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과 민주주의: 유럽과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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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연도
2012년
작성언어
Korean
자료형태
한국연구재단(NRF)
근대 이후에 국민의 병역 의무는 유럽과 한국에서 크게 나누어 세 가지 사상적 흐름 속에서 이해되어왔다. 그리고 병역에 대한 이해는 동시에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나는 공화주의적 또는 평등주의적 전통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주의적 전통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급진개인주의적 전통이 있다. 병역과 민주주의에 대한 이런 상이한 이해 방식은 초역사적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역사적 경험 속에서 제시되어왔고, 상이한 이해 방식들 간의 경합 속에서 고유한 시각들로서 발전되어왔다. 이 연구는 이 상이한 세 개의 전통 각각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주로 병역과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그 관계에 대한 이해와 관련해서 관심을 가진다. 병역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로 이어졌고, 다시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병역에 대한 이해로 이어졌는지를 역사적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데에 이 연구는 관심을 기울이고자 한다. 병역과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는 어떤 초역사적인 진공 상태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등장하여 발전해왔다는 것은, 한 편으로는,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 과정에서 일어난 정치공동체 내부의 물질적 관념적 갈등 속에서 각각의 이해 방식이 전개되었다는 뜻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외부에 있는 다른 공동체와의 정치적 군사적 갈등에 의한 일정한 외부 압력 속에서 그 이해 방식이 구체적인 제도로서 한 사회 안에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연구는 한 정치공동체의 병역과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상호관계 속에서 추적하면서 동시에 그 상호관계가 국내의 정치적 압력과 국외의 군사적 압력 속에서 하나의 제도로서 구체화했음을 묘사해 보이고자 한다. 한국에서의 병역 제도 형성의 내인과 외인에 대한 연구는 유럽과 다른 훨씬 더 복잡한 두 가지 독특한 특징을 포착해야 할 것이다. 그 한 가지는 자기 합리화 과정과 논쟁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병역 제도가 식민지배권력에 의해 이식되었던 사정이고, 다른 한 가지는 뒤늦게라도 이루어질 수 있는 합리화 과정과 논쟁이 분단과 반공주의, 군부독재에 의해 억압된 채로 유예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병역과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는 이중적으로 자유롭지 못한데, 한 편으로는, 민족의 분단이라는 현실이 병역에 대한 합리적 토론을 가로막고 있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군부독재에 맞서 싸워 민주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민주주의와 병역이 단순히 대립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런 이중적 제약 속에서 1990년대 이후로 한국 사회가 급속하게 도시화하고 개인주의화하면서 병역과 민주주의에 대한 평등주의적 인식이 쇠퇴하고 (경제적 관념에 의해 지배되는) 자유주의적이거나 (반세속적ㆍ무정부주의적 관념에 의해 지배되는) 급진 개인주의적 인식이 전면화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비록 한반도는 아직 예외적인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전쟁의 탈국가화와 비대칭화로 특징지어지는 ‘새로운 전쟁(the New Wars)’이 전쟁의 변화 양상에 대한 관찰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런 전쟁(수행) 양상의 변화는 병역 제도의 합리성을 새로운 차원에서 다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탈국가적이고 비대칭적인 새로운 전쟁과 첨단 무기를 이용한 ‘스마트 전쟁’의 등장은 언뜻 보기에 과거의 총력전에 그 존재 근거를 두고 있는 국민개병제도를 오늘날 유럽에서도 그렇지만 한국에서도 더는 유효하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변화 추세에 근거하여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로 전환하자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러나 하나의 정치공동체가 전적으로 시장의 법칙을 따라서 조직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또는 철저히 개인의 자율성에 근거하여 무정부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보편적인 병역의무 제도와 같이 시민들을 하나로 묶는 ‘연대성의 효과’를 가져다줄 기능적 등가물을 생각해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한국 사회에도 병역과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논의가 더 늦기 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이 연구는 위와 같은 내용을 유럽의 역사적 경험과 한국의 역사적 경험을 비동시적으로 비교해가면서 분석할 것이다. 그러나 유럽의 변화 과정을 일반 법칙으로 승격시켜 한국의 변화 과정을 도식적으로 설명하려고 하거나 한국의 미래의 목표를 유럽의 현재로부터 쉽게 도출해내려고 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기 위해 이 연구는 할 수 있는 대로 끊임없이 유럽과 한국의 경험을 동시적으로 교차시키면서 비교ㆍ분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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