace, was built as a temporary dwelling place and when built in a hot spring, it is called OnGung(溫宮). There were plenty of occasions that HengGung was constructed in a hot spring where kings of Josun often visited. However, OnYang HengGung was the only place that was regularly visited by kings and maintained after construction of OnGung during and after the period of war with Japan. The construction of OnYang HengGung was accomplished by King Sejong, the early period of Josun dynasty. King Sejong decided to visit OnYang in order to cure his disease and conducted himself a general management over the construction of HengGung. For worries of causing inconvenience to his people, small and simple HengGung was ordered to be constructed. Bath equipment was remodeled so that sick noble men and general people as well as kings could together use it. Because HengGung was not most of time occupied due to an intermittence of Royal families`s visiting to a hot spring, structure and places of HengGung not used by noble families were considered for the use of general people. Yet, OnGung came to burn down and became destroyed when Japanese army invaded OnYang area called JungYuJeRan(丁酉再亂), following invasion of Japan after outbreak of YimJinOweRan(壬辰倭亂). Afterwards, OnGung was left unmanaged and royal families` visiting was stopped. It was in Hyunjong(顯宗) generation, the late period of Josun dynasty that visiting to a hot spring was resumed. He visited OnYang on the purpose of health care that numbered five times. Then, OnYang HengGung was recovered and approximately 100rooms for dwelling was newly built, including six rooms for a king, six rooms for bathing. Hereafter, kings and their son`s visiting to OnYang was actively conducted for 95 years from Hyunjong to Janghunseja(莊獻世子), which helped to form original cultures of hot spring of Asan area. This continuous visiting was paused after Janghunseja. But King Jungjo(正祖) gave a special care to OnGung by building YoungGweDae(靈槐臺) and YoungGweDaeBi(靈槐臺碑) and managing them to honor his father, Janghunseja. Even though OnGung lost its initial popularity, buildings of HengGung were well maintained according to Josusam`s OnJungGi(溫井記), book written when Josusam traveled to OnYang in 1834, King Soonjo 34th year. A king`s office in OnGung was out of its existence in 1871, King Gojong eighth year. However, at that time OnGung was still under operation in that Hamrackdang(涵樂堂) and Hyepajung(惠波亭) were newly constructed and Dewongun(大院君) used that place as a villa. But, OnGung was taken to Japanese hands since 1904 and as Sinjungkwan(神井館), built by Japanese for the use of commerce, was placed in OnGung area, OnGung concealed its track to an unlocked p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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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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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19-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7-03-06 | 학회명변경 | 한글명 : 인문과학연구소 -> 인문학연구소 | KCI등재 |
2016-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2-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11-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9-06-12 | 학회명변경 | 영문명 : Soonchunhyang university institute of humanities -> The Institute of Humanities at Soonchunhyang University | KCI후보 |
2009-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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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52 | 0.52 | 0.53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59 | 0.57 | 0.975 | 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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