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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대 척신의 세력화와 상호갈등 = Influence and Mutual Conflict of Chucksin(戚臣) During the Reign of Gwanghaegunn(光海君, 1608~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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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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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서 척신(戚臣)이 국왕(國王)을 보조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특별한 모습이 아니다. 그럼에도 본 논문에서 광해군대의 척신에 주목한 이유는 명종(明宗)대의 척신정치가 몰락한 후, 다시 재등장했던 시대적 흐름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 것이다. 이 시기는 사림세력이 명종대의 척신을 직접 제거하며 정국을 주도했기 때문에 척신의 정치 참여를 극도로 경계했다. 그렇기 때문에 척신이 정국을 독점하기에 상당히 어려움이 많았다. 이후에 선조(宣祖)가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정국운영을 주도하기 시작했고, 이를 위해서 자신의 척신을 적극적으로 등용하면서 척신은 다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여 정국을 장악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은 즉위하였음에도 선조의 적장자(嫡長子)가 아니었고, 적자(嫡子)인 영창대군(永昌大君)과 장자(長子)인 임해군(臨海君)이 생존해 있었으며, 명(明) 황제에게 책봉(冊封)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대내외적인 상황으로 광해군 또한 자신의 척신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정국을 운영하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광해군의 척신 또한 자신의 미약한 정치적 기반을 국왕과의 결합을 통해서 강화시켰다.
광해군의 척신인 삼창(三昌)으로 불리는 유희분(柳希奮)·박승종(朴承宗)·이이첨(李爾瞻)과 임취정(任就正)은 학파(學派)를 기반으로 하여 세력을 형성한 것이 아니므로 학문에 입각한 정국운영논리를 갖추지 못하였다. 척신은 정국을 운영하는 방향으로 광해군이 추구하는 왕권강화책에 발맞추었고, 이를 통해서 획득한 권력으로 개인의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척신세력 내부에서는 갈등이 발생하였고, 정국의 주도권을 놓고서 첨예한 대립으로 이어졌다.
광해군대는 정치적인 옥사(獄事)가 다수 발생하였다. 계축옥사(癸丑獄事) 이전의 옥사들은 광해군의 왕권강화책을 추진하기 위한 옥사였다면, 신경희옥사(申景禧獄事)·최기옥사(崔沂獄事)·허균옥사(許筠獄事)는 척신 간의 갈등으로 이용된 옥사였다. 또한 광해군대 후반에는 이조판서(吏曹判書), 병조판서(兵曹判書)와 같은 요직에 오랜 기간 동안 인사를 임명하지 못하였는데, 이는 척신 내부의 갈등으로 파생된 결과였다. 이렇듯 척신 간의 갈등이 심각하게 고조되었으나, 광해군의 정국운영 방식은 조율하지 못하였고 이러한 상황은 인조반정(仁祖反正)이 발생했던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이 시기는 재야언론과 유생언론이 수용되면서 공론정치(公論政治)가 활성화되어 정치참여계층이 확대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계축옥사와 폐모론(廢母論)을 계기로 정국을 운영하는 주체로 척신세력이 아닌 정치세력은 거의 정국에 참여하지 않았다. 정치참여계층이 확대되는 시기였지만, 오히려 정치에 참여하는 범위는 축소된 것이다. 광해군 또한 폐모론을 중지하는 등의 공론을 수렴하지 않았고, 척신세력을 계속해서 중용하였다. 결국 광해군대의 정국은 타협이나 공존은 없는 정국으로 귀결되었다. 광해군이 척신만을 중용하면서 파생되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고, 이는 인조반정이 여타의 반발 없이 수용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It was not uncommon for Chucksin (戚臣) to assist the king and exert political influence in the Joseon Dynasty. Nevertheless, this study focused on Chucksin during the reign of Gwanghaegun to zoom in on the tendency that emerged again after the fall of the Chucksin politics of the reign of Myeongjong (明宗). During this period, Sarim (士林) were extremely wary of Chucksin taking parts in the politics as they personally removed Chucksin of Myeongjong to take control of the nation. Therefore, it was quite difficult for Chucksin to participate in politics. Thereafter, Seonjo (宣祖) began to take the lead in running the country to restore the authority lost due to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壬辰倭亂), which led to his appointment of his Chucksin who thereby began to gain political influence.
Although enthroned, Gwanghaegun (光海君) was not a legitimate eldest son of Seonjo, with Yeongchangdaegun (永昌大君), the legitimate son, and Imhaegun (臨海君), the eldest son, alive. In addition, he was not proclaimed as heir by the Ming emperor. Due to such internal and external circumstances, Gwanghaegun chose to run the nation by actively appointing his own Chucksin. Chucksin of Gwanghaegun also strengthened their weak political base using union with the king.
Yoo Hee-bun (柳希奮), Park Seung-jong (朴承宗), Lee Yi-cheom (李爾瞻), and Lim Chwi-jeong (任就正), also known as Samchang (三昌) meaning Chucksin of Gwanghaegun, were not able to come up with a logic of political administration based on academics, as their influence had not been built on any school of thought. Chucksin chose to keep in step with the measures to strengthen the kingship sought by Gwanghaegun as a means of running the nation and focused on gaining personal interest as a result of power acquired accordingly. Amidst such a situation, a conflict arose within Chucksin, which escalated to a sharp confrontation over control of political influence.
Oksa (獄事) became frequent during the reign of Gwanghaegun. While Oksa prior to the Oksa of Gyechuk (癸丑獄事) were made to reinforce the kingship of Gwanghaegun, Oksa of Shin Gyeong-hee (申景禧獄事), Choi Ki-ok (崔沂獄事), and Heo Gyun (許筠獄事) were used in conflicts between Chucksin. In addition, appointments of Yijopanseo (吏曹判書) and Byeongjopanseo (兵曹判書) was not made during the latter half of the Gwanghaegun era for a long time because of the conflict within Chucksin. which was a result of internal conflict. As such, the conflict between Chucksin escalated as time went by. However, Gwanghaegun was unable to make adjustments in the way he ran the country, which came to contribute to Injobanjeong (仁祖反正).
Furthermore, this period is understood to have expanded the class participating in politics due to active Kongron politics (公論政治) as a result of shadow press and press activities by students of Confucianism. However, because of the Oksa of Gyechuk (癸丑獄事) and controversy over disposal of Queen Mother Inmok (廢母論), the political forces other than Chucksin rarely came forward to participate in political affairs. Although the class participating in politics expanded, the range of participation itself reduced. Gwanghaegun did not accept public opinions such as putting a stop to the controversy over disposal of Queen Mother Inmok, and continued to use his Chucksin. Eventually, the government of Gwanghaegun resulted in a political state with no compromise or coexistence. Gwanghaegun, while continuing to use his Chucksin, did not solve problems that came with his decision, which triggered Injobanjeong (仁祖反正) without resistance.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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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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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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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68 | 0.68 | 0.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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