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I등재
남원 지역 동학농민혁명의 민족운동으로의 계승 = The Succession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to the National Movement of Namwon Region
저자
유바다 (고려대학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20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275-298(24쪽)
KCI 피인용횟수
0
제공처
소장기관
Since Namwon region is where Donghak Peasant Military leader, Kim Gae‐nam(金開南) lived, from early on, it has been attracting attention in the study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Therefore, most of the research that can be conducted has been conducted on the development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Namwon region. In addition, the activities of Donghak followers from Namwon after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can also be confirmed through the “SunGyoYakRyeok(殉敎畧歷)” published in 1924 by Namwon County Jongriwon(南原郡宗理院).
However, one thing regrettable is the lack of pursuit of post‐revolutionary activities based on Donghak Peasant Revolution participants officially recognized by the Honor Restoration Deliberation Committee of Donghak Peasant Revolution Participants under the Prime Minister. Therefore, this article aims to examine focusing on officially recognized Donghak Peasant Revolution participants by contrasting the Independence Movement Patriots of National Merit who were also officially selected by the Bureau of Veterans Affairs, how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Namwon region developed into a national movement.
A total of 126 people participated in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Namwon region in 1894. Among them, 66 people are found in "SunGyoYakRyeok(殉敎畧歷)" and 27 in “Cheondogyo Yimshil Gyosa(天道敎任實敎史)”. In addition, there are 15 participants under Kim Gae‐nam, and 12 participants related to the Namwon fortress battle.
The number of articipants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who participated in the 3·1 Movement in 1919 was officially one person, Ryu Tae‐hong(柳泰洪). However, considering his symbolism, who were active since the beginning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the fact that he led the Namwon Region 3·1 Movement means that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soon turned into a national movement. In addition, it is worth noting that Mun Gyeong‐rok(文璟錄) and Lim Ryang‐sun(林良淳) appearing in “SunGyoYakRyeok(殉敎畧歷)” were also registered as Independence Movement Patriots of National Merit by participation in the 3·1 Movement. In addition, it is necessary to additionally investigate Lee Gi‐dong(李起東) and Kim Jong‐ung(金鍾雄), who are sure to have participated in the 3·1 Movement as participants in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and register as Independence Movement Patriots of National Merit.
From the above, it can be seen that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which took place in Namwon region in 1894, was handed down to the 3·1 Movement in 1919. It is said that the succession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to the national movement was confirmed.
남원 지역은 동학농민군 지도자 金開南이 웅거했던 곳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동학농민혁명 연구에서 주목을 받아왔다. 따라서 남원 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전개에 대해서는 이루어질 수 있는 대부분의 연구가 이루어졌다. 게다가 동학농민혁명 이후 남원 출신 동학교도의 활동 또한 南原郡宗理院에서 1924년에 펴낸 殉敎畧歷을 통하여 확인이 가능하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국무총리 소속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기준으로 한 혁명 이후의 활동에 대한 추적이 미진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공식적으로 인정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중심으로 국가보훈처에서 또한 공식적으로 선정한 독립유공자를 대조하여 남원 지역 동학농민혁명이 이후 민족운동으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1894년 남원 지역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모두 126명이다. 이 중 殉敎畧歷 등에서 66명이, 天道敎任實敎史에서 27명이 발견된다. 그밖에 김개남 휘하의 참여자가 15명, 남원성 전투와 관련한 참여자가 12명 등이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공식적으로 柳泰洪 1명이다. 다만 동학농민혁명 초기부터 활동하였던 그의 상징성을 생각해 볼 때 그가 남원 지역 3·1운동을 주도한 점은 동학농민혁명이 곧 민족운동으로 전화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殉敎畧歷에 나오는 文璟錄과 林良淳도 3·1운동 참여로 독립유공자로 등록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서 3·1운동에 참여한 것이 확실한 李起東, 金鍾雄을 추가적으로 조사하여 독립유공자로 등록할 필요가 있다.
위와 같이 본다면 1894년 남원 지역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1919년 3·1운동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음을 알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민족운동으로의 계승이 확인되는 것이다.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
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9-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7-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2016 | 0.4 | 0.4 | 0.49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45 | 0.43 | 1.181 | 0.14 |
서지정보 내보내기(Export)
닫기소장기관 정보
닫기권호소장정보
닫기오류접수
닫기오류 접수 확인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확인
닫기이용약관
닫기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약관 (2017년 1월 1일 ~ 현재 적용)
학술연구정보서비스(이하 RISS)는 정보주체의 자유와 권리 보호를 위해 「개인정보 보호법」 및 관계 법령이 정한 바를 준수하여, 적법하게 개인정보를 처리하고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에 「개인정보 보호법」 제30조에 따라 정보주체에게 개인정보 처리에 관한 절차 및 기준을 안내하고, 이와 관련한 고충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개인정보 처리방침을 수립·공개합니다.
주요 개인정보 처리 표시(라벨링)
목 차
3년
또는 회원탈퇴시까지5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3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2년
이상(개인정보보호위원회 : 개인정보의 안전성 확보조치 기준)개인정보파일의 명칭 | 운영근거 / 처리목적 | 개인정보파일에 기록되는 개인정보의 항목 | 보유기간 | |
---|---|---|---|---|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자 가입정보 파일 | 한국교육학술정보원법 | 필수 | ID, 비밀번호, 성명, 생년월일, 신분(직업구분), 이메일, 소속분야, 웹진메일 수신동의 여부 | 3년 또는 탈퇴시 |
선택 | 소속기관명, 소속도서관명, 학과/부서명, 학번/직원번호, 휴대전화, 주소 |
구분 | 담당자 | 연락처 |
---|---|---|
KERI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정보보호본부 김태우 | - 이메일 : lsy@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439 - 팩스번호 : 053-714-0195 |
KERI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개인정보보호부 이상엽 | |
RIS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대학학술본부 장금연 | - 이메일 : giltizen@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149 - 팩스번호 : 053-714-0194 |
RIS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학술진흥부 길원진 |
자동로그아웃 안내
닫기인증오류 안내
닫기귀하께서는 휴면계정 전환 후 1년동안 회원정보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으신 관계로 개인정보가 삭제되었습니다.
(참조 : RISS 이용약관 및 개인정보처리방침)
신규회원으로 가입하여 이용 부탁 드리며, 추가 문의는 고객센터로 연락 바랍니다.
- 기존 아이디 재사용 불가
휴면계정 안내
RISS는 [표준개인정보 보호지침]에 따라 2년을 주기로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관하여 (재)동의를 받고 있으며,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휴면계정으로 전환됩니다.
(※ 휴면계정은 원문이용 및 복사/대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휴면계정으로 전환된 후 1년간 회원정보 수집·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RISS에서 자동탈퇴 및 개인정보가 삭제처리 됩니다.
고객센터 1599-3122
ARS번호+1번(회원가입 및 정보수정)